<기적의 이혼대법 181화>
* * *
적사결과 당연희가 향한 곳은 화산의 입구라 할 수 있는 화인현이었다.
이십 년 전, 대지진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던 그곳은 회생하기가 무섭게 다시금 비워져 있었다.
의천맹의 결정으로 변경된 결전의 장소.
이미 화산파의 도사들이 백성들을 대피시켰기 때문이었다.
“지존을 뵈옵니다.”
적사결을 맞이한 흑의인은 흑영단주 벽은이었다.
“그래, 준비는 잘되어 가느냐?”
“예. 묘 선생이라는 분, 정말 대단하신 진법가더군요. 그만한 규모의 절진을 벌써 절반 이상 구축했습니다. 천하제일 기관진식가는 바로 저분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괴팍한 노인네가 실력마저 없으면 쓸데가 없겠지.”
적사결이 피식 웃을 때 뒤에서 툴툴거리는 말이 나왔다.
“이거 봐, 이거 봐. 오자마자 내 욕하고 있을 줄 알았지. 하여튼 늙은이에 대한 공경이 없어.”
“오셨소.”
“갔던 일은 잘되었나 보오? 평소에는 굼뜨기 이를 데 없는 말코들이 빨리도 움직이던데.”
“본좌가 누구요?”
“흥, 누구시긴. 마도의 하늘, 대천마신교의 지존이시자 공포의 마신, 천마의 재림이시지.”
“알면서 입 아프게 뭘 묻소. 벌써 오락가락하오?”
빈정거리자마자 역공을 당한 그였다.
묘 선생은 코를 찡그리며 윗니를 살짝 내비쳤다.
“하여튼 사람 속 긁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큭큭, 진법은 문제없이 준비되겠소?”
“내가 누구요?”
“누구시긴. 피 보는 걸 무서워하면서 신진철에 혹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배불뚝이 노인네지.”
“……이런 썅.”
육두문자가 나오려하자 벽은이 조용히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잠자코 있던 그가 마기를 뿜으며 다가오니 더 중압감이 들었다.
“선생. 선생께서 본 교의 교도가 아님을 알기에 가벼운 언행에도 참고 있는 것이오. 선을 넘으려 한다면 단단히 각오하고 넘으시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이니 흘려듣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하고 딱딱한 어조.
하나 묘 선생은 그래서 더 등골이 서늘했다.
“시부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놈들하고 얽혔는지 원.”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벽은의 미간이 꿈틀거리자 묘 선생이 소리쳤다.
“혼잣말이다. 혼잣말! 내 입으로 혼잣말도 못하나?”
“그런 말은 속으로 하시오. 다른 이었다면 당장 그 혀를 잘랐을 것이오.”
“눼, 눼. 어련할깝쇼.”
묘 선생의 빈정거림에 감정 조절의 달인인 벽은조차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벽은. 그만하고 물러나거라. 내 그에게 약간의 무례 정도는 허락한 바 있으니.”
“존명.”
벽은이 뒤로 물러서자 묘 선생은 입만 벙긋거리며 ‘봤지? 봤지?’ 하고 놀려댔다.
표정만으로도 얄미움이 물씬 묻어날 정도였다.
“나잇값 좀 하시오. 일문의 문주씩이나 되면서 어찌 그리 한결같소.”
“일문은 무슨. 다들 멸문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제는 아니오. 내 다 까발렸소.”
“응? 까발려? 뭘 말이오?”
“의천맹 회의에서 기혼문이 아직 명맥을 잇고 있다고 말했소. 당대 기혼문주가 혈교를 막기 위한 절진을 펼쳐줄 것이라 말하니 다들 화산파를 물고 뜯어서 화인현을 비우게 해 주었지. 흐흐.”
“뭐요!? 그걸 왜 나랑 상의도 없이 말했소!?”
묘 선생은 한쪽 눈을 치켜뜨며 따졌다.
“그럼 언제까지 그리 살려고 했소? 항상 누가 잡으러 올까 전전긍긍, 근처에 무림인만 나타나도 설레발치면서 은거지를 옮기기 일쑤였고 독수공방하며 지금까지 늙었잖소.”
“그럼 어떡하오? 다들 기혼문의 비전만 보면 눈이 벌게져서 본문을 괴롭히는데. 내 까놓고 말해서 본문에 대해 알고서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은 교주가 처음이었소.”
“걱정 마시오. 앞으로 강소의 백리세가가 뒷배가 되어 줄 테니까. 훗날 본 교가 강소성까지 진출해 마도천하를 이룩하면 당연히 본 교의 그늘 아래에서 발 뻗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고. 하니 이제 그만 문파를 재건하는 게 어떻소?”
묘 선생은 기혼문의 내규 때문에 강소성을 떠나지 못했다.
그것은 기혼문 조사의 피 맺힌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파의 재건은 기혼문의 주춧돌이 처음 놓였던 그 자리로 해 달라는 유언.
그 때문에 역대 기혼문주들은 강소성 내에서만 이리저리 떠돌았던 것이었다.
“이보시오, 교주. 백리세가는 백 년 전에도 본문을 지키지 못했소. 천수신검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있었음에도 말이오. 한데 지금의 백리세가?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천수신검이 당시 정파에서 몇 번째였소? 무신불 법륜대사보다 강했나?”
“그와 비등했다 들었소.”
“비등은 개뿔. 제일이면 제일이고, 제이면 제이지. 한 마디로 그는 최고가 아니었소. 해서 기혼문에 도움이 되지 못한 거요. 천하제일도 아닌 고수의 비호 따위를 누가 무서워하겠소.”
“그럼 뭐 지금의 백리세가는 최고가 있소? 당대 가주인 천풍 대협은 천하제일은커녕 십대 고수 안에도 못 들 텐데.”
묘 선생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애초에 예전부터 적사결이 마음에 들었으나 강소성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관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전에 백리황 그놈 봤잖소. 그 녀석이 정파의 범주에서만큼은 최고가 될 것이오.”
“그 답답이가?”
“좀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 정파답잖소. 녀석이 당시 선생을 찾아갔을 때 무위가 절정이었는데 삼류에서 그 경지까지 이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아시오?”
“그리 말하는 걸 보니 꽤 빨랐나보오? 뭐 한 이삼 년 걸린 거요?”
“삼 개월이었소.”
“……!”
묘 선생의 입이 떡 벌어졌다.
비록 무인이 아니라 하나 절정의 경지가 의미하는 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한데 고작 삼 개월이라니!
“뭐 본좌의 참교육이 있긴 했지만 정확하게 그만큼 걸렸소. 그리고 며칠 전에 만나 보니 그새 초절정에 올랐더군. 어떻소 그만하면 다음 대 정도제일인은 녀석이 될 것 같지 않소?”
“그, 그게 가능한 거요? 약관도 되기 전에 초절정이라니…….”
“녀석 입장에서 보면 기연이 막 쏟아졌었지. 당대 최고수인 이 몸의 가르침을 받았고, 백 년 전이지만 당시 천하제일을 다투었던 천수신검의 독문무공까지 얻었으니까.”
“그 정도면 답답이가 아니라 바보 천치라도 최고가 될 수밖에 없겠군.”
묘 선생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내 교주가 허언을 한 적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믿어 보리다. 대신 십이월 그놈에게 내 주위 좀 잘 살펴 달라 하시오. 아직은 백리세가보다 그쪽이 더 믿음이 가니까.”
“만나면 티격태격하면서 녀석이 믿음직하긴 한가 보오?”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실력만큼은 뭐 봐줄 만하니까…….”
“큭큭, 알겠소. 그리 조치하리다.”
적사결은 툴툴거릴 십이월이 연상되었지만 은근히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기에 가볍게 승낙했다.
“그리고 진법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할 거 하나도 없소. 붙여 준 조수가 아주 걸작이더군.”
눈짓으로 옆을 힐끗거리는 그의 시선에는 남운적이 있었다.
“지기를 어쩜 그리 내가 원하는 대로 딱딱 배치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요. 듣자 하니 교주의 제자라던데 진짜요? 무인이 되기는 아까운데 내 제자로 삼으면 안 되오?”
“아깝긴. 이 녀석은 백리황 그 녀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보배요. 그 녀석이 후천적으로 기연을 독식했다면 적이 이놈은 선천적으로 천하제일인의 자질을 타고났소. 두고 보시오, 마도천하는 늦어도 이놈 대에서 이루어질 것이니.”
적사결은 제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남운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부님. 백리황이란 무인이 정파에서 제가 넘어야 할 산인가요?”
“음, 지금의 너에겐 제법 큰 산이지. 하나 발판으로 삼기엔 딱 좋을 것이다. 너는 그 녀석의 그릇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을 테니까.”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냐. 내 너만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구나.”
그 말에 당연희가 화색을 띠며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요즘 너무 많이 먹어서 위가 늘어날까 봐 걱정이었는데. 먹는 것도 습관이라고요.”
“또 무슨 요상한 소리야? 사내는 밥심이지. 말이 나왔으니 적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예, 사부님.”
“오기 전에 먹었잖아요! 자주 먹으면 식탐 생긴단 말이에요!”
“가자, 적아. 뭐 먹고 싶니?”
“지금 내 말 씹는 거예요?”
적사결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무릇 음식이란 꼭꼭 씹어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힘을 내서 잘 싸울 수 있는 거란다.”
저걸 마후로 삼으려 했다니.
교주 자리 내어 놓길 잘했지, 암.
“이익!”
귀가 벌게진 그녀는 씩씩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 * *
식사 후.
적사결은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벽은의 보고를 받았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사안은 전장의 현황이었다.
한데 걱정과 달리 혈교도는 개개인의 무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졌지만 그만큼 단순해졌는지 유인 작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는 보고만 줄을 이었다.
그럼에도 그중 걸리는 사안이 딱 한 가지 있었다.
“하면 지금 파악된 바로 다섯 갈래로 나뉜 부대는 완안가, 사마가, 야율가, 상관가, 그리고 탈마동의 마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네 부대의 수장은 장로들이 맡고 있으며 탈마동 쪽은 전전대의 거마였던 백혈귀마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첩보이온데 지존께서 사로잡은 완안장로가 깨어나자마자 자진했다 합니다.”
그 말에 적사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음, 본좌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구나. 설마 자결을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니…….”
“정상이 아니라지만 완안가의 무인들은 워낙 빈틈이 없어 그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유인책을 쓰기 힘들었을 겁니다. 지존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휴우, 그래 후회는 나중 일이지. 한데 다섯 부대 중 놈의 위치는 파악이 되지 않더냐?”
“예. 저도 그것이 무척 마음에 걸려 흑영단을 모두 동원했지만 어찌 된 것인지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새끼가 또 무슨 꿍꿍이속이지…….”
신궁에 남았던 모든 고수들은 소재가 확인되었으나 정작 무허의 행방이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적월까지 총동원해 놈의 행방을 찾고 있으니 조만간 확인될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니야, 뭔가 있어. 그놈은 아무리 미쳤어도 이유 없이 사라질 놈이 아니야…….”
적사결은 턱을 매만지며 고심했지만 도무지 단서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지…… 놈이 따로 움직이면서까지 향할 만한 곳이 있는 건가?’
만약 있다면 어디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 *
“날씨 한번 좋구나, 흐흐흐흐.”
절벽 위, 혈포를 두른 무허의 승복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시린 계절풍은 겨울자락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인 듯 스산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백 명으로 구성된 혈천지옥대가 허옇게 뒤집어진 눈을 한 채 대기 중이었다.
“전 부대, 뇌력 개방.”
무허의 명이 떨어지자 혈천지옥대원들의 칠공에서 정체불명의 기운이 흘러나와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마치 분신처럼 생겼으나 그 색깔은 피처럼 붉은색 일색이었다.
“흐흐, 상단전을 인위적으로 개방해 원영신을 뽑아내는 비술이라니. 언제 봐도 멋지군.”
자신의 혈마연반결과 마의의 의술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사용 시간에 따라 막대한 수명을 깎아먹는 좌도방문의 비술이나 그 무력은 그야말로 천외천이라 할 수 있었다.
“이거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무허는 절벽 아래 위치한 소림사를 내려다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소실봉 중턱에 위치한 천년 사찰은 그 위용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기세가 있었다.
그 곳곳에 자리한 연무장마다 가득한 무승들은 고련의 땀을 흘리며 중원 무학의 성지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가자, 오늘로써 본좌는 비천한 인간이었던 과거를 끊고 완전한 혈마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