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72화>
장사에 도착한 후.
적사결은 곧장 노백의 술도가로 향하지 않고 여각에 숙소를 잡았다.
해남에서 오고 있는 남운적, 그리고 사천에서 올 야공 당소평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둘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쪽은 수라혈검대와 함께 온 남운적이었다.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은 당소평과 달리 수라혈검대는 남운적만 등에 지고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것이었다.
마치 부름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교출세, 만마앙복! 지존을 뵈옵니다.”
교호와 함께 수라혈검대가 포권했고 그 옆에 남운적이 같은 표정으로 예를 올리고 있었다.
적사결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일 조장 담영에게 슬쩍 물었다.
“저 녀석 표정이 꽤 좋아졌구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지존께서 떠나신 후 대장로가 직접 사상 교육을 했습니다.”
“구양 장로가? 산재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을 터인데…….”
“지존의 전인으로 내정된 아이라는 말을 듣고는 낮에 적아를 가르치고 늦은 밤까지 업무를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사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 자신이 제자로 들이려다가 퇴짜 맞은 것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구양패는 잠도 줄여 가며, 자신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격무에 시달린 것이리라.
‘지금이라도 부르길 잘했군.’
자칫 대장로를 죽일 뻔했다.
그는 과로로 쓰러지더라도 다시 벌떡 일어나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적아, 몸은 좀 어떠하냐?”
적사결의 물음에 남운적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교주님의 은혜로 혈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발작이 아니면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의지만으로 다루는 무공이기에 쉽지 않았을 텐데 열심히 했구나.”
“감사합니다.”
남운적은 진심으로 적사결에게 감복했다.
비단 구양패의 훈육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흡성대법을 익히며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신공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공을 아무 대가 없이 자신에게 주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운적은 스스로 혈맥을 조절하며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파악하면, 그저 이름만 흡성대법이 아닌 진짜 흡성대법이라는 무학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일반인의 신체도 흡기공이 가능한 체질로 탈바꿈을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먼 훗날에나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내 너를 부른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다.”
적사결이 운을 띄우자, 남운적을 비롯해 모두가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했다.
그렇게 시작된 설명은 사왕에 대한 것이었다.
다마스커스에 봉인된 진, 사왕과 그 영체를 옮길 그릇이 필요하다는 말.
그 적합성을 가진 육체가 남운적이라는 말까지.
모든 것을 들은 남운적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 자랑스러운 신교의 교도입니다. 교주님의 속귀를 제 미천한 신체에 받들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입니다.”
남운적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적사결은 눈썹을 살짝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구양 장로…… 훈육을 어떻게 했기에 얘가 잠깐 사이에 이렇게 변한 거야…….’
* * *
적사결은 남운적만 따로 남기고 모두 내보냈다.
사왕을 빙의시키기 위함이었다.
‘사왕.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사전 계약을 할 것이다.
‘사전 계약?’
-주인과의 계약이 끝나면 저 아이와 자동으로 계약되는 것이 사전 계약이다. 계약의 인을 새기는 것은 빙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지.
‘그럼 방법은 그때와 동일한가?’
-그렇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운적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너와 사왕은 피의 계약을 하게 될 것이다. 향후 본좌가 죽게 되면 녀석은 너의 속귀가 되는 것이지. 괜찮겠느냐?”
“그럼 사왕은 평생 제 몸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으로써는 그럴 게다. 하나 본좌가 사왕의 그릇을 따로 찾을 테니 너무 염려 말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마스커스를 또다시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것도 진이 깃들지 않은 다마스커스가 있어야 하니 말이다.
“교주님, 다른 그릇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계약을 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운적은 긴장한 얼굴로 어렵게 입을 뗐다.
“무엇이기에 네가 그런 표정을 하느냐. 사내답게 말해 보거라.”
“전에 말씀하신 것 아직 유효한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제자 말이냐?”
“그렇습니다.”
“대장로의 훈육 때문에 생각을 바꾼 것이라면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 보거라. 직접 본좌의 행보를 보고 판단한 후에 해도 늦지 않느니라.”
남운적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교주님이 존경스럽고, 할 수만 있다면 사부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어째서냐? 흑사광이 아니라 왜 본좌인지 말해 줄 수 있느냐?”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대답했다.
“한때 저는, 저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저를 피하는 모습을 보고 죽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해악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저주했었지요.”
“멍청한 자괴감이구나.”
“그렇습니다. 한데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그것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몸을 치료한 지금도 그런 자괴감을 완전히 떨쳐 내었다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에 난 상처가 깊은 것이다.
정신적 상처는 육체적 상처와 달리 뚜렷한 방법이 없고, 완치도 어렵다.
특히나 어린 시절 생겼다면 더욱 말이다.
“한데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교주님께서 본교에 닥친 이 위기를 자신의 잘못이라 책하셨지만, 절대 좌절하지 않으셨다고요. 그리고 교주직을 넘기시고 스스로 혈마라는 오욕을 뒤집어쓰셨다고 말입니다.”
천하인들은 앞으로 혈마를 광혈존 적사결로 알아 갈 것이다.
그들의 후대 역시 말이다.
그것이 적사결이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고 단단한 마음을 가지면 그리할 수 있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남운적은 첫 번째 절을 올린 후 머리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저도 교주님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마음도, 몸도, 무공도.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사내가 되고자 합니다.”
“…….”
굳이 직접 자신의 등을 보여 주지 않아도 보고 있었던 것인가.
적사결은 말없이 남운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절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절, 구배지례가 끝났을 때.
“지금 그 마음을 잊지 말거라. 마음이든 몸이든 무공이든 극한까지 스스로를 갈고닦아 한계를 넘고 또 넘어 강자로 우뚝 서는 것. 그것이 강자존이다.”
“예, 사부님!”
남운적이 활짝 웃으며 일어나 포권했다.
적사결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사왕과의 계약을 하자꾸나. 그리고 이후 지난번 알려 준 무공을 완전히 전수해 주마.”
“흡성대법 말이죠?”
“아, 그런 이름을 붙였었구나. 그래. 한데 그 무공의 진명은 천축유가신공이다. 신체의 터럭 하나, 피 한 방울조차 의지 아래 두는 신공이니, 설령 심한 발작이 일어나더라도 네 몸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라.”
적사결은 뿌듯한 마음으로 전수를 시작했다.
마치 부모의 내리사랑을 실천하듯이.
* * *
칠 일이 지난 후.
사천에서 야공 당소평이 여각에 도착했다.
그는 십여 대의 짐마차를 대동한 채 다섯 명의 보조 야장들과 함께 온 것이었다.
“숙부님, 이게 다 뭐예요?”
당연희가 줄줄이 늘어선 짐마차를 보며 물었다.
“뭐긴 뭐냐. 필요한 장비는 다 챙기라기에 본장의 화로를 아주 뜯어 온 게지.”
야장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그것은 망치와 모루, 그리고 화로였다.
“대단하세요. 설마, 기존 화로를 통째로 가져오실 것이란 생각은 못 했는데 말이에요.”
“재료가 운철과 신진철인데 아무 화로로 되겠느냐.”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일단 들어가시죠. 교주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어서 가자꾸나.”
당소평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적사결의 방으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야공.”
“반갑소이다. 나 야공 당소평이오.”
그의 평대에 염마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분은 신교의 지존이시다. 당가의 가주도 아닌 자가 감히 평대를 하는 것인가?!”
“이보시오. 앞으로 천마신교의 교주는 마령존이라 대외적으로 공표한 것은 그대들이잖소. 더구나 그는 내 조카사위가 될 것이니 무슨 문제가 있소?”
당소평의 능글능글한 대답에 염마천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제반 사정을 알고도 그는 존대하기 싫은 마음으로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염마천. 됐으니 그만하거라.”
적사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장인들의 괴팍함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기관 진식의 대가인 묘 선생이 있다.
그 역시 골방에 틀어박혀 사람을 대하지 않고 연구만 하기에 나쁘게 말해서 성정이 지랄 맞았다.
“야공. 얘기는 들었겠지만, 그대를 부른 것은 이것 때문이오.”
적사결은 다마스커스 샴쉬르와 신진철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 도검에서 운철과 신진철을 분리해 주시오. 옆에 놓인 신진철은 여기까지 걸음을 해 준 데 대한 대가요.”
“……오, ……오!”
당소평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눈앞의 두 물건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중 그의 눈길을 먼저 끈 것은 샴쉬르였다.
‘세상에 이런 보도가 있다니!’
손에 느껴지는 감촉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보도는 현철보다 단단하고 만년한철보다 질기고 예리했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천하제일 신병이기라 일컬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부수기 아까울 정도로군. 향후 몇 년간은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소.”
“부수는 게 가능하겠소?”
“일단 조금 더 살펴봐야겠소. 나도 이런 재질은 처음 보는지라…….”
당소평은 말을 아끼며, 작은 쇠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샴쉬르의 여기저기를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통통. 퉁퉁. 탕탕.
신기하게 그가 두드리는 곳마다 제각각 다른 소리가 났다.
“뭐 하는 거지?”
적사결의 물음에 당연희가 답했다.
“강철의 진명을 듣고 계신 거예요.”
“진명? 숙부님 말에 따르면 강철마다 철의 목소리가 다르다고 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야장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들었어요.”
대화가 오가는 중에 당소평은 샴쉬르를 놓고 신진철을 살피고 있었다.
그 또한 한참을 두들기더니, 그는 망치를 품에 넣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그러시오?”
“이거 전설의 재료라는 말은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라 그렇소.”
당소평은 마른세수를 하더니 말을 이었다.
“문제는 신진철이오. 믿기 힘들지만, 이 금속은 살아 있소. 마치 생명체처럼 조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도검 역시 마찬가지요. 간단히 말하면 신진철이 운철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숙부님. 그럼 그 연결점을 끊어 내면 두 재료가 분리된다는 말씀이시네요?”
당연희가 약간의 지식이 있는지 단번에 알아듣고 되물었다.
“그렇지. 한데 그 연결점을 끊어 내는 것이 문제다.”
“일반적으로 철 금속은 녹이면 되잖아요? 한데 무슨 문제가 있죠?”
“두 가지 문제가 있지. 첫째, 신진철은 열을 가한다 하여 연결점이 끊어지지 않아. 오히려 특정 온도 이상이 되면 조직이 타 버리지. 그리되면 연결되어 있는 운철도 변질되어 버리기에 순수한 운철을 얻기는 불가능해진다. 둘째, 이런 경우 보통 반대쪽 재료를 건드리면 되는데, 운철은 형태를 잡고 나면 녹이는 게 거의 불가능하지. 선조께서 남기신 사료에 따르면 녹옥초강로에서 녹탄 백 근을 써도 변형조차 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럼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한 가지 있다.”
“그게 뭐죠?”
“벼락을 맞게 하는 거지. 뇌기를 접하면 신체가 마비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량의 뇌기를 쏟아부으면 신진철의 유기 조직이 마비되고 연결점이 저절로 해제될 게야. 한데 문제는 언제 어디서 벼락이 내려칠지 알 수가 없는 거지.”
그 말에 적사결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는 부스럭거리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걸 여기서 쓰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