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이혼대법-171화 (171/206)

<기적의 이혼대법 171화>

*   *   *

다음 날.

적사결은 간밤에 사왕이 언급했던 부분에 대해 당연희에게 물었다.

“정말 단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다고요?”

“사왕이 알기에는 그렇다는군.”

“하긴…… 운철로 만들어졌다던 전설상의 검들도 부러졌다는 기록은커녕 비슷한 풍문조차 없으니까요.”

“운철과 신진철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겠어?”

“저야 금속이라면 녹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가능하다고 여겼죠. 한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왕의 말이라니까 좀 긴가민가하네요.”

당연희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제련술에 관심이 컸다지만 그녀는 결국 여인.

야철장주 당소평은 그녀가 망치를 드는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야공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럼 본가로 먼저 가시겠어요?”

당연희의 물음에 적사결은 고개를 흔들었다.

“성도와 장사를 오갈 시간이 없다. 야공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장사로 오라고 해.”

“작은 숙부님이 오란다고 올 것 같아요? 야장에게 자신의 장비와 화로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신진철 하나 더 준다고 말해.”

“진짜요? 공짜로?”

“그래. 대신 필요한 건 빠트리지 말고 모두 챙기라고 전하고.”

“알았어요! 문제없이 준비할게요.”

무상으로 신진철을 하나 더 준다니.

자신의 숙부라면 대장간을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장사로 달려올 것이었다.

“그리고 구월.”

“속하, 구월. 지존의 명을 받듭니다.”

“해남에 연락해서 수라혈검대에게 남운적을 데리고 장사로 오라고 전하거라. 너는 그 일이 끝나면 곧장 섬서성으로 복귀하도록 하고.”

“존명.”

구월은 부복하며 명을 받들었고, 당연희로부터 당가에 보낼 서신을 받았다.

그가 그대로만 전서구를 띄우면 야공은 한달음에 장사까지 달려올 것이었다.

“교주님, 왠지 초조해 보이시는데 심려되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염마천이 적사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최근 들어 불길한 느낌이 계속 들어서 말이다. 기분 탓이라면 좋겠는데, 영 찝찝하구나.”

“혈교 때문에 심기가 많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그의 당부에도 적사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천마신궁.

십만대산이라는 천혜의 방벽을 두른 마인들의 심처.

검은빛을 띠는 흑석으로 쌓은 성채는 성문마저 흑철로 만들어져 검고 어두운 마도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신궁에 모인 마인들은 평소의 흑의 무복을 벗고, 모두가 붉은 승복을 입고 가사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

혈포를 입은 무허가 핏빛 불광(佛光)을 등 뒤에 업고 오만한 시선으로 자신의 신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전과 달리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목에 걸린 염주였다.

작은 두개골을 엮어 만든 해골 염주.

그 때문인지 외양만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교주님, 모든 신도들이 모였습니다.”

사마독이 붉은빛의 안광을 발하며 무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핏빛 가사를 두르고 있었다.

“그래. 준비도 끝났는가?”

“그렇습니다.”

“하면 시작하지.”

무허의 명에 사마독이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일단의 사람들이 개처럼 질질 끌려 들어왔다.

무려 마흔아홉 명으로 구성된 남녀노소.

그들은 천마신궁에서 가장 가까운 회현촌의 촌민들이었다.

사마가의 무인들은 그 마을을 불태우고 딱 마흔아홉 명만 살려서 데려온 것이었다.

뚝. 뚝.

촌민들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오줌을 지렸는지 바지가 노랗게 젖은 자도 있었다.

아혈이 짚였기에 말 한 마디, 아니 절규도 하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공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 본교의 출정을 위한 제물 의식을 시작하겠다!”

사마독의 선포에 혈승들은 합장하며 일제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불경 같기도 하고 술법의 진언과도 비슷한 그것은, 듣는 것만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종의 음공이었다.

물론 무허가 창안한 혈음진공이었다.

그것을 들은 마흔아홉의 촌민들이 동공이 풀린 채 제단에 마련된 검을 들었다.

푹. 푹. 푸욱.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의 손으로 검을 심장에 박아 넣었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듯 몸부림도 없었고, 풀어진 동공에 생명의 빛을 꺼트리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자 뒤에 시립해 있던 사마가의 무인들이 번개처럼 그들의 목을 쳤다.

서걱.

푸화아악.

마흔아홉의 시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제단을 적신 것으로도 모자라 혈승들의 앞까지 이르렀다.

장내에 혈향이 가득 퍼지자, 그들은 광기가 폭발할 것만 같은 흥분감에 한껏 고조되었다.

그때였다.

“본좌는!”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대갈일성.

그 목소리에 담긴 힘에 혈승들은 등줄기가 짜릿해지며, 제단 위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 타락한 땅에 강림한 혈불이며! 미륵이며! 구원자다!”

그의 연설은 신궁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본좌는 지금부터 죄업으로 고통받는 세상을 구제하러 나아갈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 본교의 행보가 지나간 곳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을지어다!”

무허의 악마 같은 선언에 혈승들이 한목소리로 교호를 외쳤다.

“혈세천하(血世天下 : 피로 천하를 물들이니)! 만악멸진(萬惡滅進 : 모든 악이 멸하고 번뇌가 사라지리라)!”

혈교로 바뀐 그들의 교호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부처님이시어, 오늘 마흔아홉 개의 머리를 바쳐 천하인들의 사십구재를 대신하오니 부디 당신의 중생들을 굽어살피소서!”

“혈세천하! 만악멸진!”

“죽음은 곧 새로운 시작이니 사멸하는 모든 생명은 피의 윤회를 거쳐 다시 태어날지어다!”

“혈세천하! 만악멸진!”

“새 시대를 여는 개벽의 출진이다! 천하 정화 작업을 시작한다!”

“혈세천하! 만악멸진!”

혈승들은 광기를 뿌리며 대열을 맞춰 신궁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의 진군을 보며 무허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벅찬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교주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마독이 고개를 작게 숙이며 말했다.

“말하라.”

“송구하오나 조금 서두르는 감이 있는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배교도인 흑마검귀 관패로 인해 중원에 마련해 놓은 거점들이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 상황에서 다시 보급로를 마련하기란 힘들지 않겠습니까?”

적사결의 지시에 따라 요충지를 공격한 관패.

그의 신출귀몰함에 혈교는 다수의 보급 창고를 잃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마독, 그대는 어찌 혈마열반결을 익히고도 그리 대범하지 못한가? 천성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관패 그 늙은 마구니가 두려운 겐가?”

시뻘건 혈광을 마주한 사마독은 사지를 벌벌 떨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속하는 단지 신도들이 충실히 대업을 완수하려면 저희들이 그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지휘하는 수뇌부는 응당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심마에 빠졌지만 사마독은 본능적으로 그 책임을 다하려 하고 있었다.

이는 적사결로부터 시작해 영혼에 각인된 마음가짐이었다.

“끌끌. 과연 혈마열반결을 익힌 덕분에 똥 막대기에서는 벗어난 모양이군. 하나 자네는 아직 생각이 얕아.”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교주님.”

“중원에 마련한 요충지들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야 병참이지 않습니까? 손상된 도검을 교체하고 배를 채우고 의복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하고 말입니다.”

“잘 알고 있군. 그런데도 정녕 모르겠는가?”

“……?”

사마독은 미간을 좁히고 생각했지만, 별다른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적들을 죽이고 강탈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다고 그만한 양을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림 문파를 멸문시키고 민간인을 학살하여 그 모든 전리품을 취하더라도 모든 인원에게 보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나 전시에는 재화를 당장 곡식이나 무기로 교환하기도 어려울 터.

이는 상단이나 표국 등 상계를 대상으로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특히나 어려웠다.

돈에 대해서는 절대 고수 못지않은 눈치와 감각을 지닌 돈 귀신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재산을 숨기고 줄타기를 시작할 것이었다.

한데 모든 것을 잡아 죽이는 혈교에 줄을 댈 리 만무했다.

“쯧쯧쯧, 그런 뻔한 생각만 해서 대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중원에 들어앉았다 하여 상대가 그저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로 보이는 것이야?”

“송구합니다, 교주님.”

무허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말을 이었다.

“첫째, 병참에 있어 손상된 무기를 교체하는 일 따윈 없다. 무기가 망가지면 손발로, 손발이 부러지면 이빨로 물어뜯으며 처절하게 싸우라. 너희들에게 전수해 준 혈마열반결은 그럴 만한 힘이 있다.”

사마독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째, 의복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하는 안락함은 꿈도 꾸지 마라. 죄인들의 가죽을 벗겨 입을 것이고, 그들의 시체를 베고 핏물 속에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무허는 살기 어린 안광을 뿌리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셋째, 식량 보급? 그런 것 따윈 없다. 적들의 생살을 씹어 주린 배를 채우고, 그들의 피를 마셔 갈증을 해소하라. 이것이 본교의 병참이다.”

사마독은 감격에 젖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 사마독. 교주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았사옵니다.”

“감정을 버리고 스스로를 버리고 오직 ‘혈세천하 만악멸진’이라는 교호만 생각하라. 그리되면 더러운 세상은 정화될 것이고 우리는 모두 미륵의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혈세천하! 만악멸진! 혈세천하! 만악멸진!”

쿵. 쿵. 쿵.

사마독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피를 줄줄 흘렸다.

하나 그의 얼굴에서는 광기 어린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일어나라. 지금부터 할 일이 아주 많으니 말이야.”

무허가 가볍게 손짓하자 사마독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이럴 수가! 내력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무형기를 다루다니!’

지근거리였는데 기세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사마독은 감탄을 넘어 신을 영접한 듯한 눈으로 무허를 바라보았다.

“참, 그건 그렇고, 혈천지옥대는 어찌 되고 있나?”

고개를 돌린 무허의 눈에는 비쩍 마른 노인이 있었다.

그는 천하 오대명의 중 한 명인 마의 능소보였다.

“모든 시술이 완료되었고, 총인원은 백 명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마의가 노고가 많았군. 흐흐흐흐.”

“다 교주님과 본교의 대업을 위함이지 않습니까.”

능소보의 안광은 붉은빛을 띠며 사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역시 혈마열반결을 익혔고, 그 천재적인 의술을 무허를 위해 십분 발휘한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혈천지옥대였다.

“신이 평생을 연구한 심득을 쏟았습니다. 제 몫을 할 것이니 부디 중히 써 주십시오.”

“걱정 말게. 그들은 이 인세에 지옥을 선사하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니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야. 크흐흐흐.”

무허는 광소를 흘리며 마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감읍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나서 볼까.”

거의 끝을 보이는 수하들의 대열을 보며 무허가 말을 이었다.

그러자 사마독을 비롯한 중진들이 짧게 읍하고는 각자가 맡은 부대를 향해 움직였다.

무허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천하를 정화시킨 후에는 저것들도 다 박멸해야 할 텐데 조금 아쉽긴 하군.’

혈마로 다시 태어난 무허, 그는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마저 모조리 없앨 작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