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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이혼대법-165화 (165/206)

<기적의 이혼대법 165화>

“계약하는 방법은 아까 내가 보여 준 것과 같소.”

“본좌의 피를 도신 위에 뿌리면 된단 말이오? 그간 피가 튄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지금까진 왜 아무 반응이 없던 것이지? 혹시 사왕으로 상처를 내지 않아 그렇소?”

“그건 상관없소. 주인의 피를 먹이기만 하면 되니까. 다만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소.”

마은호는 검지를 들어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집중이오. 단초를 하나 드리자면 피가 자신의 영혼이라 상상하며 검신에 닿을 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되오.”

“……흐음. 그것만으로 계약이 성사된다라.”

“하하. 자세한 건 그 이후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오.”

“알겠소. 일단 한번 해 보지.”

적사결은 팔뚝을 긋고 피를 사왕의 도신 위로 흘렸다.

그가 알려 준 방법대로 집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중, 집중, 집중…….’

속으로 되뇌며 의지를 집중했다.

천축유가신공을 운용한 경험 덕분에 피 한 방울에 의지를 담는 것은 쉬웠다.

그러자 마은호의 말대로 정신이 빨려 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어, 대단한 사람이군.”

마은호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겪어 본 적이 있기에 한눈에 적사결의 정신이 다마스커스 속으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소저는 어떤 분이오? 이걸 이렇게 간단히 성공시키다니…….”

마은호 자신도 방법을 알게 된 후 바로 계약을 하지 못했었다.

집중이든 상상이든,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이루는 것은 차원이 다르니까 말이다.

그의 경우,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후에야 정신이 파랑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의 지존이십니다.”

구월이 자랑스럽게 답했다.

*   *   *

적사결은 주변을 둘러싼 공간이 물결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

이곳에 오래 지내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끄응, 여기가 사왕 속인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

오로지 일그러진 공간이 지독한 고독감을 선사했다.

“그건 그렇고 정신체라 그런지 본모습이 나오는군.”

지금 자신의 모습은 당연희의 것인 여인의 몸도, 이전의 육체인 무허의 것도 아니었다.

본래 천마신교의 지존이었던 자신이었다.

잠시나마 몸을 되찾은 듯한 희열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아, 하루속히 내 몸을 되찾고 싶구나.”

그렇게 짧게 탄식하던 그때였다.

파아아앗.

[주인이여. 나와 피의 계약을 하겠는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적갈색 기운의 실타래가 뭉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형체를 갖춘 그것은 반투명한 거인이었다.

맨몸이었던 파랑과 달리, 그는 머리끝까지 뒤덮는 적갈색 피풍의(披風衣)를 입고 있었다.

“넌 사왕? 아니 사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혹시 다른 이름이 있느냐?”

[주인이 부르기 쉬운 대로 부르면 된다. 나의 진명을 그대가 알게 되면 피의 계약이 끝나더라도 영원히 그대에게 종속되어야 하니까.]

“그 말은 내가 너의 영원한 주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들의 진정한 주인은 맹약의 존재인 진의 왕이다. 내가 그대를 따르는 것은 피의 계약이 허락하는 동안 성립하는 일시적인 관계지.]

“뭐, 어쨌든 너희들의 왕이 존재하나 피의 계약을 하면 본좌를 섬긴다, 그 말 아니더냐?”

[그렇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약이니 하는 복잡한 말이 많지만 사왕이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파랑과 달리 생각도 깊은 것 같고.

“계약하지.”

한 마디의 짧은 답변.

그러자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왕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실낱같은 기운이 적사결의 가슴을 향해 다가왔다.

그 기운은 영혼에 하나의 술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크윽.’

마치 지옥불로 영혼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하나 적사결은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술식이 끝나자 주먹만 한 원형 속에 정삼각형과 역삼각형이 교차하고 처음 보는 진언이 떠올랐다.

[계약은 완료되었다. 나 대지의 일족, 이프리트 زمین은 그대를 피의 계약이 존재하는 한, 주인으로 받들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사왕의 진명에, 적사결은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되돌아온 현실에서 적사결은 눈을 번쩍 떴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눈을 뜨자마자 염마천이 안위를 물어 왔다.

영혼에 새겨지던 고통에 의한 영향인지 적사결의 온몸에 땀이 흥건했기 때문이었다.

“괜찮다. 염려 말거라.”

“이것으로 닦으십시오.”

적사결은 구월이 건넨 천으로 땀을 훔치고 마은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 덕분에 계약은 무사히 끝냈소.”

“고통스러웠을 텐데 잘 버티셨소.”

“뭐, 고통엔 익숙한 편이니 버틸 만했소. 그것보단 오히려 그 공간이 더 힘겹더군.”

“하하하, 이해하오. 나는 거기서 나오자마자 토했으니 말이오.”

뭐, 구토는 이전 몸에서 진저리가 나도록 겪었으니까.

“한데 권능은 어떻게 쓰는 것이오?”

“……음. 그건 그대의 진과 소통을 하며 개발해 나갈 부분이니 뭐라 조언하긴 힘드오. 파랑의 말에 따르면 진의 속성에 맞는 계약자의 체질이나 성정 같은 선천적인 부분과 후천적으로 갈고닦는 부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했소. 그대의 진은 어떤 속성이오?”

마은호의 물음에 적사결은 계약을 끝내고 절로 알게 된 그것을 말했다.

“땅이오. 대지의 진이라는군.”

사대원소(四大元素) 중 땅의 속성.

그것은 사왕이 지닌 기본적인 공능과도 닿아 있었다.

바로 기운의 흡수와 증폭.

만물을 포용하는 대지의 특성과 죽음을 생명으로 치환하는 흙이 지닌 고유의 힘이었다.

“대지의 힘이라니 굉장한 권능을 얻으셨구려.”

마은호는 내심 적사결이 얻은 권능이 부러웠다.

분명 영하와 같이 사막과 황야가 지형 대부분을 차지하는 척박한 곳에서 물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 그는 땅과 물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땅이 우선이라 여겼다.

예를 들자면 땅의 권능으로 지형을 변화시키면 물을 끌어오는 관개가 가능해진다.

물은 지형을 따라 흐르는 것이니까.

또한, 사파두와 같은 사막을 가로지를 필요 없이 우회하는 관도를 만든다면 교통도 원활해진다.

교통이 원활해지면 물류의 이동이 늘어나 삶이 풍족해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농업을 비롯해 건축까지 그 효용성은 무궁무진했다.

웅웅웅웅.

그 마음을 읽었는지 파랑이 공명음을 토했다.

마은호는 미안하다는 듯 부드럽게 검갑을 쓰다듬었다.

“한데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적사결이 파랑을 쓰다듬는 그를 보며 말했다.

“말씀하시오.”

“그대는 진을 봉인한 연금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시오?”

“그건 나도 잘 모르오. 정히 궁금하면 사왕과 파랑을 불러 이 자리에서 묻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그들이 당사자이니 말이오.”

“그것도 그렇군. 하면 사왕만 불러낼 테니 그 싸가지는 붙들고 있으시오.”

그 말에 파랑이 작게 떨었다.

마치 분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적사결은 무시한 채 사왕을 불러냈다.

반투명한 적갈색 거인은 땅의 힘을 지니고 있어 그런지 존재 자체가 묵직했다.

[무슨 일인가, 주인?]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다. 너를 이 칼에 가둔 연금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다오.”

[나도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까마득한 그 옛날, 세상에 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어떤 노인을 만났지…….]

갓 현신한 존재이기에 온전하지 못했던 정신이었다.

사왕은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재해를 세상에 내렸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연금술사.

그는 사왕을 샴쉬르에 봉인했고, 사왕은 세월이 흐르며 정신을 차렸음에도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본신의 힘으로 봉인을 깨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래 지내다 보니 나쁘지 않다 여긴 점도 있기 때문이었다.

“휴우…….”

적사결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왕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주인, 실망할 것만은 아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마스커스 안에 있었다지만 보고 듣는 것은 가능하지. 해서 주인이 원하는 운철에 대한 답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냐?!”

바로 지척에 답이 있었다니.

적사결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물론이다. 바로 다마스커스에 운철이 섞여 있으니까.]

“……!!”

너무 놀라 이제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운철을 손에 쥐고 다녔었다니.

[나를 봉인한 연금술사가 말했었다. 다마스커스는 신의 금속과 현자의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가 말하길 영이나 혼과 같은 정신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신의 금속, 오리할콘이 유일하다 했다. 그러니 서역의 오리할콘과 중원의 운철은 같은 물질임이 분명하다.]

“하면 현자의 돌은 무엇이지?”

[그것을 이곳의 물질과 비교해 설명하긴 힘들다. 나는 주인을 만나기 전에는 줄곧 벽에 걸려 있었으니까. 나보다는 저 친구가 더 잘 알 듯한데.]

사왕의 손끝은 파랑을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한곳에 계속 머무른 사왕보단, 파랑이 더 낫긴 할 것이다.

“파랑은 과거 선조님들과 천하를 주유한 적이 있소. 식견이 풍부하니 도움이 될 것이오.”

마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왕의 말에 동의했다.

“하면 싸가지 좀 나오게 해 보시오.”

“알겠소.”

짧은 대답과 함께 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에라도 적사결에게 달려들 듯 으르렁거렸지만 사왕이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고 있기에 그러지 못했다.

[진의 자부심도 버린 흙덩어리 같으니. 주인을 지키는 개나 다름없군.]

[수백 년을 갑갑하게 갇혀 있던 나에게 작은 자유를 허락해 준 주인이다. 그러는 너도 저자를 따르지 않는가?]

[따르다니? 저 녀석과 나는 동등한 관계다. 네놈처럼 주종 관계가 아니다!]

[그러면서 ‘들어가’ 한 마디에 저항도 못 하고 기어 들어가는가? 그것참 대단히 동등하군.]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자신 있으면 덤벼라! 질질 싸게 만들어 줄 테니!]

[오냐, 그 상판 진창에 처박아 뭉개 주마!]

사왕과 파랑은 얼굴을 마주하며 당장에라도 싸울 듯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왕, 물러서 있거라.”

“파랑, 떨어져.”

두 사람의 지시에 두 영령은 각자의 주인 뒤로 이동했다.

하나 둘의 반응은 상반됐다.

사왕은 그런 파랑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고, 파랑은 모멸감을 느꼈는지 몸을 부부들거리고 있었다.

“파랑, 동족인데 친하게 좀 지내지 그래?”

마은호가 파랑을 달래 보려 했지만, 오히려 파랑은 격분했다.

[누가 동족이란 거냐?! 놈은 보잘것없는 땅의 일족. 나는 고고한 물의 일족이다. 동족 취급이라니 불쾌하군!]

그 말에 사왕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물비린내 풍기는 냄새나는 일족이 고고하긴. 웃기고 있군.]

두 영령은 거리를 두고도 서로를 물고 뜯었다.

“사왕, 그만 갈궈. 그래도 저 싸가지 입으로 들을 게 있으니까.”

적사결의 말에 파랑이 소리쳤다.

[갈구긴 누가 누굴 갈궈! 하등한 인간 놈이 지금 뭐라 지껄이는 거냐!]

“됐고. 현자의 돌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봐라.”

[이익! 지금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이냐?!]

“아는 게 없나 보군? 싸가지도 없는데 도무지 쓸 데도 없군. 쯧!”

[그렇게 도발한다고 이 몸이 알려 줄 것 같으냐! 흥! 궁금해 죽으라지!]

“운철도 알게 된 마당에 굳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이보시오, 마 대장. 얘 다시 집어넣으시오. 도무지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군.”

마은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파랑이 다급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넣지 마. 조용히 있을게. 응? 은호, 듣고 있는 거야?]

“그럼 협조 좀 해. 먼저 무례한 것은 너였으니까 말이야. 몇 번이나 말해야겠어? 인간들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예의가 중요하다니까.”

[쳇! 알았어, 알았다고.]

“휴우…….”

마은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적사결은 둘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봐, 파랑. 너도 그냥 협조하려면 자존심이 상할 텐데, 우리 내기 한번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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