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45화>
“흐흐, 힘으로 해결하자? 거 좋지.”
적사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무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천마신교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 아닌가.
‘무식한 거야, 용감한 거야?’
백류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비록 본토와 떨어진 바다 위 섬이라지만 사무련의 영역이다.
더구나 교주 자신은 물론 수하들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삼만이 적은 병력은 아니지만 사무련 전체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힘으로 해결하자고 했습니까?”
백류혼은 결국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오대세가와의 전면전이 코앞인 이상 배후에 적을 늘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뭔데?”
“사정 좀 봐주십시오.”
정에 호소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뭐? 봐 달라?”
“제가 반선주도 구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간의 정도 있으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적사결은 잠시 고민했다.
녀석이 금개를 위해 움직인 부분이 있다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네놈. 이러려고 혼자 왔구나. 어쩐지 공무를 보러 온 놈이 수행원 하나 없다 했다.”
“……좋게, 좋게 해결하려는 거죠.”
백류혼이 고개 숙인 것을 사무련의 수하들이 보았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사무련의 대표로 와서 고개를 숙인 것은 사무련이 그런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그는 그딴 허례는 상관하지 않았다.
“좋다. 네놈을 봐서 이십만 냥 내주마.”
“너무 작습니다. 반 정도는 주십시오.”
“여기 인원을 봤겠지만 우리도 꽤 자금이 필요하다. 하니 그것만 받아. 백천악도 아니고 네놈 대가리 숙이는데 이십만 냥이면 과분하지.”
하나 백류혼은 좁힌 미간을 펴지 못했다.
이십만 냥만 받아간다면 대기 중인 철숙은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끼, 표정 관리 더럽게 안 되네. 하면 이건 어떠냐?”
적사결이 운을 띄우자 백류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전대 하오문주와 자리를 만들어다오. 하면 내 오십만 냥까지 양보해 주마.”
“반선주 때문에 그를 만나려 하십니까?”
“그래. 가능하겠느냐?”
“네,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목적이 있으니 아버지는 허락해 줄 것이다.
백류혼은 오십만 냥을 달성하니 조금 더 욕심이 났다.
“이제 두 번째 안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만간 본련과 오대세가의 전쟁이 있을 예정입니다. 해서 묻겠는데 해남도에는 언제까지 머무르실 겁니까?”
“우리가 배후의 칼날이다 이 말이냐?”
“흑랑대만이라면 몰라도 삼만이란 대병력은 껄끄럽죠.”
“당장은 떠날 생각이 없다. 아직 수하들이 계속 모이고 있으니 말이다.”
“하면 저희들에게 동맹을 제안하시고 우호를 표하십시오.”
“동맹의 제안은 그렇다 치고 우호를 표하라?”
“네. 공물 말입니다.”
순간 적사결의 얼굴이 구겨졌다.
또 돈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새끼가 돈독이 올랐나. 말끝마다 돈돈 거릴 것이냐!”
“그러게요. 이래서 제가 감투 쓰는 걸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류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어쩌실 겁니까? 저도 본련의 수뇌부를 설득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오대세가와 싸우기 전에 여기부터 정리하겠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등 뒤를 겨누는 칼을 놔두고 싸우는 집단이 어디 있답니까?”
연맹에 가입된 흑도 문파를 멸문시킨 흉수에 대한 복수.
그것은 전쟁 전, 연맹의 결속력을 높이는 데 딱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저 새끼 말하는 꼴을 보니 어떻게든 백만 냥을 채워 가려는 것 같은데…….’
싸움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아까처럼 힘으로 도발한다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맞서 싸우는 것이 패도였으니까.
하나 지금 백류혼의 요구는 집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당했다.
그렇게 고심하는 적사결의 눈에 말석에 앉아 있는 당연희가 보였다.
‘그래, 쟤도 있었잖아.’
적사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당연희에게 말했다.
“어이, 독비화.”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너도 광동혈사의 당사자니까 수금에 협조하지 그래?”
“제가 왜요?”
“따지고 보면 사건의 발단은 너 때문이었잖느냐.”
“흠…….”
당연희는 잠시 고민했으나 그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그녀의 답은 좌중의 눈을 두 배로 크게 만들었다.
“알겠어요. 그 공물이란 것, 제가 대신 내죠. 오십만 냥이면 될까요?”
오십만 냥이 뉘집 개 이름인가.
백류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천전장에서 발행한 전표예요. 중원의 어느 전장에 가더라도 환전해 줄 것이니 믿으셔도 돼요.”
오십만 냥짜리 전표를 받아 든 백류혼은 의심하지 않았다.
사천전장은 사천회를 뒷배로 둔 곳으로 사천당가의 방계 혈족이 운용하는 전장.
그곳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사천의 경제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천당가가 천하 오대거부 중 한 곳이라지만 어마어마하군. 개인이 오십만 냥을 들고 다니다니.’
적사결은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다 해결되었으니 공식적인 자리는 이만 끝내도록 하지.”
적사결의 결정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백가 애송아. 오대세가에서 갑자기 왜 선전포고를 한 것이냐? 도제와 권왕, 그리고 검제가 그 꼴이 되었으니 숨죽이고 있어도 모자를 판국에 말이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었으나 태연하기 그지없는 물음이었다.
“휴우, 그렇기에 사활을 거는 겁니다. 오대세가는 이번 일로 자신들의 존망이 위태롭다 여기고 있으니까요.”
“하긴 가문의 대들보가 무너졌으니 주춧돌이 빠지기 전에 단도리를 쳐야겠지.”
적사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데 교주께서는 소양현에 소림 십계승이 와 있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백류혼의 물음에 적사결이 좌우를 돌아보았다.
“구양 장로, 관 장로. 알고 있었는가?”
“송구합니다. 흑영단이 합류하지 않았기에 정보력이 미욱한 상황입니다.”
“흠. 하긴 적월도 광동성에는 파견하지 않았으니까 첩보의 부재는 어쩔 수 없지. 한데 흑영단주는 설득이 안 되던가?”
“대쪽 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나마 무허와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켜 주었기에 저희들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흑영단은 천마신교의 눈과 귀다.
특히 정보를 중시하는 적사결은 흑영단만큼은 무력에 상관없이 충성심으로 그들을 조직했었다.
그렇기에 무허를 자신으로 알고 있으니 등을 돌리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이상한 점이 있기에 중립을 지켰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십계승이라…… 계율원에서 놈들이 나왔다는 것은 노리는 대상이 본좌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백류혼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바꿨는데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온 거지…… 쯧.”
“소주와 북경에서 그 난리를 쳤지 않습니까. 소림도 눈과 귀가 있으니 정보가 들어갔겠지요.”
“그렇겠군. 뭐 어쨌든 거기서 미적거리다 돌아가겠지. 해남도에 들어왔다간 백팔나한이라도 뒈질 테니까.”
“말이 나와서 그런데 지금 모습은 왜 바꾸지 않는 겁니까?”
“이 얼굴이 왜?”
“아니…… 그게…….”
백류혼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저했다.
“뭔데 인마. 똑바로 얘기해.”
“마주 보고 대화하기 힘듭니다. 좀 부담스럽네요.”
미모가 미모인 만큼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백류혼은 적사결이 외모를 바꿔 주었으면 한 것이었다.
교주를 보고 심장이 콩닥거리는 자신이 싫었으니까.
“쯧, 본좌도 바꾸고 싶으나 안 되더구나.”
“안 된다고요?”
“그래. 성별이 달라 그런지 몰라도 본좌가 원하는 대로 안 되더구나.”
적사결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남자로 골격과 근육을 바꾸려 하는 의지를 몸이 거부한다 해야 할까.
어쨌든 천축유가신공으로도 성전환은 불가능했다.
“진지하게 충고 드리자면 면사를 쓰고 다니시는 게 어떨까요?”
“왜? 설마 본좌를 보고 꼴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직접적인 언어 폭격에 백류혼은 머쓱해졌다.
“한심한 놈. 자고로 여인의 외모에 흔들리는 놈들치고 제대로 된 놈 없다 했다. 이건 그냥 얼굴 가죽이고!”
적사결은 볼을 잡아당기며 강조했다.
그리고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이건 그냥 가슴에 달린 지방 덩어리일 뿐이야!”
“푸풋. 콜록.”
백류혼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이 나왔다.
“내 몸 가지고 지금 뭐하는 거예요!? 당장 그 손 떼요!”
당연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허어, 발가벗고 달려들 땐 언제고 이게 부끄러워?”
“그거랑 이게 같아요? 여기 당신 수하들도 줄줄이 있는데. 왜 속곳도 벗고 춤이라도 추지 그러세요!”
그러고는 문을 쾅 닫으며 내실을 나가 버렸다.
“본좌가 좀 심했나?”
그의 물음에 구양패가 즉각 대답했다.
“심하셨습니다. 나중에 사과하십시오. 여인이지 않습니까.”
적사결은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여독이라도 풀고 가지 그래.”
“마인들 사이에서 잠이 오겠습니까. 전 여자 없으면 잠을 못 잡니다.”
“하여간 더럽게 밝혀요. 알았으니 그만 가봐.”
“예. 노백과의 만남은 결정되는 대로 연통하겠습니다.”
“전대 하오문주 이름이 노백인가?”
“본명은 아니고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부르시더군요.”
“되도록 빨리 날을 잡거라. 본좌도 여인의 몸을 쓰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야죠. 저도 영 불편하네요.”
백류혼은 피식 웃고는 내실을 나섰다.
객이 나가고 나니 염마천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검대를 풀어 검갑을 두 손으로 받치고는 무릎을 꿇었다.
“그간 경황이 없어 지존의 신물을 돌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들린 검은 적령, 천하 십대기병의 하나이자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신검이었다.
“한데 혈우가 보이지 않는구나. 어찌 된 것이냐?”
적사결은 염마천이 항상 등 뒤에 메고 다니는 애검이 보이지 않아 물은 것이었다.
“탈출 중에 교의 형제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부러뜨렸습니다. 신교를 수호하기 위한 검이 그들을 해칠 순 없으니까요.”
“쯧쯧, 그러고 보면 자네도 참 고집불통이야.”
혹시라도 목숨이 경각에 처할 시 혈우를 사용할까 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교를 생각하는 염마천의 마음은 호교대법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당분간 적령을 쓰도록 해.”
“안 됩니다. 어찌 지존의 신물을 속하가 쓸 수 있겠습니까.”
“본좌가 허락하는데 뭐가 문제야. 그렇게 하도록 해.”
염마천은 그래도 두 손에 올린 적령을 패용하지 않았다.
“고집 부리긴, 쯧.”
적사결은 적령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거두었다.
“염마천.”
“하명하십시오.”
“본좌가 적령을 다시 잡을 때는 몸을 되찾은 그때로 하자꾸나. 지금의 몸으로 적령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구나.”
“…….”
염마천 역시 검수였기에 그 마음을 이해했다.
애검이란 특별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본좌를 대신해 본교를 지키는 일에 적령을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하거라. 적령은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신검이다.”
“…….”
“대답.”
“조…… 존명.”
그제야 염마천은 적령을 등 뒤에 메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실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마령존 흑사광이었다.
그는 몸을 완전히 회복한 직후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어서와, 흑랑대주. 어쩐 일인가?”
“교주님,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여 줄 것이라니?”
“전에 말씀드렸던 기연에 대한 것입니다.”
오, 기연.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