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44화>
해남도에 발을 디딘 백류혼은 마인들의 안내를 따랐다.
사무련의 사자라는 신분을 밝힌 그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사무련의 영역인 해남도에 그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사무련의 묵인 덕분이었다.
'이만? 아니 삼만은 되겠구나…….'
백류혼은 예상보다 많은 인원에 침음을 삼켰다.
흑살방으로부터 본단에 보고된 인원은 약 일만.
그래서 사무련은 이만 명의 무인을 파견한 것이었다.
한데 현장을 확인한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흑살방, 이 개새끼들. 이런 중요한 정보를 대충 처리하다니.'
어느 단체나 마찬가지겠지만 대규모 무인들의 이동은 일급 기밀에 속한다.
일급이 붙었다는 뜻은 집단의 존망이 걸렸으니 이를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다. 마인들과 광동성 무인들 간에 워낙 큰 수준 차가 있으니.
하나 그런 변명도 중견 문파까지만 통하는 법.
흑살방 정도로 한 개 성을 관장하는 규모가 되면 어떤 이유로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지존께 아뢰겠습니다."
"알겠소."
백류혼은 적사결의 거처를 지키던 수라혈검대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리고 보고가 있은 후에야 백류혼은 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실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흑사광은 해남도에서 가장 큰 장원을 통째로 빌렸고, 적사결이 거하는 전각은 그 중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응? 왜 교주가 상석이 아니라 말석에 앉아있지?'
긴 탁자를 기준으로 상석은 좁은 면에 의자 하나만 놓여있는 자리다.
한데 그 자리에는 미모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자신이 익히 아는 교주는 제일 끝자리인 말석에 있었고 말이다.
'천마신교에 저런 미인이 있었나?'
백류혼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쁘다 생각했다.
그녀의 미색은 항주의 보옥이라 불리는 매양옥보다 더 눈부실 정도였다.
매양옥이 옥이라면 눈앞의 여인은 칠채보주라 해야 할까?
하지만 그 고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칠었다.
"왔으면 냉큼 인사부터 올려야지 뭘 야려?"
"엥?"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백류혼은 당황한 얼굴로 적사결을 바라보았다.
저 말투는 아주 익숙했다.
"휴우, 백가 애송아. 본좌가 마도지존이다."
"에엑!!"
휙. 휙.
백류혼의 고개가 두 사람을 빠르게 오갔다.
그럴수록 입은 점점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게 됐다."
"그렇게 된 게 어떻게 된 거냔 말입니다!"
"이 자식이 지금 본좌에게 따지는 거냐."
"그게 아니라 정황을 묻는 것이지 않습니까!"
"귀 안 먹었다. 소리치지 말고 앉기나 하거라."
"하아……."
백류혼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적사결 반대편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이 새끼가 사자로 온 거면서 예의가 없어. 인사는 하고 앉아, 인마!"
적사결의 호통에 백류혼은 정신을 다잡고 포권했다.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백류혼이라 합니다. 미력하지만 사무련을 대표해 왔습니다."
백류혼의 소개에 구양패 이하 신교의 중진들이 답례의 인사를 했다.
마지막은 당연희였다.
"사천당가의 당연희라 합니다."
"아…… 예."
백류혼은 적사결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소주와 북경에서 이혼대법과 관련한 사건을 직접 겪었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잠깐! 당연희라면 사천제일미? 별호가 독비화 맞습니까?"
"맞아요. 절 아시나 보네요."
"어찌 모르겠습니까. 중원제일미를 뽑는다면 소저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 아닙니까."
백류혼은 과거 기루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기에 그녀의 미모에 대해 귀가 아프게 들었다.
화류공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야! 지랄하지 말고 앉기나 해! 중원제일미가 다 얼어 죽었냐? 서른 먹은 노처녀에게 갖다 붙이게."
"그 귀한 얼굴로 그리 험악하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팔자주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백류혼의 말에 이어 당연희도 소리 높여 따졌다.
"누가 노처녀예요?! 사천에서는 서른 중반은 되어야 노처녀 소리 듣는다고요!"
"신강에서는 스물 중반 넘으면 노처녀야. 강소성에서는 약관도 안 된 열다섯에 혼례를 올리던데 서른이면 당연히 노처녀지."
"…… 이익!"
당연희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더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좌우에 앉은 초고수들의 서늘한 안광.
그것은 큰소리 한 번 냈다고 번득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는 백류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인들의 안광이 섬짓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뭐 살얼음판이군......'
당연희를 거들려다 느껴진 은근한 압박감.
백류혼은 티 나지 않게 침을 꼴깍 삼켰다.
"자자, 분위기 험악해지니까 그만해."
적사결이 손을 저어 수하들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압박감이 없어졌고 두 사람은 편히 숨 쉴 수 있었다.
"백가 애송아, 아니지. 사무련의 사자로 왔으니 이전처럼 부르면 안 되겠지. 직책이 무엇이냐? 소련주?"
"아직 소련주는 아닙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오냐. 그러면 백류혼, 무엇을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 왔느냐?"
"그전에 교주의 존체는 어찌 된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별일 아니었다. 광동성에서 있었던 사건에 본좌와 저 여인이 휘말렸고 그 과정에서 반선주를 사용했기에 영혼이 뒤바뀌었을 뿐이다."
"하면 반선주를 왜 다시 사용해 본래 대로 돌아가지 않은 겁니까? 한 방울이면 될 텐데요."
"저 녀석이 다 마셔버렸거든."
"…… 허."
백류혼은 헛웃음이 나왔다.
딱 한 병 남은 것을 홀랑 날려 버렸다니.
그것도 본래 몸을 되찾기도 전에.
저 철저한 교주가 도대체 어찌 관리했기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생각할수록 짜증나니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말거라. 사적인 것은 이 회의가 끝나고 하자꾸나."
"…… 예. 그렇게 하시지요. 이번 방문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백류혼은 품에서 하나의 문서를 꺼냈다.
거기에는 한가득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얼마 전 광동성에서 사망한 흑도인들의 명단입니다. 거의 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방금 전 광동성에서 사건에 휘말렸다 하셨는데 혹시 교주께서 광동혈사와 관련이 있으십니까?"
"흠……사무련에서는 그걸 광동혈사라 부르는가 보군. 맞다. 본좌가 그놈들을 때려잡은 장본인이다."
"그랬군요."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어디 칠 테면 쳐보라는 도발적인 언행.
그러나 백류혼이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인사였다.
"뭐 어쩌겠습니까. 피에 미친 살인귀도 아니시니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으셨겠죠."
"틀린 말은 아닌데 말이 귀에 좀 거슬리네."
적사결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그리고는 갑자기 당연희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야, 좀 씻어라 씻어. 귀지가 왜 이렇게 많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당연희는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적사결은 히죽 웃으며 다시 백류혼에게 물었다.
"그래서 죽였는데 뭐? 이유도 묻지 않는 걸 보니 따지지도 않겠다고?"
"그건 아니죠. 따질 건 따져야지요. 만 명의 생목숨이 날아갔는데요."
"그럼 따져봐."
"무릇 일에는 경중이 있고, 그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과함과 모자람이 있지요. 분명 교주께서 심기가 상할 정도로 중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처리가 좀 과했습니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하루살이들이 겁도 없이 계속 덤볐기에 다 상대해주긴 했지만 만 명을 죽인 것은 과한 부분이 있었다.
비록 절반은 벽력탄에 죽긴 했지만 어쨌든 죽인 건 죽인 것이다.
"하나 버러지들이 죽겠다고 달려드는데 본좌로서는 밟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본좌가 죽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일의 뒤처리를 여쭙는 것입니다."
"뒤처리라니?"
"교주께서 과하게 손을 쓰신 덕분에 생긴 과부가 칠천 명이고 아비 잃은 자식이나 고아가 만이천 명입니다. 전쟁도 아니고 개인이 이런 일을 벌인 경우는 강호사에 전무후무합니다."
만약 전쟁에 의해 그런 일이 생긴다면 뒤처리는 간단했다.
승자가 패자로부터 얻은 전리품으로 전쟁으로 피해 입은 자들을 구제하기 때문.
그래야 정복한 지역의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본좌에게 피해 보상을 하란 말이냐?"
적사결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싫으십니까?"
"싫다면 어쩔 건데?"
"돈 많으시잖아요."
"없다. 여기가 신강도 아닌데 본좌가 돈이 어딨느냐?"
"흑살방 총관이 인근 전장의 돈을 모두 인출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자의 곁에 마인이 붙어있다는 증언도 확보했습니다. 확인해보니 대략 백만 냥이더군요."
"지독한 새끼. 이제 보니 그 돈 찾으러 온 것이구나."
백류혼은 대꾸하지 않았다.
곧 오대세가와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흑살방을 비롯해 멸문한 문파들의 돈을 긁어모으면 전쟁자금을 충당할 수 있으니 돈이 목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전쟁고아를 들먹였지만 말이다.
"밖에 있느냐."
적사결의 명에 수라혈검대원이 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가서 네 마리 짐승 새끼들 좀 데려오너라."
"존명."
백류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짐승입니까? 혹시 그때 그 영물 원숭이들을 부르시는 겁니까?"
전신에 긴장감이 바짝 들었다.
북경에서 남궁세가의 정예, 창궁검대를 씹어 먹었던 네 마리 원숭이들.
붕아조차 그놈들의 신위를 두려워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 그 아이들은 여기 없다. 본좌의 반려영물에게 설마 짐승새끼라 부르겠느냐."
적사결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백류혼은 그제야 안심했다.
잠시 후.
수라혈검대원이 네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들은 네 발로 기어왔다.
흑살방주 사악진과 총관, 조가장주 조군악과 혈화문주 방운덕이었다.
"이놈들이 흑살방과 떨거지 문파의 문주들이다. 네놈들이 말해 보거라. 백만 냥. 그거 본좌가 강제로 뺏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의뢰대금을 정당하게 지급한 것입니다."
사악진이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부정했다.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저 말에 반박했다가는 또 어떤 끔찍한 일을 겪을지 모를 일이었다.
"흑살방주를 데리고 계셨던 겁니까?"
백류혼은 적사결에게 되물었다.
"전 흑살방주겠지. 지금은 본좌의 탈것이다."
"예? 탈것?"
"보다시피 연약한 여인의 몸이라 말이지."
적사결의 너스레에 백류혼은 혀를 차고는 사악진에게 물었다.
"나는 사무련에서 나온 조사관이오. 당신이 흑살방주라면 확실하게 말해주시오. 백만 냥이 정말 의뢰대금 맞소?"
사무련의 조사관.
그 말에 사악진 일행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백류혼에게 매달렸다.
"우, 우리들을 여기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러려면 본 조사관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지 않겠소. 그러니 대답부터 하시오."
"아닙니다! 억지를 써서 백만 냥을 뺏어간 겁니다! 의뢰금은 이십만 냥이었습니다!"
사악진은 악을 쓰며 강하게 부정했다.
방금 전 적사결의 말을 부정할 때와는 그 어조가 사뭇 달랐다.
"아니라는군요. 이들은 팔십만 냥을 강탈당했다 주장하는데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래서 본좌에게 이십만 냥만 챙겨라?"
"제가 많이 양보한 겁니다."
"싫다면?"
"혈채를 못 내시겠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백류혼의 기세가 거칠어졌다.
후기지수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