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41화>
적사결이 아무도 없는 장소로 걸음을 옮기자, 흑사광이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들이 향한 곳은 수풀이 우거진 장소였다.
“흑사광.”
“예, 교주님.”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마. 본좌의 뒤를 이어 신교를 맡아다오.”
앞서 교주직을 내려놓겠다 선언했기에 흑사광은 크게 놀라진 않았다.
“대주들 중에 소교주를 뽑고 정식으로 후계를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천마신교에서 대대로 이어져 온 후계 구도다.
밑바닥부터 다져온 강인함이 있어야 교주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관문, 수라진결의 극마결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
무공도 강해야 하지만 마음도 강해야 천마신교의 지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안 돼. 본좌의 마음에 사심이 생겼거든.”
“사심이라니요?”
“제자를 들이고 싶어졌다.”
“교주님의 전인을 양성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황과 진무백을 가르치며 재미를 느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더구나 자식이 없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이은 후인을 남기고 싶은 점도 있었다.
“제자가 생기면 어떻게든 다음 교주로 올리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본좌는 너에게 교주직을 넘겨 혹시 생길지 모를, 폐단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주쟁패전이라는 약육강식의 무대.
그 순수한 무의 제전을, 혹시 모를 사심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교주님께서 공무에 사심을 개입하실 리 없습니다. 교의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거절하겠습니다.”
“명령이라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흑사광은 냉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거참, 아까도 말했다시피 본좌는 이제 자격이 없다니까 그러네.”
“자책하지 마십시오. 암계에 빠진 것은 교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 맞아.”
“아닙니다.”
“여전히 고집불통이군.”
적사결은 미간을 좁히며 흑사광을 쏘아보았다.
과거 교주쟁패전 후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교를 떠났던 그였다.
전임 교주의 아들인 자신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신교의 미래에 방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본좌가 만약 이번 일이 끝나고 홀연히 사라지면 어쩔 텐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전임 교주께서 사람을 잘못 보셨을 리 없으니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지?”
흑사광은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사무련과의 비밀회동 당시 그분께서는 제가 아닌 교주님과 적랑대를 호위로 대동하셨었죠.”
“그랬지. 활동 지역이 넓은 적랑대는 신교에 없어도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교주님을 가장 믿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들인 저보다 말입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자네와 흑랑대가 신교의 대표 무력 부대가 아니었다면 그때의 호위 임무는 자네가 맡았을 것이야.”
적사결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임종하시기 전에 직접 해 주신 말입니다. 교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지존의 자질을 타고 나신 분이니 충심으로 보필하라고 말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모시지 못하겠다면 교를 떠나라 하셨지요.”
“그럼 그 말 때문에 교를 떠났던 건가?”
“예, 무진호 사건만 아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니까요.”
전임 흑랑대 일조장 무진호를 따르는 수하들은 교주쟁패전 당시 적사결을 함정에 빠트렸었다.
하나 결과는 실패했고 수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느낀 흑사광은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교주님께서는 아무렇게나 교를 내팽겨 두실 분이 아님을 저는 압니다. 하니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면 그때의 아쉬움과 교주직을 걸고 한 판 붙어 보는 건 어때?”
“네?”
적사결은 목을 뚜둑하고 꺾으며 말했다.
“아쉽다며?”
“그건 옛날 일이지요. 이제는 무덤덤합니다.”
“마도인이 승패를 못 가른 승부에 무덤덤해진다? 말도 안 되지. 본좌가 이기면 후임은 자네가 맡는 것으로 하고 자네가 이기면 없었던 일로 하지. 어때?”
“지금 교주님께서 온전한 상태도 아니신데 승패를 가른다하여 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본좌의 몸이 어때서? 사지 멀쩡하구먼.”
적사결의 능글맞은 대꾸에 흑사광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 몸, 독비화의 몸이지 않습니까. 취불의 몸도 아닌데 제대로 된 비무가 되겠습니까?”
“교주와 교도가 붙는 건데 자네에게 그 정도 이점은 있어야지.”
“진심이십니까?”
흑사광은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교를 떠난 후 홀로 사마오대존의 일인, 마령존이라는 별호를 얻은 자신이다.
무력으로 따지면 천하 십대고수의 일원이니만큼 큰 격차가 없을 터.
한데 그 정도 이점을 접어준다니……
“남아일언 중천금.”
후우우웅.
적사결은 기세를 일으키며 천지연원공과 귀령운신공을 시전했다.
동시에 광혈수라공의 운공요결을 따라 비취색 공력이 전신을 채워 갔다.
불가기공과 달리 내공에 대한 거부 반응이 없기에 금단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대신 적사결은 삼지안을 개안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투두둑.
적랑의태가 의복에 가려진 부분에 한정해 변화.
이것으로 내공과 외공을 극한까지 고취시켜 준비를 완료했다.
“대단하군요. 독공입니까?”
흑사광은 비취색 기운이 발하는 독기를 감지하고 물었다.
“본좌의 독문무공이다. 내공만 독기를 띠는 것이지.”
“독기를 띠는 광혈수라공이라니 사기로군요.”
“이제 와 후회되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혈마기보다는 상대하기 편할 것이라 생각되는 걸요.”
흑사광의 등 뒤에 묵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광폭한 기세만큼은 적사결을 웃도는 상황.
공력의 우위가 어느 쪽에 있는지 그것으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강해졌구나, 흑사광.’
적사결은 흑사광의 마기에 노출되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도의 기도라면 본신의 몸이더라도 공력만큼은 흑사광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스릉.
모습을 드러낸 사왕은 천천히 흑사광에게 겨누어졌다.
적사결의 긴장감이 전해진 듯 사왕이 뿜어내는 예기도 범상치 않았다.
“적령을 사용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흑사광은 사왕을 일견하고는 무기를 바꾸라 권했다.
뛰어난 보도인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으나 검사에게는 검이 더 어울린다는 판단에서였다.
“적령을 가지고 왔나?”
“염 대주가 신궁을 나설 때 챙겼다 들었습니다.”
“귀염둥이가 왔단 말이지, 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애검 적령은 적랑대주 시절부터 함께한 전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됐어. 본좌를 상징하는 신교의 검을 교도에게 겨눌 순 없지 않겠나.”
“후회하실 텐데요?”
“글쎄, 과연 그럴까?”
적사결이 히죽 웃자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 순간.
스파앗.
둘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꽈아앙.
첫 격돌은 백중세였다.
적사결과 흑사광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힘을 견주었다.
사왕을 둘러싼 비취색 강기, 그리고 흑사광의 팔에 감긴 검은 사슬과 검은 강기.
두 힘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마주하고 있었다.
“암혼쇄? 역시 자네가 지니고 있었군.”
“아버지의 신물이니 제가 이어받았습니다.”
전임 교주였던 암혼마제.
그가 다루던 신병이기이자 아직까지 천하 십대기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구가 암혼쇄였다.
“다루기 까다로울 텐데.”
“이제는 익숙합니다.”
“좋군.”
쩌어엉.
의도적인 힘의 불균형에 두 두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나가고.
먼저 움직인 것은 장병을 지닌 흑사광이었다.
촤르르르륵.
팔목에서 풀려난 암혼쇄는 전면을 폭풍처럼 몰아쳤다.
현철로 제련된 묵직한 사슬 채찍은 한 방에 거암도 박살 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퍼퍼퍼퍼펑.
사방이 터져 나가는 와중에도 적사결의 보보는 침착했다.
‘역시 전임 교주보다는 미흡하군.’
암혼쇄와 유사한 채찍이나 연검 같은 부류의 무기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적이라면 상대하기 어렵고 사용자라면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여 성정이 맞지 않고 자질이 없다면 평범한 무기를 고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암혼마제의 경우 젊었을 때부터 구절편을 다루었고 교주에 등극한 후 암혼쇄를 만들어 줄곧 사용했었다.
그와 달리, 흑사광의 경우는 성정에 맞는 검을 사용했었다. 하니 그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암혼쇄를 다루는 데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고집불통이라니까.’
과거에도 흑사광은 공공연히 말했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신교를 중원으로 진출시키겠다고.
하나 그 길을 걷다 적사결에 의해 좌절되자 보상 심리로 암혼쇄라도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쉬이익.
그때 암혼쇄의 추가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날아왔다.
쩌엉.
적사결은 다급히 사왕을 휘둘러 공격을 방어했다.
그러자, 암혼쇄가 기다렸다는 듯, 한 바퀴 선회한 후 다시금 날아들었다.
‘허공섭물! 암혼쇄를 다루는 숙련도의 부족함을 상승 기예로 메우는구나.’
쩌저저저저정.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암혼쇄의 공세.
그 속도 역시 적사결의 움직임을 막을 정도로 빨랐다.
“제법이잖아, 흑사광!”
적사결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뒤쪽에서 암혼쇄가 날아와도 개의치 않았다.
사왕을 쥔 오른팔이 길어지고 휘어지며 뒤를 방어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채찍과 채찍이 맞부딪치는 모양새였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상공세에도 몸을 움직여 방어할 필요가 없으니 적사결은 느긋하게 걸었다.
그렇게 흑사광의 앞까지 도착했다.
“교주님께서는 더 괴물이 되셨군요.”
“사술같이 보이겠지만 이거 불문 정종의 무학이라고.”
엄밀히 말하면 천축의 무학이지만 소림에서 얻은 신공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꽈드드득.
극한까지 오른팔이 꼬이고 풀려나며 폭풍이 몰아쳤다.
사왕으로 펼치는 광풍폭살이었다.
쩌어어어엉.
흑사광은 급히 회수한 암혼쇄를 양손으로 내민 채 다섯 보 가량을 밀려났다.
광풍폭살의 파괴력을 흘려냈기에 별다른 피해도 보지 않은 듯 보였다.
“크읍…… 이런 괴공이 불문의 무학이란 말입니까?”
이맛살을 찌푸린 흑사광은 팔을 털며 툴툴거렸다.
손에 남겨진 충격이 상상이상이었다.
“중놈들이 속이 시커먼 게지. 흐흐.”
적사결은 사왕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서로 탐색전은 이쯤하면 되었으니 제대로 해볼까?”
“좋습니다. 교주님께서도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예전의 제가 아니니까요.”
“흐흐, 본좌는 예전 그대로겠어?”
그 모습에 흑사광이 피식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온 것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흑사광의 몸이 검게 물들어갔다.
검은 마기는 그의 전신을 마치 갑옷처럼 감쌌다.
‘마인화? 아니, 아니다. 저건…….’
적사결은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번쩍하고 생각이 떠올랐다.
“묵혼마신체!?”
분명 암흑천마공의 기예, 묵혼마신체였다.
호신강기를 뛰어넘는 절대 방호기공이자 내외공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마인화의 궁극.
흑사광은 암흑천마공을 익히고 있던 것이다.
“과연 교주님.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제 보니 지난 세월 동안 암혼쇄가 아니라 암흑천마공을 수련하고 있었군.”
“정확히는 반쪽 무공인 암흑천마공을 완성시키려 했었습니다. 결국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반쪽도 어려웠지?”
“엄청나게 힘들었습니다. 기연이 없었다면 못 익혔을 테니까요.”
“기연?”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교주님께서도 그걸 보면 놀라실 겁니다.”
그 말에 적사결은 잔뜩 기대되었다.
얼음장 같은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대단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둘 것이야.”
“후후, 만족하실 겁니다.”
“좋아, 그 전에 암흑천마공도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볼까?”
그렇게 다시금 두 강자들이 충돌했다.
그 충돌은, 나무를 뽑고 또 땅을 뒤집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