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38화>
적사결은 낄낄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독문 점혈법.
그것은 조군악이나 방운덕 따위가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 통쾌하구나.’
이제야 체증이 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귀한 반선주를 다 처먹어 버린 만행을 저지른 당연희.
하나 그 책임을 물리기에도 뭣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기절해 있었고 자신이 임의대로 몸을 바꾼 상황에서 사달이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꿀꺽했으니까.
하나 그렇다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돈도 명성도 다 가진 적사결에게 반선주에 맞먹을 보상?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하면 속이 풀릴 때까지 팬다?
그녀는 여인에다 실력도 허접한 약자였다.
적사결의 기준에서 보면 때릴 수도 없었다.
그건 진정한 강자의 길, 패도에 걸맞지 않고 무(武)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지금의 방법이었다.
조금 치졸하긴 하지만……
‘네년이 아무리 기가 세다지만 여인인 만큼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 큭큭.’
당연희는 조군악에 이어 방운덕의 손가락에 가슴을 내주어야 했다.
타타탁. 타탁.
방운덕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해혈에 전념했다.
하나 아무리 혈도를 바꿔가며 손을 놀려도 아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이런 점혈이 있단 말인가. 아혈과 관련된 혈은 그 수가 많지도 않거늘.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대입해도 안 되는구나.’
방운덕은 자신 있게 나섰다가 해결하지 못하자 무척이나 난감했다.
주위에는 자신의 수하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
여기서 실패하면 아랫것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봐. 그 점혈은 그렇게 하면 안 돼.”
속삭이는 듯한 그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적사결이 옆에서 방운덕만 들리게 말해 준 것이었다.
“내가 그래도 당가의 직계다. 내 말대로 해 봐. 금방 해혈 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말에 방운덕만이 아니라 당연희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씨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미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
한데 설마 더 남은 것인가.
“독비화, 당신이 해혈을 도와준다? 이 사내, 일행 아니었나?”
방운덕이 낮은 음성으로 적사결에게 물었다.
“일행 아닌데. 동행이었는데 사건에 휘말렸을 뿐이지. 그리고 단순한 아혈을 해혈하는 건데 도움이라 할 수도 없지 않나? 그냥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킥.”
“하…… 하면 내 도움 좀 받겠소. 대신 당신이 무사히 당가로 돌아가도록 문주들에게 말을 보태주도록 하지.”
방운덕은 헛기침을 크게 하며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게 수락했다.
적사결은 입꼬리를 귀에 걸며 해혈법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앞섬을 열어젖혀.”
방운덕은 망설이지 않고 당연희의 옷깃을 잡고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두 손을 양쪽 가슴에 갖다 대.”
해혈법이라기엔 이상하지만 방운덕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주물러.”
적사결은 두 손을 문어처럼 꼼지락거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방운덕은 당연희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좀 이상한 해혈법이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당가는 의가이기도 하기에 점혈에 대해서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로잡힌 상황에서 수작을 부릴 리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
“얼마나 더 주물러야 하지?”
방운덕은 다른 사내의 가슴을 만져대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오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만약 이러고 해혈이 되지 않는다면 일장에 그녀를 때려죽일 것만 같았다.
“그만 됐어. 손 떼.”
적사결의 신호에 방운덕은 손을 떼고 물러났다.
당연희는 풀린 눈으로 다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겨우 그걸로 항복이야?”
“겨우? 당신이 씨발, 뭘 알아.”
당연희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적사결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방운덕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진짜 해혈됐잖아. 이럴 수가…….”
그게 진짜 될 줄이야.
그는 역시 당가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적사결은 그런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당연희에게 말했다.
“그러게 왜 남의 걸 멋대로 먹어.”
“그렇다고 이런 저잣거리 왈패나 할 법한 짓을 벌여!? 당신이 그러고도 사내야!”
“아니. 사내는 너지. 와, 가슴근육 빵빵한데. 사나이야, 사나이.”
“지랄하네.”
당연희는 톡 쏘아주고는 방운덕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당신들 지금 당장 도망쳐! 저 자식들 다 한패야! 흑랑대라는 괴물들이 지금 당신들 잡으러 오고 있어!”
방운덕은 눈을 화등잔하게 뜨며 외쳤다.
“뭐…… 뭐!? 흑랑대!”
들어본 적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한때 천하에 위명을 떨쳤던 마교의 타격대.
지금은 마교를 떠났지만 사마오대존의 일인 마령존의 직속수하들로 극강의 고수들이었다.
“그래! 저놈들도 흑랑대야! 지금 나머지 놈들도 다 불렀단 말이야! 당장 도망쳐!”
그녀의 외침에 사악진과 조군악도 입을 떡 벌렸다.
의뢰를 넣은 마인들이 설마하니 흑랑대였다니.
더구나 자신들을 잡으러 오고 있다니!
“흑랑대!? 흑랑대가 우릴 잡으러 온다고!”
주변이 술렁거리며 혼돈에 휩싸였다.
흑랑대의 명성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다들 조용히 하거라!”
사악진의 호령에 좌중은 입을 꾹 닫으며 침묵했다.
“당신들 정말 흑랑대인가?”
그 물음은 섭천에게 향했다.
“그렇다.”
“헉!”
사악진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인했다는 것은 당연희의 뒷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흐, 흐…… 흑랑대 전원이 우릴 잡으러 온다고…….”
사악진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때 당연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라니까 이 병신들아! 꼭 살아남아 사천으로 가! 가서 당가에 전해! 독비화가 흑랑대에게 죽었다고! 저년은 가짜라고!”
적사결은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죽었다고 알려서 복수를 꾀하겠다니.
“와아, 너 진짜…….”
“왜? 천하의 교주께서 겁나시나?”
“겁나긴.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것이 패도를 걷는 자의 긍지다.”
“긍지? 개소리하고 있네. 숙부님이 오시면 너넨 다 뒈져!”
당연희의 독설에 적사결은 가슴을 들썩였다.
그러고는 유쾌한 듯 대소하며 묶여 있던 포박을 힘으로 뜯었다.
투두둑.
“큭큭큭. 정말 네 성정만큼은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복수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적사결은 손목을 매만지며 섭천에게 명했다.
“섭천.”
“흑랑대 칠조장 섭천, 지존의 명을 받듭니다.”
“저것들 다 죽여. 한 놈도 놓치지 마.”
“존명.”
적사결의 명에 흑랑대 조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주하는 자들을 막기 위함이었다.
아직 흑랑대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그들만으로 흑살방에 모인 자들을 죽이려면 산개는 필수였다.
그리고 장내에 남은 섭천.
그는 홀로 적들을 주살하기 위해 검을 빼 들었다.
흑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섭천의 몸에서는 전에 없던 투기가 넘실거렸다.
“흐…… 흑살대! 저 새끼 조져!”
사악진은 마지막 남은 직속수하이자 흑살방의 정예. 흑살대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흑살대는 주저하지 않고 섭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사악진은 덜덜 떨며 뒷문을 향해 뛰어갔다.
조군악과 방운덕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야, 당연희.”
“왜 이 씨발럼아.”
“우리 사이에 은원은 이걸로 퉁 치도록 하지. 본래 몸을 되찾으려면 상부상조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 사람이 날 골탕 먹여? 난 당신에게 본가의 비전인 도반삼양귀원공도 알려 줬다고!”
“본좌도 뒤지지 않는 무공을 알려 줬지 않나. 더구나 이 몸을 만독불침으로 만들고 공력도 일갑자 반으로 만들어 줬으니 그걸로 퉁쳐.”
“뭐? 일갑자 반? 그…… 그럼 일갑자나 내공이 늘었다고!?”
본래의 내공이 반갑자에 약간 미치지 못했으니 단순계산상 일갑자가 분명했다.
당연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녹주독혈사의 내단이라 하더라도 독정을 취하는 동시에 일갑자나 공력을 증진시키다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반갑자도 올리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독정을 취하느라 심력을 거의 소모해 버렸을 테니까.
“속고만 살았나. 정확하게 일갑자 반이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내력이 얕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거다.”
“…….”
당연희는 어느새 분노했던 감정이 사그라지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여인으로서 극도의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녀는 여인이기 이전에 무림인이다.
만독불침에 일갑자의 공력이 증진된 상황, 더구나 독정까지 취했으니 내공이 독의 성질을 띠며 독공의 토대까지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그녀는 숙부인 암룡신존을 제외하고 당가에서 가장 내공 수위가 높다는 의미였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은 당연했다.
“표정을 보니 삐진 건 풀렸나보군.”
“칫, 마혈이나 풀어요.”
“아까 그놈이 주물럭거릴 때 다 풀렸어.”
“진작 말했어야죠!”
당연희는 앞섬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섭천이라는 흑랑대 조장은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검광이 번쩍하면 어김없이 피가 튀고 생명이 꺼져 갔다.
흑살방의 정예인 흑살대 역시 그의 일검도 당해 내지 못했다.
“대단하네요.”
당연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흑랑대라는 이름 값이 있다지만 대주급도 아니고 일개 조장이라 했었다.
한데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엄청난 신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본교의 주력 부대였지. 후후.”
적사결은 감회가 새로웠다.
가출했던 자식이 장성해 금의환향하는 느낌이 이럴까.
비록 자신과 반목한 탓에 교를 떠났던 이들이었지만 다시 만나니 역시 같은 신교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다경.
섭천이 흑살방 장내를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물론 흑살대가 몰살하며 대부분이 달아났지만 그는 홀로 이백에 달하는 무인들을 베어 낸 것이었다.
“쯧, 꽤 많이 도망갔네.”
적사결이 혀를 차자 섭천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됐다. 네 실력이 아직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하지 못하는 걸 어쩌겠느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적사결은 섭천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삼십에 달하는 검은 피풍의의 괴인들이 담을 넘어오고 있었다.
“사조, 팔조, 십조, 십삼조, 십오조입니다.”
섭천이 그들을 알아보고 말해 주었다.
흑랑대 전원에 보낸 전서구 중 근방에 있던 다섯 개 조가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이다.
그들의 피풍의에서는 피가 흥건히 묻은 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보게, 섭천. 교주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사조장 광혼의 물음에 섭천은 적사결을 가리켰다.
“이분께서 지존이시네. 여러 사정이 있으나 일단 그리 알고 예를 올리게.”
섭천의 말에 광혼을 비롯한 조장들은 곧바로 부복하며 외쳤다.
적사결이 여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서는 한 치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동료인 섭천을 믿는다는 뜻이다.
“신교출세, 만마앙복! 흑랑대! 신교의 지존을 뵙습니다.”
“그래. 광혼, 평산, 진강, 단혁, 주태. 다들 오랜만이구나.”
적사결이 그들의 이름을 단번에 부르자 다섯 조장들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교를 떠난 지, 십 수 년이 되었지만 지존은 자신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한데 그 모습, 오다가 전투가 있었느냐?”
그 물음에 사조장 광혼이 답했다.
“칠조원들이 전투 중인 것을 보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지존의 명을 받들어 도주하던 놈들은 모조리 주살하였습니다.”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처리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다만 수장으로 보이는 세 사람은 생포했습니다.”
광혼은 수하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세 문파의 문주, 사악진과 조군악, 그리고 방운덕이 끌려왔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변한 걸로 보아 반항하다 어지간히 두들겨 맞은 모양이었다.
“수하들에게 싸우라 명하고는 제일 먼저 도망치더군요. 단매에 때려죽이려다 겨우 참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