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30화>
* * *
“어라?”
당연희는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다 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눈앞이 흔들렸지만 곧 적응할 수 있었다.
한데 자신은 분명 귀식대법으로 잠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정신이 들다니.
보통 서서히 대법이 풀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현상이었다.
“응? 이건 뭐지?”
당연희는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물체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하얀 실과 같은 것으로 돌돌 말린 그것은 누에고치처럼 보였다.
“이렇게 큰 누에가 있었나?”
독과 약에 해박하다는 것은 독물과 영물 등 각종 생물에 대해 지식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데 당연희는 이 정도로 큰 누에고치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건 또 뭐지?”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병.
왜 자신이 이것을 들고 있는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또 어디가고 주변은 왜 이렇게 난장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대지진이 일어나 땅거죽이 뒤집힌 것만 같았다.
“킁킁. 근데 이거 되게 냄새 좋네. 은근히 꿀 냄새도 나잖아. 술 냄새 같기도 한데…… 설마 노봉방주?”
노봉방주는 말벌과 벌집을 함께 담근 숙성주다.
주당인 당연희도 즐기는 주류였지만 이것은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향긋한 냄새였다.
“사…… 살짝 맛만 볼까.”
워낙 작은 병이기에 한 모금만 마셔도 티가 날 터.
당연희는 조심스럽게 혀 위를 적시듯 부었다.
“허억! 이런 꿀맛이!”
혀에 감기는 감칠맛이며 입안과 코를 감도는 향기.
그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었다.
당연희는 참지 못하고 한 모금을 머금고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아아…….’
복숭아꽃, 들국화, 매화 등 다양한 꽃의 꿀을 조합한 농축미.
야생의 풀잎향기가 주는 야성적인 매력.
그러면서도 옅고 떫은맛은 가볍지 않고 무거운 잠재력을 지닌,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감을 선사했다.
‘혼백이 뽑히는 것만 같은 쾌감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런 술을!’
이 술을 빚은 사람은 신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당연희는 마치 우화등선이라도 한 듯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한 모금만으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어? 더 없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이 비어 있다.
병을 뒤집어 입에 대고 탈탈 털어 보았지만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쉬웠지만 곧 병을 보며 불안감에 젖어 들었다.
‘이거 보통 술이 아닌 거 같은데…… 다 마셔 버렸으니 어쩌지…….’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것을 홀랑 먹다니.
사천성 명문 중의 명문가인 당가의 여식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무…… 물어 주면 되지. 고작 술 한 병…… 아니지 이 정도 양이면 그냥 한 잔이지. 그냥 술 한 잔인데…… 뭐…….”
말과 달리 마음은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갑자기 거대한 고치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쩍 갈라지며 그 속에서 벌거벗은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 얼굴을 본 당연희는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의 얼굴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쌍둥이라도 이렇게까지 닮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쳐다볼 것 없어. 본좌가 다 설명할 테니…… 어? 너…….”
적사결은 말을 하다 말고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병을 바라보았다.
병의 입구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이거? 이 술 당신 거예요?”
덥썩.
손을 붙잡고 병을 빼앗은 적사결은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기요.”
당연희가 적사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였다.
한데 돌아온 것은.
“크아아아아아아악! 내 반선주!”
통한의 울부짖음이었다.
* * *
“뭐!? 너랑 내가 영혼이 바뀌었다고!?”
당연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지만 눈앞에 자신의 얼굴을 한 적사결이 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반대로 자신은 그의 몸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술이…… 그런 귀물이었다니…….”
그저 명주라 여겼는데 그런 공능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술 한 잔에 영혼이 뒤바뀐다는 건 꿈 같은 얘기였다.
“본좌가 그걸 얻으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걸 홀라당 먹어 버린다니! 한. 방. 울. 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딱 한 방울이면 되는 것을 그것조차 남기지 않다니.
적사결로서는 순간 살심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덕분에 그녀에 대한 약간의 호감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죽게 내버려 둘 것을. 내가 미쳤지. 미쳤어!’
오랜만에 절세미녀를 만났기 때문일까.
적사결은 평소와 달랐던 자신을 되짚어 보며 홀려도 단단히 홀렸었다 판단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뭘!?”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반선주라는 그거 다시 얻어야 할 거 아냐.”
“하아…….”
땅이 꺼지는 듯한 한 숨이 토해졌다.
다시 얻어야 하다니.
그걸 또 어떻게 얻어야 한단 말인가.
천하사괴가 지닌 마지막 한 병의 주인인 엽주평도 죽었고, 그걸 만든 술사 도중문과 하오문주도 죽었다.
남은 반선주가 없으니 이제는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해남으로 가자.”
“해남에? 거기 반선주가 있어?”
“없어! 이젠 없다고! 한 방울도 없어! 니가 다 처먹었으니까!”
작사결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그녀는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닥치고 따라와. 해남에서 기다리면 반선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올 테니까.”
적사결이 언급한 이는 하오문주의 딸이나 마찬가지인 소민이었다.
물론 그녀도 제조법은 모른다고 했다.
하나 하오문주의 손에서 자랐다고 했으니 뭐라도 알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은 그녀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적사결이 고민하는 사이,
“어? 어?”
당연희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그것은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였다.
꿀렁. 꿀렁.
살결이 요동치고,
뿌드득. 뿌득.
골격이 재구성되며 신체에 변화가 일었다.
적사결과 몸이 바뀌자 천축유가신공으로 유지하던 젊음과 외모가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무허의 늙은 몸으로 말이다.
“이…… 이게 뭐야. 왜 손이 쭈글쭈글해. 목소리도…….”
그렇게 목을 붙잡은 그녀는 손과 목소리만이 아님을 알고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역시나 얼굴도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꺄아악! 너……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인피면구도 아니고 주안술도 아니다.
한데 나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의 노인이 젊은이 행세를 하다니.
한데 자신은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기까지 했다.
그때 당시에도 젊은 사내라는 것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었다.
“아…… 짜증 나.”
적사결은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무허와 자신의 영혼이 바뀐 것, 그리고 천축유가신공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모든 사정을 들은 당연희는 입을 벌린 채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녀가 꺼낸 말은.
“정말 광혈존 적사결? 당신이 그라는 말이야?”
“알고도 반말이라니. 당가의 예절 교육이 어떤지 알겠구나.”
“믿기지가 않으니까. 소림의 고승 취불 무허대사가 어떻게 마교, 아니 천마신교의 교주와 몸을 바꿀 수 있어?”
“본좌도 묻고 싶다. 그 미친놈이 당최 왜 그랬는지!”
적사결의 짜증에 당연희는 눈치를 보며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아까 그 모습을 바꾸는 무공 말이에요.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되나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존댓말로 애교를 부렸다.
좆같은 무허의 얼굴로.
“웃기지 마라. 네가 뭐가 이쁘다고. 무허의 면상까지 달고 있으니 한 대 패주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중인데.”
“그러니까요. 당신 입장에서는 이 얼굴 보기 싫을 거 아니에요.”
적사결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 조각을 짚어 휙 던졌다.
“그걸로 얼굴 가려. 네 말대로 꼴 보기 싫으니까.”
“너무 하네! 내가 그걸 알고 마신 것도 아닌데 계속 핀잔을 줘야겠어요?”
“본좌의 물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댄 죄! 본 교의 율법대로라면 즉참이다! 핀잔만 주는 걸 감사히 여겨라!”
“그럼 즉참해! 자, 잘라! 율법대로 즉참하라고!”
당연희는 목을 길게 빼며 소리 질렀다.
“왜 못 잘라? 아까부터 미안하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사내자식이 사과도 안 받아 주고 말이야! 잘라! 씨발!”
뭐 이런 게 다 있어.
“진짜 뒈지고 싶으냐!”
적사결이 살기를 발산하며 위압감을 풍겼다.
“그래! 뒈지고 싶다! 어쩔래!”
당연희가 그렇게 맞받아친 그때였다.
후와아아악!
엄청난 기백이 뿜어져 나오며 황금빛 기공이 등 뒤로 넘실거렸다.
“우왁.”
적사결은 지근거리에서 갑자기 거센 기세를 받아 자신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허의 몸에 내재된 공력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자 당연희의 연약한 몸이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 것이었다.
“풋.”
“우…… 웃었어! 지금 본좌를 보고 비웃은 거냐!”
“쪽팔리나 봐요?”
“쪼…… 쪽팔……! 지금 본좌에게 쪽팔린다고 한 것이냐!”
“알았어요. 비밀로 해 줄게. 명색이 마도지존이신데 기세에 밀려 엉덩방아라니.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
적사결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반대로 당연희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근데 무허대사의 공력이 심후하다더니 대단한 걸. 이 정도 단전이면 오갑자나 되잖아. 사람 맞아?”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만 같은 내공 수위.
팔십 년 남짓 산 사람이 삼백 년의 공력을 지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 *
“살아 있다!? 하!”
사악진은 기가 차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연놈을 죽이기 위해 동원한 병력이 무려 일만이었다.
정말 박박 긁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흑살방의 저력을 모두 동원한 규모.
더구나 군부에서 빼돌린 벽력탄 이백 발까지 동원했음에도 놈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방주. 어쩔 생각이시오?”
조가장주 조군악이 의중을 물었다.
혈화문주 방운덕은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숨만 쉬었다.
일만 병력이 전멸한 상황에서 뭘 더 어쩐단 말인가라는 얼굴이었다.
“조 장주는 어떻게 하고 싶소?”
사악진의 되물음에 조군악은 말을 아꼈다.
그도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기에 물은 것이었으니까.
“흥. 두 사람 모두 제대로 꼬리를 말았군.”
사악진의 비웃음에 조군악이 다시 물었다.
“방주께서는 다른 복안이 있으시오?”
흑살방도 수하들이 다 죽고 흑살대만 남은 상황.
정예라 하나 고작 그들만으로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조군악은 딸을 죽인 흉적들을 꼭 죽이고 싶은 마음에 물은 것이었다.
“두 사람 다 그간 모아둔 재물 다 내놓으시오.”
“뭐요!?”
“그게 무슨 소리요!?”
설마 이 상황에서 무력을 잃은 자신들의 재물을 강탈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조군악과 방운덕은 경계심을 내비치며 물러섰다.
“이런, 이런. 안 뺏어가니 그리 경계하지 마시구려.”
“그럼 재물은 왜 내놓으란 거요?”
“가진 무력이 바닥났으니 돈으로 사야 하지 않겠소.”
“설마 다시 무사들을 모으겠다는 말이오?”
“일만을 투입했는데 실패했소. 그게 무엇을 뜻하겠소? 어중이떠중이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사악진이 이를 바드득 갈며 답했다.
“저놈들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돈에 움직이겠소?”
진정한 고수는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고수는 이미 단체에 적을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니 개인적인 의뢰를 할 수도 없었다.
“고수도 돈이 궁해지면 움직이는 법이오.”
“단체에 속하지도 않고 돈이 궁한 진짜 고수를 알고 계시오?”
“있소. 그것도 가까이.”
“가까이? 하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는데. 도대체 누구를 이르는 말이오.”
조군악과 방운덕은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해남도. 그곳에 오래전 마교를 탈주한 잔당들이 있다는 얘길 들어 본 적 있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