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29화>
* * *
시작은 작은 동산이었다.
그리고 점점 산의 고도는 높아져 갔다.
바로 쌓여 가는 시신 때문이었다.
그 정상에 선 무인은 여전히 끝도 없는 저력을 보이고 있었다.
“씨발! 저 괴물을 어떻게 죽여!”
소집된 사파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 말에 주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닥쳐, 인마! 저 새끼 못 죽이면 우리 식솔들이 죽어! 흑살방이 가만있을 것 같아!”
“우리 같은 파리 목숨들은 여기서 안 죽으면 돌아가서 죽어! 죽일 생각도 죽는단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눈 딱 감고 달려들어!”
흑살방의 연맹 아래 있기에 배는 굶지 않는다.
아니, 배를 굶지 않는 건 식솔들 얘기였고, 자신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근처 객잔은 용돈을 뜯는 창구였고 기루에서는 돈 생각 않고 여자를 품고 술을 마시는 것이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전시에 조건 없이 동원되기 때문이었다.
한데 여기서 도망친다면? 아니 목숨을 버리는 데 주저한다면?
흑살방은 자신은 물론 식솔들까지 도륙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그러했듯.
모아 놓은 재산이 적다면 일가친척까지 그 대상이 되어야 했다.
“좆같네! 아직 앵앵이랑 하지도 못했는데!”
“흐흐, 너 오늘 밤 순번이었지? 난 어제 했는데.”
“그럼 너부터 나가, 새꺄!”
“개놈아, 같이 가야지. 저런 놈은 다구리가 기본이야!”
“시벌놈. 순번 양보하는 게 아닌데.”
“양보 소리 하네. 앵앵이가……”
서걱. 서걱.
일합에 더러운 혀를 놀리던 두 놈의 대갈통이 하늘을 날았다.
“네놈들은 목숨이 여러 개냐? 아무리 쳐 죽여도 끝도 없이 달려드냐.”
적사결은 흐르는 땀을 훔치며 다시금 사왕을 휘둘렀다.
사왕의 예기는 검풍이 되었고 팔방에 위치해 있던 여덟의 흑도놈들은 꽥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 * *
“이제 우리 차례다!”
한 사내의 외침에 수천의 무인들이 일제히 손등에 하얀 가루를 뿌렸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으로 콧구멍 한쪽을 막고 남은 콧구멍으로 가루를 빨아들였다.
흑살분으로 부르는 이 가루는 아편에서 추출한 성분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강력한 진통과 마취 작용을 하는 흑살분은 무인들을 강심장으로 만드는 효과까지 있었다.
더구나 장복할 시 금단 증상까지 있어 흑살방에서는 연맹에 소속된 무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흑살분의 복용을 권장하고 있었다.
흑살분을 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무엇을 시키더라도 군말 없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마지막인가?”
흑살방주 사악진은 흑살분을 취한 무인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동원된 평무사 중에는 그렇습니다. 이제는 흑살대만 남았습니다.”
부방주 신철귀의 대답에 사악진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인근 열 개 도시의 문파뿐만 아니라 흑살방과 조가장, 혈화문의 무사들도 모조리 투입한 상황.
남은 흑살대는 흑살방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흑살대는 본방을 재건할 최후의 보루다. 마지막까지 건드려선 안 돼.’
그들을 잃는다면 멸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악진은 신철귀를 보며 말했다.
“부방주 직속 수하들이 몇이었지?”
“귀철대 말씀이시라면…… 배…… 백 명입니다.”
“걔들은 아직 남았지 않나? 왜 흑살대만 남았다고 보고했지?”
“귀철대는 타격대가 아니라 정보 수집을 위주로 하는지라. 바…… 방주님. 설마 저희들도 출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흑살대처럼 귀철대도 흑살방의 전성기를 이룩한 공신들이었다.
“귀철대가 정보 부대지만 저기 달려가는 쟤들보다는 강하잖아. 그럼 타격대가 아니라고 하기엔 민망하지 않아?”
“…….”
결국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신철귀는 욕지기를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귀철대가 약하긴 하지. 그래 약해…….”
사악진의 중얼거림에 신철귀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 분명했으니까.
한데.
“내 특별히 귀철대에 강한 무기를 쥐어 주지. 그거면 저 괴물을 죽일 수 있을 거야.”
“……무슨.”
고개를 든 신철귀 앞으로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검은 쇠공에 심지가 달린 것이었다.
“그…… 그것은…….”
“흑살대를 시켜서 가져오라고 했다. 수하들에게 두 개씩 지급해. 이건 부방주가 지니고 있고. 참, 다들 흑살분 먹는 것도 잊지 말고. 흐흐.”
개새끼.
자신과 귀철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하다니.
신철귀는 당장 눈앞의 벽력탄에 불을 붙여 사악진과 동귀어진하고 싶었다.
하나 그리된다면 본방에 남겨진 식솔들은 흑살대에게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천금을 주고 위소에서 빼돌린 건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네. 흐흐.’
사악진은 구상만하고 있던 자살특공대를 이번 실전에서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 * *
“헉, 헉. 징그럽다, 정말.”
적사결은 쓰러진 놈의 심장에 사왕을 박아 넣은 채, 한숨을 돌렸다.
그 사이, 삼십 장 밖에서는 다음 무리가 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쪽팔리게 도망쳐야 하나…….’
진심으로 한계였다.
버러지들 따위에게 이렇게까지 몰리게 될 줄은 상상도 한 적 없었다.
‘체력 회복도 안 되고 남은 내공도 고작 한 줌. 제기랄. 진짜 바닥을 치는구나.’
보리연화공의 내공과 천축유가신공의 신체 장악력.
천지연원공으로 불안정했던 부분을 이은 섬세한 체계.
그것이 거의 붕괴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지금껏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사왕과의 일체감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마저 한계까지 쥐어짠 상태였지만.
“와아아아!”
공포를 잊으려는 발악인 것인가.
달려오는 백 명 남짓한 놈들은 함성을 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씨팔, 본좌가 울고 싶다.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을 상대로 등을 보일 생각까지 하다니.”
적사결은 사왕을 질질 끌며 한 걸음씩 걸어갔다.
몸이 움직이는 한 싸우겠다는 마음이 가슴속을 채워 갔다.
“진정한 패도는 물러서지 않는다. 와라.”
불꽃같이 타오르는 안광이 터져 나왔다.
한데 가장 선두에 선 놈의 두 손에서도 불꽃같은 무언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헉! 벽…… 벽력탄!?”
군부에서나 사용할 법한 물건이 왜 여기!
적사결은 황급히 사왕에 공력을 불어넣으며 발작적으로 휘둘렀다.
꽈아아앙.
공기가 떨리며 울리는 폭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몰아쳤다.
검막이 휘청이며 깨질 듯 위태로울 정도였다.
‘이 개새끼들!’
눈앞이 어지러웠고 귀가 멍멍했다.
급하게 펼친 검막이었으나 폭발력을 모두 해소시키진 못한 것이었고 그 충격이 몸으로 전이된 것이다.
한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연속적으로 지옥의 염화가 쏟아졌다.
‘안 돼. 이대론 그 아이까지 위험해.’
폭발의 범위가 너무 넓어 숨겨 놓은 당연희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
적사결은 자신도 온존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가 염려되었다.
한데 상황은 계속되는 폭발에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다.
‘죽는 건가…….’
죽음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
생사의 경계를 수없이 넘어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을.
한데 그런 상황에 처할수록 자신은 더욱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었다.
그랬기에 마인들의 정점에 이를 수 있었고 말이다.
‘딱 한 줌의 진기. 남은 건 이것이 전부다. 하나 이것만으로 어떻게 상황을 타개해야 한단 말이냐.’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적사결은 무섭게 집중했다.
그러자 시간이 멈추고 혀를 날름거리던 화염도 정지했다.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른 한 가지.
그것은 외단이었다.
잠허자 육서성과의 대담에서 들었던 이론.
영물이 내단을 완성하고 나아가는 다음 단계.
그 경지에 다다른 영물들은 외단으로 신체 외부의 기운을 다룬다 했었다.
그것을 본뜬 적사결의 금단은 엄밀히 말하면 그 사용방법이 달랐다.
그저 금단 자체의 기운만 직접적인 복용을 통해 사용할 뿐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두한백의 내단을 생성할 때의 경험을 기초로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랬다. 신체 외부에 단을 만들었지만 방법은 내단이 그 바탕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이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런 적사결의 뇌리에 도중문과의 싸움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의 이마에 떠올랐던 진언의 형상이었다.
‘그래. 그 이마의 진언을 구현할 때 다양한 기운들이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었어.’
당시 자신은 그것을 뚫어져라 살펴보았었다.
그 기운들의 움직임과 조합이 실로 놀라웠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아지경에 빠져든 적사결의 눈은 풀려 있었지만 그 속에 수많은 빛의 선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물리적 시간이 멈춘 그 공간에서 유일한 움직임이라 한다면 오직 그뿐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적사결의 이마에는 점차 하나의 금빛 형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금단의 형태로 보였지만 완성된 그것은 눈동자였다.
제삼의 눈.
천축에서는 아즈나로 불리는 것으로 지혜의 눈이자 직관의 눈으로 불리는 것이다.
적사결은 자신만의 해석으로 체계가 다른 천축무학의 상승 경지이자 천축유가신공 10성을 동시에 달성한 것이었다.
‘한 줌의 진기를 매개체로 주변의 기운을 이렇게 조합할 수 있다니.’
적사결은 신세계를 맛 본 기분이었다.
천지연원공처럼 한 줌의 진기를 매개로 주변의 기운을 응집해 삼지안을 형성한 것.
그 삼지안을 통해 보는 세상은 형형색색이었다.
하나 가장 강렬한 색은 벽력탄이 작열하며 터져 나오는 화염의 색상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멈췄던 시간이 갑자기 흘렀다.
적사결 자신도 고양감을 느끼던 상태에서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양의 불꽃과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수백 발의 벽력탄이 한 번에 터지자 딛고 있던 작은 동산의 지형이 바뀔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포연이 걷히고 드러난 곳에 서 있는 자는 오직 한 명, 적사결이었다.
삼지안의 공능으로 화기의 폭발에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살아 있던, 그리고 죽은 시체였던 적들은 모두 산산조각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희!”
폭발범위가 너무도 넓었다.
적사결은 미친 듯이 그녀를 숨겨 놓은 장소로 달려갔다.
지형이 바뀌었지만 기운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삼지안은 그녀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미친 듯이 땅을 파자 흙더미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끔찍했다.
전신의 피부가 녹아내렸고 팔다리는 찢겨 날아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서둘러 그녀를 꺼내 눕힌 후 맥을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숨은 미약하게 붙어 있었으나 그 생명도 곧 꺼져 버릴 듯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천축유가신공으로도 회복시키기 힘들 정도로 중상이다.’
삼지안을 개안한 지금의 정신력은 최고조인 상태.
하나 타인의 몸이기에 의념이 미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더구나,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문제는 의원에게 갈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것.
당장이라도 사망할 정도로 중상이었으니 치료를 하려면 이곳에서 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적사결은 심각한 표정으로 품속의 작은 병을 꺼냈다.
“반선주…… 이혼대법…….”
그녀는 별의 기운을 가진 자.
반선주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천축유가신공으로 타인을 치료하는 것과 자신을 치료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삼지안을 개안한 지금, 저 몸으로 들어간다면 살릴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계산이 맞다면 사라진 팔다리도 재생할 수 것이고.
문제는 다시금 몸을 바꾸는 것이 꺼려진다는 그것 하나였다.
반선주를 쓸 때는 무허에게 사용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때라 여겼으니 말이다.
“에이 씨! 치료만 하고 다시 바꾸면 되지 뭐!”
꺼림칙했지만 결국 병의 마개를 붙잡았다.
그녀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