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28화>
* * *
쫘아아악.
팔 척은 됨직한 거구의 사내가 일도양단되었다.
그가 들고 있던 거치도는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을 뒹굴었다.
세치 혀로 깐족대던 산적수염의 말로였다.
“등치도 산만 한 놈이 뒤에서 조잘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퉤!”
‘놈이 지쳤다! 전부 달려들어!’라는 등 말주변으로 동료들을 떠밀던 놈.
더구나 눈치는 어찌나 빠른지 요리조리 도망 다니던 놈을 일각은 소요하고야 쳐 죽일 수 있었다.
“후우…….”
그래도 놈을 죽이고 나니 달려들던 기세가 그나마 사그라졌다.
그 사이 적사결은 끈적해진 상의를 벗어 던졌다.
피가 흥건이 묻은 옷가지는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이 정도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검을 휘둘러 본 게 언제였지.’
적랑대주이던 시절에 흘렸던 피도 많았지만 지난 삼 일간은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였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계속 죽이는 행위만 단순하게 반복.
막대한 보리연화공의 공력과 천축유가신공의 신체 회복력이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해 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작게나마 성취도 있었다.
천지연원공과 귀령운신공과의 연계가 진정으로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
깨달음이 있었고 절대 고수들과의 실전이 있었으나 수없이 많은 적을 베며 이제는 몸에 각인이 된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싸울 때는 폐호흡보다 피부 호흡이 더 편할 정도였다.
다만 문제는 있었다.
바로 심력.
체력과 공력이 받쳐준다지만 심력. 즉, 정신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고수라지만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는 심적으로 타격을 준다.
만약 본신의 내공인 혈마기였다면 그런 심리적인 부담조차 음차원적인 심상에 속하기에 투기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 터.
하나 지금의 몸은 무허의 것이기에 적사결은 처음으로 죽음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더구나 천축유가신공의 근원은 의념.
이 역시 심력에서 출발하기에 정신력이 고갈되면 천축유가신공도 한계에 봉착할 것이었다.
‘철혈의 무인이었던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다니. 쯧.’
몸이 바뀐 후에 여러모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 적사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동안 쌓은 시체의 산 덕분인지 불나방 같던 놈들도 주춤거리기 시작했다는 것.
놈들도 드디어 버러지에서 벗어나 생각이란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적사결은 저 멀리 지붕 위의 당연희를 바라보았다.
‘역시 독수당가. 전각 주변에 독을 살포하고 버티는 중이군.’
그녀는 독비화라는 별호답게 암기 말고도 독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고작 몽혼약으로 자신을 잠들게 한 여인이었다.
피독주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자신을 중독을 시켰다는 것은 그녀의 용독술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독도 무한하진 않다는 것.
잠시 고민하던 적사결은 신형을 날려 당연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피로가 한계에 달했는지 눈 밑이 거무튀튀하고 피부가 퍼석해 보였다.
“버틸 만한가?”
적사결의 물음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당찬 그녀도 이 정도의 싸움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업혀.”
“뭐?”
“업히라고.”
“어쩌려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도망치자는 거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니까.”
“똥물 다 뒤집어써놓고 이제 와서?”
당연희는 적사결의 온몸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피웅덩이에라도 들어갔다 나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득하게 굳은 혈흔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본좌 혼자라면 젓가락 들 힘만 있어도 다 쳐 죽인다. 한데 넌 아니잖아. 일단 너부터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다시 와서 다 죽일 거다.”
“나…… 때문이다?”
“때문이 아니라 위해서라고 해 두지.”
“왜?”
“아, 거…… 참. 말 더럽게 많네. 아까는 서방 삼을 기세더니 왜 이렇게 따지고 들어?”
“그럼 내 서방해 줄래?”
당연희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등에 올라탔다.
“밝히긴.”
그 말과 함께 적사결은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바닥을 박찼다.
그러고는 허공답보를 연이어 펼치며 주변을 둘러싼 포진을 벗어나 버렸다.
그 엄청난 경공에 흑도인들은 손도 쓰지 못하고 쳐다만 보았다.
“쫓아!”
동시에, 마치 야생의 소 떼가 질주하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수천 명의 무인들이 적사결이 도망친 방향으로 일제히 뛰기 시작했다.
* * *
쇄애애액.
적사결은 당연희를 업고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누구도 그 뒤를 쫓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한데 그 발걸음은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왜 그래?”
“앞에, 또 쓰레기들이 또 있군.”
“그게 보여?”
당연희는 안력을 집중해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적사결은 대답도 하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달렸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지했다.
“빌어먹을, 버러지 천라지망이라니…….”
“설마 또?”
“아무래도 인근에 칼 찬 놈들은 가리지 않고 다 모은 모양이다.”
“고작 우리 두 사람 잡겠다고 그렇게까지?”
적사결은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는 끝없는 소모전이 계속된다.
심력도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당연희가 그 장기전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너 귀식대법 펼칠 줄 알아?”
“응. 배우긴 했어.”
독과 암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전법은 기습이다.
그리고 귀식대법은 기습을 위한 전제 조건인 은신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귀식대법을 펼쳐 가능한 최대로.”
“가사 상태에 빠지라는 거야?”
귀식대법도 단계가 있다.
극성으로 펼치면 죽은 듯이 잠들 수 있었다.
“혹시라도 놈들 중에 절정 고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정도는 돼야 안전할 거다.”
“날 숨겨 놓고 혼자 저 많은 인원을 상대하겠다고? 미쳤어?”
“널 지키면서 싸우는 게 백배는 힘들다. 얌전히 잠이나 자.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테니까. 대충 만 명 정도 베면 끝나려나…….”
적사결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스산한 모습에 당연희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만부부당.
만 명으로도 당해 내지 못하는 사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이미 삼 일 간의 싸움에서 그 절반 정도인 오천의 인명을 해한 상태였다.
한데 앞으로도 그만한 인원을 죽이겠다 선포한 것이다.
‘설마 반로환동한 고수라도 되는 건가?’
그 정도의 전설적인 수준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한데 그건 말 그대로 전설로만 회자될 뿐 전인미답의 경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당연희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어때?”
“뭔데?”
“녹주독혈사의 내단. 내가 복용하게 해 줘.”
“네가 먹겠다고? 그걸 먹어서 어쩌려고?”
“우리 가문 사람들이 특이 체질인 건 알지?”
적사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넓은 천하에서 독공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가문.
독공은 내공 자체가 독기를 띠는 천하에서 가장 독특한 무공이라 알려져 있다.
한데 실제 독공을 쓸 수 있는 무인은 당가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직계 중에서도 혈맥에서 독기를 생성할 수 있는 자들만이 독공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들을 당가에서는 당천십위라 불렀다.
“내가 당천십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가의 직계야. 독기를 생성할 순 없지만 내 혈맥은 천독불침에 가깝지.”
당천십위를 제외한 당가의 혈족은 그녀처럼 선천적으로 독에 대한 내성이 있었다.
독초와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지만 극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특이 체질 덕분이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당연희의 경우는 그중 최상급.
당천십위를 제외하고는 가장 당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것이다.
“천독불침이 그걸 먹고 만독불침이 되면 뭐가 달라지지?”
“만독불침도 되지만 하나 더 있어.”
“그게 뭔데?”
“나라면 이 내단이 지니고 있는 진짜 힘. 독정을 취할 수 있어.”
독의 정기이자 근원.
만독을 무효화시키는 피독주의 공능이 발휘되는 힘의 원천이다.
독정을 취한다면 그녀는 당천십위와 마찬가지로 혈맥에서 독기를 생성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독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맞아. 독인이 되면 숨만 쉬어도 주변 사람들을 중독시킬 수 있어. 굳이 귀식대법을 쓰지 않아도 난 안전하다는 말이야.”
적사결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단순히 녹주독혈사의 내단에 대한 탐욕이 아니다.
귀식대법으로 숨겨 놓더라도 신경이 쓰이게 마련일 터.
해서 스스로 독인이 되면 안전이 보장되니 마음껏 싸우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것은.
“내단을 복용하고 독정을 취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한식경 이내로 끝낼 수 있나? 무리겠지.”
바로 시간이다.
천하 삼대극독 중 하나인 녹주독혈사의 독이니만큼 그 정기를 취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은 당연지사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시진은 필요할 거 같은데?”
“……그 ……그 정도는 아니야.”
당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라고 시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략 반 시진 정도일 것이라고는 여겼지만 말이다.
“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그것보다 짧겠지. 하나 지금의 넌 체력, 공력, 심력. 어느 하나 정상이 아니다. 물론 내단의 힘이 기운을 북돋아 줄 것이라 계산했겠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은 지속력이 약해. 더구나 본좌에게도 문제가 있고.”
“무슨 문제?”
“호법을 서 주고 싶어도 한식경이 한계야.”
“뭐? 그럼 그런 상태로 어떻게 혼자 저 많은 적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혼자니까 어찌 어찌 가능할지도 모르지. 무아지경으로 이놈만 휘두를 생각이니까.”
적사결의 말에 사왕이 웅웅거리며 도명을 발했다.
투기에 호응해 무구가 절로 반응할 정도로 둘의 일체감은 극한까지 높아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 피곤에 쩔어서 눈도 풀렸으면서.”
당연희는 사왕과 적사결을 번갈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무인이었으니 지금 저 경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절대 고수. 아까도 그랬지만 이 녀석은 진짜 천하 십대고수에 뒤떨어지지 않아.’
막대한 공력을 바탕으로 강기를 남발하던 처음의 격돌.
그리고 힘을 절제해 최소한의 힘으로 초식의 묘를 살린 두 번째 전투.
지금 보이는 세 번째 모습은 무기와 자신이 일체화된 신검합일이었다.
물심일여로 대변되는 무념무상의 상태.
적사결이 말한 무아지경으로 사왕을 휘두른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진짜 신검합일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경지의 고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괜찮겠지.’
지금까지처럼 오합지졸만으로는 적사결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무구와 하나가 되면 체력적인 한계를 넘어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알았어. 귀식대법을 쓸게. 뒤를 부탁해.”
당연희는 곧바로 귀식대법을 펼쳐 혈맥을 닫고 호흡과 심장 박동까지 늦췄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기나긴 동면에 들어간 동물처럼 신진대사가 거의 멈춰 버렸다.
적사결은 그런 그녀를 안고 근처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수풀을 나온 적사결은 사왕을 부드럽게 뽑았다.
“자식. 이제야 완전히 길든 모양이구나. 이젠 마도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어.”
무기란 시간이 지나면 주인을 닮기 마련이다.
사왕은 지금까지 그 성질이 적사결에게 맞게끔 변화해 왔고 오늘에서야 각성한 듯 흉흉한 기운을 뿜었다.
하나 반면에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도 내포하고 있었다.
바로 보리연화공의 내공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영향이었다.
불도와 마도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게 된 사왕.
상극의 기운을 가지게 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향후 본래의 몸을 되찾고 사왕으로 소림의 땡중들을 상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완전한 마검인 애검, 적령과 달리 사왕이라면 마기의 상극인 불가기공에 대한 저항력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먼 훗날의 일.
당장은 눈앞에 다가온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할 때였다.
“모조리 이 산의 거름으로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