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25화>
당연희는 빽 소리를 질렀다.
적사결이 크게 웃자 주변의 조가장 놈들도 키득거렸기 때문이었다.
“암암. 당연히 그만 웃어야지.”
“익…….”
당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적사결을 노려보았다.
“해서 고인께서는 뉘신데요?”
“본 좌 말이냐? 흐음…….”
뭐라 할까.
마도지존? 소림 제자?
왠지 어느 쪽이든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정체를 밝히기엔 보는 눈이 많다.
스릉.
적사결을 사왕을 빼 들었다.
그 모습에 당연희가 흠칫하며 한 발 더 물러섰다.
파파파팟.
적사결의 팔이 늘어나더니 채찍처럼 춤을 췄다.
수라천살검, 격혈경혼.
그 한 수에 당연희를 제외하고 나머지 연놈들의 목을 모조리 날린 것이었다.
“다수가 한 명을 겁박했으니 뒈져야지. 그렇지 않느냐?”
“정체를 알게 되면 죽는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밝히고 싶지 않다는 건가요?”
“굳이 따지자면 후자랄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름을 밝힌 보람이 없군요.”
당연희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적사결은 그 모습이 사뭇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밝힐 정도로 내세울 이름도 없지. 강호초출이거든.”
“무…… 무슨 설마…….”
“말 그대로야. 아까의 한 수를 보고도 모르겠나?”
“…….”
팔이 늘어난 비정상적인 수법.
당연희는 강호에 그런 무공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식견이 짧지 않은 자신이 모른다면 강호초출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었다.
“진짜 초출?”
“그렇다니까.”
“아까는 왜…….”
“아까?
“…….”
생각해 보니 상대방이 고인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은 자신.
당연희는 말투와 분위기에서 그럴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너…… 몇 살이야?”
“음…… 넌 몇 살인데?”
쉰이다, 이것아.
“내가 먼저 물었잖아!”
“서른…….”
“그 얼굴로? 나도 서른인데.”
“셋.”
“뭐?”
“서른 셋이라고.”
“너 이 자식! 지금 장난쳐?”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들은 건 너지 않느냐? 자기 멋대로 상상한 것도 너고.”
적사결은 빙글거리며 사왕에 묻은 피를 털었다.
그 모습에 당연희는 눈에 이채를 발했다.
“이거 뭐야? 피독주도 그렇고 이 무기도 장난 아니잖아.”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의 명문.
덕분에 독에 통달한 그들은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암기의 제작과 관련된 철의 제련과 야장 기술에도 관심이 지대했다.
자고로 암기란 작고 가벼운 물체가 날카로우며 튼튼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 당연희의 눈에 사왕은 전가의 보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보고 싶나?”
“응.”
당연희가 사슴 같은 눈망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했다.
“그 품속의 피독주도 좀 보여 주면 안 될까?”
“하는 거 봐서.”
“뭐?”
“본 좌에게 하는 거 봐서 보여 주겠다는 말이다.”
적사결은 사왕을 납도하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당연희는 쪼르르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지금 나랑 하고 싶다는 거야?”
“뭐…… 뭐?”
“하는 거 봐서라며? 나 꽤 하는데 한번 할까?”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그랬다간 단전이 박살 나, 이것아.
동자공으로 쌓은 내공은 음양 교합을 하는 즉시 내공이 흩어진다 했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깝긴 하다.
이 거지 같은 고자 몸이 아니라 본래 몸이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새삼 환관들에게 불알 뗀 병신이라 놀린 것이 미안해졌다.
“어머,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너 진짜 강호초출 맞구나?”
“시끄러워.”
“호호, 센 척하기는.”
당연희는 계속 달라붙으며 사왕과 피독주를 보여 달라 간청했다.
다음 마을이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 * *
“지약아!”
조가장의 장주 조군악은 목 잘린 시신으로 들어온 조지약을 붙잡고 오열했다.
광동제일미로 이름을 날린 딸아이는 조만간 인근 문파 중 가장 큰 세력을 일구고 있는 흑살방으로 시집을 갈 예정이었다.
한데 아침에 나간 아이가 하루 사이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어…… 어찌 된 것이냐. 누가…… 누가 딸아이를 죽인 것이야!”
조군악의 물음에 총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용검대주 이손은 소장주인 조지약의 명을 따르기 전 그에게 전후 사정을 알렸기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들은 조군악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멍청한! 딸아이가 비밀로 하라고 했다 하여 나에게 보고를 안햇!”
콰직.
조군악의 일장에 총관의 두개골이 박살났다.
뇌수가 묻은 손을 총관의 옷에 닦은 그는 소리쳤다.
“지금 당장 흑살방으로 갈 것이다. 채비하거라!”
* * *
“한데 아까 그놈들에게는 왜 쫓기고 있었던 거냐?”
적사결은 소면을 후루룩 빨아들이며 물었다.
객잔에서 요기를 하면서도 당연희가 달라붙으려 하기에 적당한 화제를 던진 것이었다.
“아까 걔들? 나도 모르지.”
“거짓말 마라. 네가 당가의 여식인 걸 알고 덤볐는데 이유를 몰라?”
사천당가는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
그 때문에 뱀과 거미의 문양을 보면 피하는 것이 강호의 불문율일 정도였다.
“강호초출이라면서 우리 가문에 대해 잘 아네?”
“무림에서 다른 집단은 다 몰라도 당가를 모르면 안 되지. 원한을 사면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추살하는 독한 집안이니까. 오래 살고 싶으면 당가와는 통성명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
“그건 본가가 정사지간의 대표 무가니까 대놓고 따돌리는 거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천하에서는 무수한 문파가 있었고 그들이 모두 정파나 사파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흑백논리에 따른 세력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회색분자.
그들은 의천맹과 사무련에 가입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정사지간으로 불렸다.
그 정사지간의 문파 중 가장 거대한 집단이 바로 사천당가였다.
그리고 당가를 중심으로 사천의 문파들이 모여 사천회를 결성. 그렇게 그들은 정사지간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래서 이유가 뭐야? 복수 때문에 그놈들의 친지라도 죽인 거야?”
적사결의 되물음에 당연희는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질끈 묶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소면을 전투적으로 흡입했다.
“대답도 안 하고 갑자기 왜 먹기만 하지? 아까는 먹으래도 안 먹더니.”
“후룹. 사정이 복잡한데 배고프니까 머리가 안 돌아가서. 배 채우면서 생각 좀 정리하고 말해 줄게.”
당연희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국수 그릇을 비우고 죽엽청까지 한 병 시켜 마셨다.
“크으. 여기 술 괜찮네. 광동성에 명주가 많다더니 진짠가 봐.”
“그만 처먹고 좀 말해 주지 그래?”
적사결의 재촉에 그녀는 술잔을 비우고 입을 열었다.
“흑살방이라고 알아?”
“아니.”
기억할 만한 고수가 있는 문파가 아니라면 기억할 가치가 없다.
적사결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문파의 기준은 그것이었다.
“장령곡은?”
“알지. 한때 광동제일검이었던 섬영검 비환립이 곡주로 있던 곳 아니냐?”
“그래. 사무련에 반기를 들었다 멸문당한 그곳이지. 흑살방은 장령곡의 빈자리를 차지한 광동의 패자고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기억에 남는 고수가 없는 것 같은데…….”
“섬영검 정도의 고수는 없지. 그는 한때나마 십대고수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런 고수가 어디 흔하겠어? 너 아무리 강호초출이라도 너무 무지한 거 아니야? 십대고수가 아니면 고수도 아니란 거야?”
“당연히.”
“왜?”
“아니, 당연히 십대고수 아니면 고수 아니라고. 킥.”
당연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조준하며 말했다.
“또 그러면 이게 네 눈깔을 대신할 줄 알아.”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진정하고 그거 내려놔. “
유치한 건 아는데 너무 꿀재미다.
“그래서 흑살방이 어쨌는데?”
“네가 말한 것처럼 흑살방은 고수들이 부족해. 다만 쪽수가 많은 게 장점이지. 해서 놈들은 그 장점을 더욱 키우려 한 거야. 바로 광동성의 정사지간 문파들을 휘하에 넣어서.”
“사천회에서 가만있지 않았겠군.”
“맞아. 사천회는 사천성만이 아니라 중화 전체를 대상으로 정사지간의 문파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무사들을 파견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지?”
“별거 없어. 사천회가 사무련에 공문을 보냈고 그 일은 그걸로 해결되었으니까.”
사천회는 의천맹이나 사무련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강호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특별했다.
첫째, 그들이 지금처럼 중립이 아닌 어느 한쪽의 편을 들게 되면 천하사대세력의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무림의 판도를 사천회가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정사지간의 문파는 규모가 작을지언정 어디에나 있었다.
북무림, 남무림은 물론 천마신교의 영역인 신강 등 변방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사천회의 우방이었다.
“한데 흑살방과 동맹 관계인 조가장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자존심이 상했다는 건가?”
“맞아. 자기 집 안방에서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꼬리를 말아야 했으니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여간 약골 새끼들이 진짜 모욕이 뭔지 모른다니까. 쯧쯧.”
실력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덩치만 키우려고 하다니.
공문을 받은 것이 본 교였다면 한바탕 칼부림이 일어났을 것이다.
“흑도에 속한 문파는 대부분 거느린 부하의 수가 곧 힘이라는 생각을 해. 흑살방과 조가장도 그런 거지 뭐.”
“다 그런 건 아니지. 사무련에서도 흑천백가를 비롯해 아까 말한 장령곡이나 천웅방 같은 곳은 달라. 실력도 없고 기개도 없는 놈들이나 그런 거지.”
“와…… 너 진짜 십대고수와 관련된 곳 아니면 안중에도 없구나?”
적사결이 언급한 곳들은 과거 한 번 정도는 십대고수를 배출한 문파들이었다.
지금도 사무련의 주축인 거대 문파들이고 말이다.
“당연…… 하지.”
젠장, 딱 좋은 기회였는데.
당연희가 눈치를 챘는지 도끼눈을 뜨고 있어 목구멍 아래로 꿀꺽 삼켜야 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커지겠는데…….’
처음엔 단순히 당연희의 외모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여겼었다.
저 정도의 미녀는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으니까.
한데 이 근방만이 아니라 광동성 전체를 주름잡는 문파가 연루된 일이었다니.
적사결은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당연희를 보며 생각했다.
‘한데 얜 뭘 믿고 이렇게 여유롭지?
* * *
“방주! 결단을 내려주시오!”
조가장주 조군악이 바닥에 칼을 박아 넣으며 호소했다.
“장주의 심정은 이해하나 상대는 사천회요. 그것도 사천당가의 여식이지 않소?”
“우리 아이는 곧 시댁이 될 흑살방을 위해 움직였고 살해당했소이다. 그 독랄한 계집을 본보기로 죽여 흑살방의 면을 세워 주고자 한 것이란 말이오!”
조군악의 말에 혈화문의 문주 방운덕이 동조했다.
“방주. 내 딸아이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세인들이 뭐라는 줄 아십니까? 흑살방이 광동성의 대표가 되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답니다. 장령곡이었다면 련의 공문 한 통에 이렇게 꼬리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뭐요?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흑살방주 사악진이 서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지…… 지금 소문이 그리 돈다는 말입니다. 자칫 광동성 밖으로 퍼져 나갈까 걱정되어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방운덕은 사악진의 기세에 눌려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방주. 무엇이 두려운 겝니까? 내 딸과 혈화문주의 여식을 먼저 죽인 것은 그 계집이오. 명분은 우리에게 있지 않소?”
입을 다물어 버린 방운덕을 대신해 조군악이 명분을 따지며 말했다.
“하나 독비화 그 계집은 당가의 직계요. 분명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란 말이오.”
“그리되면 사무련에서 가만있겠습니까? 우리가 련에서 차지하는 무인들의 수가 몇 명인데요. 절대로 우릴 버리지 않을 겁니다.”
“끄응…….”
사악진은 두 사람의 주장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흑살방을 제외하면 조가장과 혈화문은 광동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두 세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광동성의 패주를 자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방주. 솔직히 련에서는 우리 광동 무인들을 오합지졸로 보고 있소. 이번 기회에 보여 줍시다. 우리가 똘똘 뭉치면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오.”
자존심을 살짝 건드는 어투.
하나 조군악의 주장은 사악진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씨발, 확 저질러 버려?’
각 성을 대표하는 문파들의 대회합.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악진은 언제나 개무시를 당했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울분이 지금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