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19화>
황성수비대의 일원이자 차기 백인장 자리를 노리는 유길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땅 꺼질 것 같구나. 왜 그리 한숨이더냐?”
“아, 조 천인장님.”
유길은 뒤늦게 조헌 천인장을 발견하고 일어서며 읍례했다.
상관이 오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던 것이었다.
“혹, 아까의 비무 때문에 그런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다. 내 둘러보니 다들 마찬가지인 것 같으니.”
조헌은 훈련군장으로부터 연무장의 일을 보고 받고 병사들을 살폈다.
이는 엄세번 때문에 사기가 저하되었을 것이라 보고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만큼 엄씨 일가의 전횡과 횡포는 군부라 하여 무관하지 않았으니까.
한데 둘러보니 정작 병사들의 사기 저하는 세 사람의 무림인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들보다 어려 보이는 연배의 무인이 보인 경이적인 무력 때문에.
“자괴감이 드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무위라니. 무림인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구나. 너무 빨라 이리저리 번쩍거리고 쾅쾅거리는 소리만 들을 뿐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어떤 군장은 칼을 놓고 싶다는 얘기까지 하더군.”
“그럴 겁니다. 천인장님께서도, 아니 누구라도 그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조헌은 피식 웃으며 유길의 등을 두드렸다.
“너무 그리 상심하지 말거라. 내 알아보니 그들은 무림에서도 정점에 다다른 자들이라 하더구나. 그리고 그들 중 두 중년인은 앞으로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라 하니 어쩌면 그들에게 무예를 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말입니까?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겁니까?”
“하하, 그래. 그러니 의기소침한 것은 그쯤 해 두거라.”
유길은 전에 없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 군문에 투신한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한데 현실은 이런저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북로남왜로 대변되는 외세의 침략부터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까지.
더구나 간신 엄숭의 전횡으로 군부에 제대로 된 지원이 되지 않으니 나라를 지키고 싶어도 힘이 부족했다.
한데 그 초인적인 자들에게 무예를 배운다면 그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녀석, 이제야 활기가 도는구나.”
“한데 천인장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두 중년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을 동시에 상대한 그 젊은 무인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무림의 정점에 선 자들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사내.
유길은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허허, 이것 참.”
“왜…… 그러십니까?”
“나도 궁금해서 그런다, 이놈아. 다들 그걸 나한테 묻는데 나도 좀 알고 싶구나. 그 천재 무인이 누군지.”
* * *
꽈아아아아앙.
천지가 뒤흔들리는 격돌에 이어 폭풍 같은 경파가 따랐다.
북경 외곽 인적이 드문 야산은 전쟁이라도 치른 듯 초토화되어 있었다.
“퉤.”
적사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피를 뱉어 내며 인상을 썼다.
무위가 상승했다지만 두 사람의 절대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대단하군. 자네가 검제 그 친구를 패퇴시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팽도극의 말에 적사결은 입가의 선혈을 닦으며 대꾸했다.
“코피나 닦고 말해. 안 그래도 늙다리라 추한데 더 꼴 보기 싫거든.”
“상대를 도발하는 건 천하일품이로군. 쯧.”
팽도극은 소매로 코피를 닦고는 들고 있던 도를 바닥에 던졌다.
황성 연무장에서 얻은 싸구려 도는 벌써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적사결이 지니고 있는 검도 마찬가지였다.
쩌저저적.
장군검에 균열이 가더니 결국 바스러져 파편으로 화했다.
아무리 강기로 강화했다지만 서로가 동등한 수준인 만큼 한계를 보인 것이다.
“내 자네가 이형도를 쓴다 들었네. 그것도 꽤 보도라지? 신룡검을 부러뜨렸다던데.”
“왜? 탐나는가?”
“일단은 도객이니 이형도라는 걸 한번 보고 싶군. 그리고 무기는 도를 쓴다 들었는데 정작 손을 섞어 보니 검객인 것 같으니 그것도 이상하고 말이야.”
“그딴 거 따질 실력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 꼬장꼬장하게 따지는 걸 보니 당신도 더 위로 올라가긴 글렀군.”
검이든 도든 결국 만류귀종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하려면 틀을 벗어나고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꼬장꼬장해도 나는 도가 좋으니 말이야. 그래서 그러는데 애병을 갖추고 다시 싸우는 것이 어떤가? 자네도 맨손으로 우리 둘을 상대하긴 힘들 터인데.”
팽도극의 제안에 적사결은 피식 웃으며 검신이 사라진 장군검의 검파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이이잉.
황금빛 검강이 검신을 대신해 자리했다.
엄청난 공력이 소모되는 비효율적인 행위였으나 어차피 내공은 남아도는 몸 아닌가.
“허어, 그 나이에 그만한 내공 수위라니 대환단이라도 훔쳐 먹은 겐가?”
황보겸이 감탄 어린 눈을 한 채 말했다.
“나는 누구들처럼 집안에 틀어박혀 숨만 쉬며 살진 않았거든. 자고로 내공도 실전이라 했지.”
“암암, 옳은 말이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각이 깊군. 그 나이 때는 다들 폐관 수련이니 하며 골방에 틀어박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말이네.”
내공도 실전이라는 말에 진정으로 동의하다니.
역시 황보겸은 엄청나게 실전 경험이 풍부한 것 같았다.
아까의 철두공을 대응한 걸 보더라도 개싸움에 익숙한 듯 보였으니 말이다.
“자, 그럼 대화는 그만 접어 두고 계속해 볼까?”
이렇게 재밌는 싸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적사결은 다음으로 미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삐이이익.
하늘 저편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꾸웅.
십장이 넘는 높이를 뛰어내린 자는 백류혼이었다.
수호신조를 타고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다.
“응? 넌 또 왜 왔냐?”
“힘에 부치실 것 같아서요. 듣자 하니 황성에서 저 괴물들을 동시에 상대했다면서요? 참 대단하세요. 저들을 상대로 물러나지 않으시다니요.”
“귀도 밝다, 새끼야. 그래서 그 얘길 듣고 주변을 수색한 거냐?”
“예. 진 위사가 소문을 들었는지 저한테 알려 주더군요. 위험하실지 모르니 좀 챙겨 달라고요.”
“챙기긴 누가? 네가 날? 허이구…….”
“예, 예. 그냥 무시할 걸 그랬네요. 표정이 꼭 좋아하는 장난감 빼앗긴 어린애 같은 걸 보니 말이에요.”
“알면 그냥 가. 네놈 도움은 필요 없으니까.”
“구경은 안 되나요?”
“왜? 보고 네놈 아비에게 알려 주게?”
“네.”
백류혼의 태연한 대답에 적사결은 쿡쿡거렸다.
‘뭐 그것도 좋겠지. 놈이 경각심을 가진다면 더 재밌는 승부가 될 테니까.’
받은 빚이 워낙 크기에 돌려줘야 할 이자도 어마어마했다.
하나 그건 그거고 그 생사결을 통해 자신도 얻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
적사결은 그를 위해 자신의 전투를 백류혼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봐라. 어떻게 저 두 놈을 조지는지.”
스파앗.
이형환위와 함께 사라진 신형.
적사결은 두 가주의 눈앞에 나타나 쾌속하게 하단을 베었다.
하나 그들은 공중으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허공답보로 허공을 박차며 공세를 펼쳐 왔다.
쩌저정. 쩌정.
검강으로 검막을 펼치며 막아 냈으나 두 절대 고수는 그것만으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막을 끊임없이 두들기며 연환 공세를 이은 것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정.
팽도극의 도수에 서린 도강이 신들린 듯 검막을 두들겼다.
오호단문도, 도명난설이었다.
흩어지는 눈보라처럼 도명이 사위를 휩쓰는 광경은 일품이었다.
쩌저저정. 쩌저정.
황보겸도 왼손과 오른손이 번갈아 가며 미친 듯이 주먹을 뻗었다.
수미천왕신공, 천왕천겁타의 맹격은 한 방 한 방이 벽력탄이었다.
두 사람은 백류혼을 의식해 이번 공격으로 승부를 가를 생각인 듯 보였다.
적사결 한 사람만으로도 방심할 수 없었기에 그런 것이다.
‘여기서 끝낸다. 황성에서부터 놈의 실력은 충분히 보았어.’
‘늑대 괴물로 변하기 전에 승부를 본다.’
전초전은 충분히 치른 상황.
남궁건에게 들은 놈의 비장의 수가 나오기 전.
지금이 승패를 가를 마지막 기회였다.
‘한데 이놈…… 뭐냐…… 이 여유는.’
상대의 대응은 그저 단단히 방어를 굳힌 것이 아니었다.
피할 땐 피하고 막을 땐 막고 흘릴 때 흘리는 이상적인 수비.
두 사람은 마치 거대한 천애절벽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역시 손에 잡힐 듯 느껴져. 공기의 흐름. 투로의 흐름. 저들과 나, 주변에 존재하는 기의 흐름. 그 모든 것이.’
무위가 상승한 탓도 있지만 천지연원공과 귀령운신공을 익힌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천지연원공이 광혈수라공과 보리연화공을 이은 것만이 아닌 천축유가신공의 공능까지 녹여 낸 것.
더구나 귀령운신공, 정확히는 그것을 흉내 낸 피부 호흡 덕분에 전신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진 탓에 초감각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여기서 팽가 놈은 천중혈. 황보 놈은 견정혈인가.’
어디를 공격할지 투로가 뻔히 보이니 방어가 재밌을 정도.
평소 공격을 더 선호하던 적사결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크아아악! 이놈!”
자신들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을 먼저 받은 자는 팽도극이었다.
의천오무제로 불린 이후 이같이 압도적이고 모욕적인 싸움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백천악조차 이 정도 굴욕감을 주진 못했었다.
크르르릉.
팽도극의 도수에서 다섯 줄기의 강기가 뻗어 나왔다.
각각의 강기는 산군대호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오호단문도 최후 절초인 오호파산경이었다.
“산군이라기엔 너무 작잖아. 고양이 아니야?”
오호파산경에 맞서 적사결의 검이 귀신의 형상을 그렸다.
수라천살검, 귀문혈천의 수법이었다.
황금빛 서기가 어린 귀문에 다섯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으로 광룡파천권을 펼쳤다.
다가오는 황보겸을 향해서였다.
주먹과 주먹.
천왕삼권과 광룡파천권이 맞붙었다.
적사결을 사이에 두고 팽가와 황보세가의 절초가 펼쳐진 것이었다.
콰아아아앙.
충격파에 땅이 뒤집어지고 나무가 뿌리 뽑혀 날아갔다.
백류혼은 손바닥으로 눈앞을 가리며 찡그렸다.
‘어마어마하군. 괴물 같은 노친네들 같으니.’
공기를 떨어 울리던 경파가 사라지고 먼지가 걷히자 승부의 결과가 나타났다.
백류혼은 신음을 삼키며 홀로 오연히 서 있는 적사결을 보았다.
‘아버지가 저자를 이길 수 있을까…….’
의천오무제 두 명을 상대로 이런 신위라니.
팽도극은 마치 호랑이가 물어뜯은 듯 팔다리와 목이 분리되어 있었다.
귀문혈천으로 오호파산경을 되받아친 결과인 듯했다.
반대편의 황보겸은 그나마 나았다.
양팔이 사라졌을 뿐 절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권사가 양팔을 잃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저벅. 저벅.
적사결이 다가오자 황보겸은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쿨럭. 주…… 죽여라.”
“그럴 생각이다. 당신 같은 고수의 긍지를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고…… 고맙군…… 크웩.”
황보겸은 연신 죽은피를 토했다.
침경에 오장육부가 파괴되었기에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누구 손에 죽는지는 알아야겠지. 죽기 전에 알아 둬라. 본 좌는 마도지존, 천마신교의 교주 적사결이다.”
“과…… 광혈존? 무슨…… 개소리를…… 쿨럭. 쿨럭.”
“염라대왕에게 가면 그렇게 얘기해. 그럼 알아들을 테니까.”
콰직.
적사결의 주먹이 황보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천하제일권사인 그를 예우해 권으로 보내 준 것이었다.
“더 강해졌군요. 늑대 괴물로 변하지도 않고 두 사람을 압도하다니요.”
백류혼이 다가와 말했다.
“백천악에게 전해. 네놈도 더 강해져서 오라고. 기대하겠다고.”
적사결은 그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백류혼은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제 안 보이겠지?’
적사결은 그늘이 진 숲속으로 들어오자 앞섶을 열었다.
그 속에는 붉은 털이 풍성하게 나 있었다.
적랑 의태를 응용해 의복에 가려지는 부분만 의태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분 의태였다.
적사결은 자신의 가슴 털을 보며 히죽 웃었다.
“오, 사나인데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