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06화>
뿌드득. 뿌득.
적사결은 적랑 의태를 풀었다.
바닥에는 덩그러니 절륜창이 놓여 있었다.
“좆도 없는 새끼한테 뒈지다니. 당신도 늙었던 게요?”
적사결은 쓸쓸한 눈으로 절륜창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강했던 연무흔이었다.
천하제일의 창수로 불린 그와의 인연.
짧았지만 강렬한 만남이었고 그만큼 허탈하고 씁쓸한 감정이 온몸을 지배했다.
“복수를 해 주었으니 이제 그때의 빚은 없는 거요.”
적사결은 절륜창을 챙겨 장원을 나섰다.
* * *
천금루로 돌아오니 난리 법석이었다.
암살 음모의 용의자인 엽주평은 죽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갔던 여공공과 적사결은 사라졌기 때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사들과 창위들은 천금루 주변으로 흩어졌다.
사라진 두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중 한 사람이 나타났다.
“공공!”
창위들이 여공공을 발견하고 모여들었다.
사라진 그가 휘적휘적 걸으며 나타난 것이었다.
절륜창을 등에 메고.
“어디 가셨었습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옷은 왜 바꿔 입으셨습니까?”
“음? 절륜창도 가지고 오셨습니까?”
창위들은 여공공의 모습을 보며 질문을 쏟아 냈다.
“흠. 흠. 저는 한동안 동창을 떠나려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공?”
“장기 휴가를 낸다고 제독께 말해 주세요. 효, 효효.”
아니, 호호홍이었나? 쿄쿄쿄였나?
에라이, 변태 새끼는 흉내 내기도 힘들군.
“장기 휴가라니요, 공공.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냥 알아서 휴가계 올리고 처리해요! 답답해서 바람 좀 쐬야겠으니까.”
적사결은 성질을 버럭 내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창위들의 실력으로는 감히 쫓을 엄두도 나지 않는 엄청난 신법이었다.
“공고오옹!”
“쪼…… 쫓아라! 어서! 공공을 쫓아!”
첩형의 명에 창위들이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뭐지?”
왕욱은 창위들의 모습을 보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상황을 아는 당사자인 여공공이 나타나 한숨 돌리나 했더니 몇 마디 주고받고는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창위들은 그의 돌발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말이다.
“원래 여공공이 제정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러다 금방 돌아오겠죠.”
진무백이 한심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황궁최고수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제멋대로인 여공공이었다.
더구나 그 인성은 사상 최악.
변태스러운 데다 가학적이고 잔혹하기까지.
동창의 환관들도 어려워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 여공공이었다.
“하긴 그가 무림인이었으면 천하사괴가 오괴가 되었을 만큼 괴짜니까.”
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시야에 적사결이 들어왔다.
느긋하게 다가오는 그를 보고 왕욱은 불이 나게 달려갔다.
“자네 어찌 된 건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적사결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천금루에서 두 사람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여공공이 엽주평을 죽인 후였고, 그가 갑자기 어디론가 향하자 급히 뒤쫓았지만 놓쳤다는 것까지.
“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환관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적사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왕욱과 진무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외모를 바꾸는 능력이 있던 그를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하나 그걸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소주에서 추포했을 때도 인피면구를 벗었기에 뭐라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창위들은 일이 있어서 먼저 떠났습니다. 용의자도 죽었으니 저희들도 떠날 참이고요.”
진무백의 대답에 적사결이 물었다.
“엽주평 그놈이 묵고 있던 방은? 확인했어?”
“별거 없었습니다. 그냥 다른 방과 똑같던데요.”
“가 보자. 앞장서.”
진무백이 데리고 간 곳은 천금루 뒤편 별채로 불리는 곳이었다.
동일한 크기의 방이 늘어선 걸로 보아 이곳에서 객잔 손님들이 숙박을 하는 모양이었다.
적사결은 엽주평이 묵었던 방으로 들어가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죽은 놈이 누군지 알아내야 해. 그래야 엽주평 그놈의 다음 행보를 알 수 있어.’
가재도구는 별게 없었다.
평범한 객방에 으레 있을 법한 물건들뿐이었다.
개인 물품들도 마찬가지.
눈에 띄는 것들은 없었다.
이래서는 이 방이 엽주평의 것이 아닌, 지나가던 행상의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적사결은 안력을 강화해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무슨 단서든 찾아야 했으니까.
‘미치겠구나. 뭐 이렇게 특색 없는 인간이 다 있어?’
방을 보면 그 주인에 대해 대략적인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자주 쓰는 물건을 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추측하는 등의 행위.
게으른지 부지런한지, 청결한지 지저분한지, 따뜻한 사람인지 차가운 사람인지 등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까지.
한데 이 방의 주인은 철저하게 회색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의 감정은 없다는 듯.
그런 적사결의 눈에 탁자 위의 동경이 들어왔다.
희미한 무언가……
안력을 수십 배의 배율로 확대하자 동경에 묻은 흔적이 보였다.
그냥 봐서는 알 수 없는 손때였다.
그것도 수백 번은 만졌을 정도로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바뀐 몸이 신기해서 계속 들여다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적사결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경우 몸이 바뀐 후 동경에 비친 무허의 얼굴만 보면 열불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천축유가신공을 얻지 못했다면 동경이라는 동경은 보이는 족족 박살냈을지도 몰랐다.
“별다른 건 없지요? 저희들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아무 단서도 못 찾았습니다.”
진무백이 동경을 만지작거리는 적사결을 보며 물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나오는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렇군. 이만 가지.”
빌어먹을.
불알 뗀 병신 새끼 때문에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마음 같아서는 가루가 된 놈을 되살린 후 골백번은 더 패 죽이고 싶었다.
* * *
“적운 님, 오셨습니까.”
적사결이 영안궁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반긴 이는 백리황이었다.
“너 왜 그렇게 표정이 좋냐?”
엽주평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천진난만한 새끼.
“좋은 일이 있으니까요. 헤헤.”
“뭐? 좋은 일?”
“어서 들어가시죠.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뭔데 그래? 뭔 일인데?”
“드디어 반선주 한 병을 얻었습니다.”
“뭐? 어떻게?”
반선주를 얻었다니.
엽주평을 놓치면서 풀 죽었던 적사결은 백리황의 어깨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사무련 놈들이 구해 왔습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죠.”
적사결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반선주라니.
가슴이 북받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콰앙.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장내에는 관련자들이 모여 있었다.
백류혼과 매양옥, 그리고 이천억과 악도겸이었다.
그리고 웬 중년인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반선주를 손에 넣었다고? 어디 있어?! 어디!”
적사결이 재촉하자 백류혼은 손에 든 자기 병을 내밀었다.
“체통을 지키시죠. 여기 있습니다.”
“니기미, 체통은. 이게 반선주야?”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효과를 눈으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냄새만으로는 그때 마셨던 반선주가 맞는 듯했다.
“써 봤어?”
“아직요. 교주께서 오시면 시험해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당장 해 보자.”
다시 반선주를 돌려주자 백류혼은 잔 두 개를 준비해 물을 채우고 반선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래도 되는 거야?”
“네. 한 방울이면 된답니다. 이 한 병이면 교주까지 포함해서 모두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백류혼은 잔을 매양옥과 악도겸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우상인 이천억의 몸을 되돌리기 전에 실험용으로 두 사람을 먼저 선택한 것이다.
“하…… 꼭 바꿔야겠소? 그대도 기녀로 살아가기 힘들 텐데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어떻소?”
악도겸이 매양옥을 설득하듯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내 몸 내놔욧!”
물론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였지만.
“그렇게 딱 잡아서 자르지 말고 생각을 좀 해 보고 말하시오.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빠지는 사람도 아니고 모아 놓은 돈도 꽤 많다오.”
악도겸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척거렸다.
“야. 닥치고 처마셔. 한 번만 더 아가리 털면 그 주둥아리 찢어서 털어 넣을 테니까.”
적사결의 으름장에 악도겸은 눈치를 보더니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고 매양옥도 단숨에 반선주를 마셨다.
“어때? 변화가 있어?”
적사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들 중 먼저 밝아진 얼굴은 매양옥이었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동경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내 얼굴. 내 몸이 맞아요. 드디어…… 드디어…….”
매양옥을 비추는 동경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항주의 보옥으로 불리는 절세미녀가 늙다리 노인네가 되었으니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악도겸은 반대로 불만 어린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악도겸이 고개를 돌릴 때였다.
뻐어억.
“커허억.”
적사결이 잠재 근력에 내공까지 실어 악도겸을 후려친 것이었다.
악도겸은 턱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위력에 정신이 혼미했다.
“새끼야, 표정 관리해라. 가해자 주제에 그런 좆같은 표정 또 지었다가는 면상을 갈아 버릴 테니까.”
“미…… 미안하오.”
악도겸은 하관을 감싸 쥐고 한쪽 구석에 찌그러졌다.
“야, 백리 애송이.”
“네.”
백리황이 다가오자 적사결은 잔을 쥐여 주고 물을 따라 주었다.
“본래 몸을 되찾는 기분이 어떠냐?”
“좋죠.”
“그게 다야?”
“마치…… 새로 태어나는 기분입니다. 다 적운 님 덕분입니다.”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몸을 빼앗긴 최악의 경험이었지만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천마신교의 교주와 어찌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백리황은 몸이 바뀌고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적사결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짜식. 알았으면 됐다.”
적사결은 피식 웃으며 반선주 한 방울을 물잔에 타 주었다.
반대쪽에서는 백류혼도 두 손으로 공손히 이천억에게 잔을 올리고 있었다.
“지랄한다. 백천악이 네놈 꼴을 봤으면 아마 복장이 터져 죽었을 거다.”
“신경 쓰지 마시죠. 교주의 복장이 터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 가해자 새끼를 네놈이 떠받드니까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 왜?”
“그래서 제가 대신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녀서 이거 가져왔잖아요. 이걸로 퉁 치시죠.”
백류혼은 들고 있던 자기 병을 그에게 휙 던졌다.
반선주의 마지막 남은 사용자는 이제 적사결이었으니까.
“조심해, 새끼야! 깨지면 어쩌려고!”
“십대고수가 그것도 못 받을 리 없잖아요.”
“그래도 새끼야,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잖아! 간 떨어질 뻔했네, 씨발.”
백만, 아니 천만에 하나도 없을 텐데.
백류혼은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팩 돌렸다.
“적운 님.”
적사결은 그 부름에 고개를 돌려 백리황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거지 노인네 모습이 아닌 젊은 백리황의 본신 말이다.
“후후, 보기 좋구나.”
“고맙습니다.”
적사결은 백리황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와 나의 인연은 다한 것 같으니 그만 백리세가로 돌아가거라.”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뭐…… 정마대전 정도 되는 전쟁이 벌어지면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때가 되면 한바탕 검을 섞어 보자꾸나. 그 천수…… 뭐라 했었지? 백 년 전, 그 양반 무공.”
“천수풍림검공입니다.”
“그래. 그걸 익히든 그것보다 뛰어난 무공을 익히든 내 강해진 너를 기대하고 있으마.”
“전쟁이 일어나길 빌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백리황은 싱긋 웃으며 포권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적운 님. 언젠가 당신께 한 칼 먹일 수 있는 무인이 되도록 절치부심하겠습니다.”
“오냐, 그런 패기 아주 좋구나.”
적사결은 백리황의 머리를 헝클이며 씨익 웃었다.
정식 사제지간이 아니라 잠깐의 가르침이었지만 그래도 녀석과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
마치 장성해 품을 떠나는 자식을 보는 느낌이 이러할까.
적사결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르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백리황이 그렇게 떠나고 적사결은 시선을 무릎을 꿇고 있는 중년인에게 돌렸다.
“이놈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