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02화>
“본 좌의 정체를 아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허 참.”
무허는 움켜쥐었던 아랫배를 털며 혀를 찼다.
“한데 네놈은 누구냐? 한가락하는 모양인데 별호가 있다면 대 보거라.”
백천악은 거만한 얼굴로 목을 뚜둑거리며 답했다.
“파황무존.”
“백천악?”
“뭘 두 번이나 묻나. 노망이라도 난 건가?”
“큭큭큭큭.”
무허는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큭큭. 이제야 알겠군. 이게 다 사무련과 하오문의 합작품이었다 이거지.”
“뭐 알아서 생각하게. 무슨 말이든 변명으로 들릴 테니까.”
백천악은 음모의 배후가 된 것 같아 심기가 거슬렸지만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기에 구태의연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역시 쓰레기들의 집합소인 사파야. 개중에 나은 놈들이 모인 사무련도 결국은 그 정도였던 게지. 나야말로 선수를 양보할 테니 와 보거라.”
무허가 손을 까딱거리며 이죽거렸다.
그때였다.
빠아아악.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일격.
무허는 또다시 공중회전을 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바닥으로 처박혔다.
‘뭐…… 뭐야!’
위력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하나 자신의 감지 범위를 뛰어넘어 깔끔하게 안면에 일격을 먹인 것이었다.
“뭐야, 와 보라기에 준비된 줄 알았더니 너무 깨끗하게 맞아 주잖아? 혹시 얼굴로 막았다거나 그런 말 하려는 건 아니지?”
백천악은 히죽 웃으며 빈정거렸다.
방금 한 수는 파황십결 중 환사결의 공능이었다.
눈에 익어도 피하기 쉽지 않은 것이 환사결.
처음 보는 무허로서는 일격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개쓰레기가!”
혈미륵신기의 붉은 마기가 소용돌이치며 들끓었다.
지금부터는 장난이 아닌 진검 승부였다.
“묵령. 소령을 데리고 물러나 있거라.”
“존명.”
묵령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은소령을 안고 거리를 벌렸다.
제대로 격돌이 시작되면 그 여파는 엄청날 것이기에 삼십 장 이상 물러난 묵령이었다.
“이봐, 취불. 싸우기 전에 한 가지만 묻지.”
백천악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광혈존의 몸을 빼앗은 이유가 무엇이냐? 조금이라도 젊어지고 싶었나? 아니면 놈을 이기지 못하겠으니 몸이라도 빼앗은 건가?”
무허는 혈광을 뿌리며 답했다.
“흥! 본 좌는 단 한 번도 놈에게 밀린 적이 없었다. 젊음? 그것을 얻고자 했다면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선택했겠지!”
“하면 이유가 뭐지? 왜 불제자였던 당신이 마교의 주구인 놈과 몸을 바꾼 것이냐?”
“교화. 본 좌는 마구니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이 한 몸 희생해 마교에 들어간 것이다.”
“뭐라? 교화? 희생?”
백천악은 흉신악살 같은 무허의 얼굴과 피떡이 된 채 죽은 젊은 놈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스스로의 모습이 어떤지 모르는 건가? 그 누구보다 악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또, 또 개소리 지껄이는구나. 본 좌가 그리 우스워 보였더냐.”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네. 본 좌라니? 당신이 불제자로서 본분을 자각하고 있다면 빈승이라느니 노납이라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 어딘가 고장 났군.”
그 말에 무허의 눈가가 잠시 씰룩였지만 그뿐이었다.
“말장난은 이것으로 끝이다!”
후와아악.
붉은빛의 호신강기를 두른 무허가 전면으로 치달았다.
백천악도 푸른빛의 호신강기를 발하며 그 앞을 막아섰다.
꽈아아아앙.
* * *
“응?”
적사결은 서쪽을 바라보며 이상한 느낌에 흠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백류혼은 그가 대화 중에 다른 곳을 보자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적사결은 그럼에도 서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지, 이 묵직한 느낌은?’
떡을 먹다 체한 것도 아닌데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찝찝했다.
‘설마 본 교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러고 보니 일월에게서 연락이 온 지 몇 달이 넘었다.
가장 뛰어난 적월이니 무슨 일이야 있겠냐마는 불현듯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 지금으로서는 황궁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
적사결은 구양 장로와 수하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 봐. 아까 뭐라고 했지?”
백류혼은 집중하지 못하다 다시 설명하라는 적사결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하오문의 움직임을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엽주평도 함께냐?”
“아니요. 그의 행적은 없었습니다. 매양옥의 말로는 정보 교환을 위한 평범한 움직임이 아닌, 하오문 요직의 인물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으니 어쩌면 하오문주일지도 모릅니다.”
하오문도인 매양옥.
그녀가 하오문 수뇌부의 행적을 잡은 것이었다.
절강지부 소속인 그녀가 명령 체계가 다른 하북지부의 움직임을 잡은 것은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문도였는지 말해 주는 단초였다.
“하오문주는 아닐 거야. 매양옥이 지부장급도 아니고 일개 문도일 뿐인데, 걔한테 꼬리를 밟혀서는 천하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인 하오문 문주의 행보라 할 수 없지.”
“그것도 그렇군요. 하나 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니 확인할 필요는 있을 듯합니다.”
“그럼 매양옥을 데리고 네가 가 봐. 본 좌는 여기서 엽주평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죠.”
백류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적사결은 턱을 괴고 있다 말했다.
“삼월아, 사월아.”
그 순간 바닥에서 두 사람이 솟아오르며 부복했다.
“네, 교주님.”
“하명하십시오.”
적사결은 아직 펴지지 않은 미간을 보인 채 말했다.
“본 교의 일월에게 접선해 무슨 일이 없는지 한번 알아보거라.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구나.”
“예.”
“그리고 흑사광, 그의 소재를 좀 찾아보거라.”
“마령존 말씀이십니까? 그분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느라 위치 파악에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으니 한번 알아봐.”
“존명.”
적사결은 고개를 잘게 끄덕였고 삼월과 사월은 바닥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되자 한숨만 계속 나왔다.
계속해서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찝찝하구나. 더럽게 찝찝해.’
마치 자신이 찜해 놓은 사냥감을 누군가가 먼저 건드린 기분이랄까.
적사결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 * *
“크웩. 커어억.”
무허는 연신 피를 토하며 뒤틀린 기혈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것은 백천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르륵.
입가에 핏줄기가 흘렀다.
무허처럼 각혈하지 않는 것은 요상결 덕분이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내상을 다스리는 공능 덕분에 회복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광혈존 녀석의 몸을 얻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저만한 무위를 보이다니…….’
아무리 절대 고수에 서로 호적수인 사이였다지만 결국 남의 몸이다.
한데 무허는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마기를 익힌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녀석과 결판을 내지 못했으니 여기서 놈의 몸을 박살낼 수는 없는데…….’
무리하면 죽일 수 있다는 판단은 들었다.
종이 한 장 차이지만 분명 승기는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하나 적사결이 몸을 되찾은 후의 승부를 생각하면 놈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갚아야 할 빚은 자신의 마음 깊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봐, 미친 중늙은이. 이만하면 누가 더 센지 알겠지? 이번 한 번만 살려 줄 테니까 다음에는 단단히 준비해서 와라. 그때는 이번처럼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백천악의 말에 무허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태어나 이런 모욕감과 굴욕은 처음이었다.
하나 그의 말대로 지금으로서는 놈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천령마기 때문에 심력과 내력만 소진되지 않았다면…… 크윽.’
소청이 사용했던 천령마기를 극복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기력을 쓴 탓이 컸다.
더구나 고금삼대무공에 속하는 파황십결의 위력도 상상 이상이었다.
하나 다음이라면.
다음 기회라면 혈미륵신공을 대성해 완전무결한 준비로 놈을 상대할 수 있을 터.
그리만 된다면 이번에 받은 굴욕을 되갚아 줄 수 있으리라.
“다음엔 본 좌가 반드시 네놈의 목을 비틀어 줄 것이다. 그때까지 그 목 잘 간수하고 있거라.”
무허는 그 말을 끝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주제에 으르렁거리긴.”
백천악은 입안에 남은 핏물을 뱉어 내고 묵령과 은소령이 있는 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은소령은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소. 누구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니.”
“노백을 찾아가셨던 건가요?”
“그랬었지.”
“찾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그대가 친 사고가 꽤 크잖소. 수습하려면 당사자를 만나야 되니 노백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지. 한데 놀랐소. 하오문의 문주가 그대였다니…….”
백천악은 슬픈 눈으로 은소령을 바라보았다.
“왜요? 비루했던 첫사랑이 출세해서 배가 아프신가요?”
“비루하다고 생각한 적 없소. 배 아프지도 않고.”
“아프길 바랐는데 아쉽군요.”
“아직도 그때 일이 한으로 남은 것이오?”
“버림받았으니까요.”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소.”
“알아요. 사무련의 련주라는 자리는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앉을 가치가 있으니까요.”
자신을 버리고, 사무련의 기틀을 다졌던 여섯 가문 중 하나인 장령곡주의 수양딸과 혼례를 올린 백천악이었다.
하나 은소령은 당시 일개 하오문도일 뿐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그를 이해했었다.
수많은 암투와 이권, 이해관계가 얽힌 당시의 상황에서는 장령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피를 덜 흘리는 방법이었으니까.
“혹시 장령곡의 역모를 알린 것도 그대가 한 일이오?”
흑야귀령대의 공으로 되어 있었지만 당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고 불현듯 그것이 떠오른 백천악이었다.
그 사건 당시 자신의 손으로 아내를 죽였기 때문에.
“맞아요. 하오문은 사무련을 위한 집단. 사무련이 둘로 쪼개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죠.”
“그랬었군…….”
하오문이 개입했다면 더 이른 시기에 역모의 준동을 알 수 있었을 터.
하나 자신이 파악한 그 시기가 참으로 묘했었다.
조금만 빨랐다면 주동자를 처벌하고 끝났을 것을, 장령곡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관계자 모두를 단죄하는 큰 사건으로 번진 것이었다.
“당시 련주의 냉혹함을 모든 사파인에게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절대권력은 얻지 못하셨을 거예요.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하지 않소. 단지 안타까울 뿐이지. 그 일로 류혼이와 수연이에게 몹쓸 상처를 남겼으니까.”
어미를 죽인 아비가 되어 버린 것.
백천악은 그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그 자리는 그런 자리예요. 알고 있으셨잖아요?”
연인을 버리고 혈육을 버리고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자리.
사파의 하늘은 그래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린 련주께 천하를 드리고 싶었어요. 또한 제 연심을 드리지 못했으니 이 나라를 드리고 싶었어요.”
은소령은 격앙된 목소리로 따지듯이 백천악에게 말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악은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때였다.
까득.
부럼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은소령은 검은 피를 토했다.
“커헉. 컥.”
“소령!”
백천악은 화들짝 놀라며 은소령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내기를 불어넣었다.
“소용, 커흑. 없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요상결의 공능을 넘어설 정도로 지독한 극독을 먹은 것이었다.
“왜…… 왜 그런 거요?!”
“하오, 문주는 정체를 들키면…… 죽어야 하니까…… 쿨럭.”
“그런…….”
“그것이…… 그림자의 수장으로 살아가는…… 저의 운명…… 이에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헉. 헉.”
은소령은 눈 밑이 까맣게 변하며 죽음의 기운이 얼굴에 떠올랐다.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랐어요. 나를 다시 받아 달란 말이 나올 것 같아서…….’
하나 피부는 옅은 빛을 띠며 생기를 발하고 있었다.
회광반조였다.
‘욕심이 나는군요…… 당신의 앞길을 막더라도 옆에 있고 싶은…… 하나 그래선 안 되겠죠.’
은소령은 자신의 욕망이 백천악의 앞길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독단을 깨문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련주께서는 진정 천마신교와 황실을 손에 넣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 물음에 백천악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필요 없소. 당신을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자식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지킨 이 자리요. 내 삶에 한 가지 보람을 남긴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무림을 일통시키는 것. 그것뿐일 것이오.”
은소령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답네요. 그렇다면 하오문주로서 그 결정을…… 윽!”
“소령!”
그 순간 회광반조의 빛이 사라지며 은소령은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허억. 허억. 교주의 자리는 실패했지만…… 황제에 대한 계획은 진행되고 있어요. 헉. 헉…… 엽주평…… 그는 황제와 몸을 바꾸는…… 허억…… 허억…… 것이 아닌…… 암살이 목표…… 헉…… 헉…… 막아…….”
툭.
고개를 떨구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백천악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십 수 년 만에 만난 첫사랑과의 만남은 지독하게 아팠지만 한편으론 손에 닿은 신기루가 사라지듯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백천악은 은소령의 뺨에 닿은 손을 한참 동안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