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98화>
“예? 황궁 서고요?”
진무백은 황당한 얼굴로 적사결에게 되물었다.
“그래. 황궁 서고.”
“거긴 갑자기 왜요?”
“왜긴 심심해서 독서 좀 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해?”
“황궁 서고가 무슨 동네 서책방입니까?”
진무백이 불퉁하게 말하자 적사결은 짜증을 부렸다.
“야. 엽주평 소재 확인됐어?”
“아…… 아니요.”
“천룡심법에 대한 보고는?”
“아직 천호들께서 분석 중이라 지휘사께는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황제 암살에 대한 정보를 준 지가 언젠데 그깟 놈 어디 있는지 아직 확인을 못 해? 그리고 심법 하나 분석하는데 며칠이나 걸리는 거야? 누가 알면 무슨 개세의 신공절학이라도 얻은 줄 알겠어?”
빈정대는 말에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하나 진무백은 공주의 지엄한 명이 있었기에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됐고. 가서 백호 양반 오라 그래.”
“네?”
“넌 말이 안 통하니까 상관 불러오라니까. 아니면 그냥 공주한테 직접 말할까?”
“……끄응.”
황궁 비고도 아니고 책만 가득한 서고였다.
대단한 비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록을 비롯해 중요한 기록물은 별도의 장소에 보관하니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을 터였다.
“무림에 관련된 책자로 한정한다면 금의위의 권한으로 가능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우리가 무림인이지 유생이냐? 다른 걸 왜 봐?”
적사결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진무백을 바라보았다.
“알…… 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진무백은 열이 뻗쳤지만 ‘참을 인’자를 삼킨 후 적사결과 악도겸을 안내했다.
황궁 서고로 향하던 중 적사결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진가 애송아.”
“말씀하십시오.”
“넌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속이 좁냐?”
“또 뭐가 말입니까?”
“비록 시작이 좋지 않았지만 공주가 다 없던 일로 했는데 왜 그렇게 꽁해 있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호위 무사가 눈앞에서 그런 꼴을 보았는데 그걸 다 잊으라는 말입니까?”
“그건 네가 약해서 그런 거 아닌가? 호위 무사가 약해서 제대로 호위를 못했는데 누구 탓을 하는 거냐?”
“…….”
진무백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약하다는 건 원래 그런 거야. 억울하면 강해져. 제법 재능은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적사결이 낄낄거리며 말하자 악도겸이 옆에서 혀를 찼다.
“그대도 참 짓궂으시오.”
“뭐가?”
“가르침을 내리고 싶으면 그냥 내리면 될 것을. 그렇게 꼭 상대를 자극해야겠소?”
“약해 빠진 놈이 자존심만 세잖아. 원래 저런 놈들은 자존심 꺾기 전에는 발전이 없는 법이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진무백은 갑자기 뒤돌아서며 소리쳤다.
“누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내린단 말입니까? 난 그런 가르침 필요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소! 제발 조용히 하고 가던 길이나 가시죠!”
악도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도 참 딱하군. 기연을 눈앞에 두고 걷어차다니 말이야.”
“기연이라니?”
“눈앞에 있잖나. 어디 천고의 영약만 기연인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에게 받는 가르침은 그보다 더한 기연이지.”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 저자가 말이오?”
악도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하! 저 나이에 그만한 고수라? 천하십대고수가 다 얼어 죽었나 보오?”
“그들이 얼어 죽지 않으면 직접 다 죽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고수지. 자네는 속이 좁아 못 보는 모양이지만. 하하하.”
악도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적사결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마치 황궁 서고에 데려가 줘서 고맙다는 듯한 눈인사였다.
“진가 애송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저 변태 새끼 말은 귓등으로 흘려 듣거라. 네놈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적사결은 악도겸을 무시하고 진무백에게 충고했다.
“그래서 당신이 천하십대고수도 죽일 수 있는 고수다, 이 말입니까?”
“그게 뭐 중요한가? 중요한 건 본좌가 너보다 백만 배 정도는 강하다는 거지. 흐흐.”
적사결이 이죽거리며 말하자 진무백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나한테 가르침을 내리고 싶은 거요? 왜? 내가 당신을 고깝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본 좌는 누구처럼 속이 좁지 않거든. 그리고 너,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지 않느냐.”
진정으로 강해지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정파든 사파는 불문하고 가르침을 내린다.
적사결은 정파의 후기지수인 백리황도 그런 마음으로 가르쳤다.
“…….”
진무백은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강한 것도 사실이고 자신이 강해지고 싶은 것도 진심이니 고려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나 당장은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자금성의 넓은 성내를 돌고 돌아 한 식경.
그들은 드디어 황궁 서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악도겸은 신이 나서 각종 서책을 뒤적거렸고 적사결은 뒷짐을 진 채 묵향과 종이 냄새를 맡으며 서고를 거닐었다.
‘규모만큼은 장경각 이상이구나.’
무림에 관련된 책자만 그 정도였으니 천하 각지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서책들까지 합하면 그 양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다만 보관 중인 비급들은 한눈에 보아도 삼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적사결은 무공에 관한 책장을 지나치며 물었다.
“진가 애송아. 혹시 술법에 관한 서책도 있느냐?”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안내하거라.”
그렇게 찾은 책장에는 각종 술법서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적사결은 이혼대법이나 연금술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회족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추었다.
‘있구나, 연금술.’
하나 내용은 백리세가에서 들었던 그대로였다.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천사도의 자료와 동일한 것이, 아마도 같은 자료임이 분명했다.
도술에 관심이 많은 황제 때문에 도가의 일맥인 천사도도 많은 서책을 보낸 모양이었다.
“별로 도움되는 건 없군.”
적사결은 책자를 놓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진무백이 웬 호리호리한 놈과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았다.
‘환관? 혹시 동창인가?’
금의위 소속을 아랑곳하지 않고 꾸짖는 듯한 언행.
그럼에도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는 진무백.
적사결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몇 차례 떠들던 환관은 진무백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적사결은 다가오는 놈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놈…… 강하다. 황궁에 이런 고수가 있었나?’
총총 걷는 발걸음은 얼핏 경박해 보일 수 있으나 가볍기가 깃털 같았다.
처진 듯 흐느적거리는 어깨는 힘없어 보이나 언제든 대처 가능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대한 숨긴 듯하나 적사결의 눈에는 보였다.
수풀 속에 엎드린 이무기를 말이다.
“공주님께서 초빙한 손님 중 한 분입니까?”
“……?”
“운 좋은 줄 아세요. 그분이 황상의 총애를 받는 분이 아니었다면 황궁의 문턱을 넘은 즉시 두 발목이 잘렸을 테니까.”
환관은 붉은 입술을 할짝이며 적사결을 지나쳐 갔다.
그 눈빛은 탐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반짝이고 있었다.
‘입술은 왜 핥지? 어우, 재수 없는 변태 새끼들.’
적사결은 인상을 찌푸리며 진무백에게 다가가 등을 툭 쳤다.
“야, 저 자식 뭐냐?”
“동창…… 첩형입니다. 여공공이라고…….”
“재수 없는 새끼지?”
“예. 황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놈입니다.”
“으…… 불알 뗀 변태 새끼가 입술까지 핥으니까 소름이 돋는구먼.”
적사결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진무백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뭘 했다고요? 입술을 핥아요?”
“그래. 왜? 너보고도 핥았어?”
“끄응…….”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설마 그거 좋다는 표현인 거야? 그런 거야?”
적사결은 진심으로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다는…… 표현이죠.”
“아 씨발! 아윽, 토 쏠려! 카악! 퉤!”
“근데 그게 너무 좋아서 죽이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엥?”
“저 사람이 입술을 핥은 대상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요. 저자가 저렇게 보여도 황궁최고수라는 평을 듣는 사람입니다.”
진무백의 말에 적사결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표현은 달라도 마음은 같은 건가. 큭큭.”
적사결도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적개심과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천하십대고수에 속한 놈들 외에 이런 감정을 가지게 해 준 놈들이 있었던가.
적사결은 매일 똑같은 밥만 먹다가 특이한 요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저나 다른 위사들과 행동을 함께하십시오. 금의위와 같이 있으면 섣불리 손을 쓰진 못할 겁니다.”
“그놈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한 주제에.”
“휴우…… 실력이 부족한 것과 다르지요. 귀하는 공주님의 초대를 받아 입궁했고 금의위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명분이 없다면 동창제독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으니까요.”
“너 신입 위사라더니 아직 순진하구나?”
“네?”
“아니다. 됐다. 알았으니까 악가 놈에게나 가 보자.”
적사결은 히죽거리며 악도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저런 류의 개새끼들은 죽이고 싶은 걸 못 참지. 황제의 귀빈이라도 손을 쓸 텐데 황녀의 손님은 말할 것도 없겠지.’
여공공이라는 놈은 분명히 암수를 뻗쳐 올 터.
적사결은 그때를 즐겁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악도겸에게 다가가니 아직까지 서책을 탐독 중이었다.
원하는 자료를 찾지 못한 듯 보였다.
“진가 애송아. 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기다려야겠다. 배고픈데 밥 좀 시켜라.”
“지금 황궁 서고에서 밥을 먹겠다는 말입니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배고프면 먹어야지 굶어? 왜? 여기서 밥 먹으면 안 된다는 국법이라도 있어?”
상식적으로 황궁 서고에서 밥을 먹겠다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진무백은 없는 걸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대답하고 밥을 대령하기도 애매했다.
“어휴, 이 끗발 없는 놈. 진수성찬은 기대도 안 하니까 가서 주먹밥이나 몇 덩이 가져와.”
“……네.”
그 정도라면 가능하다는 생각에 진무백은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까 그자 보았지요?”
여공공은 뒤를 따르던 환관에게 물었다.
“네. 연배에 비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가서 알아보세요. 그자가 누구인지, 왜 공주님께서 황궁에 초빙한 것인지. 되도록 자세히.”
여공공의 입술 핥기를 보았기에 환관은 더 묻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그 모습을 보인 대상은 설사 황족이라도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족을 죽인 적은 없지만.
“오랜만에 아주 멋진 만찬을 즐길 수 있겠어. 히히.”
여공공은 양팔을 감싸 쥐며 부들거렸다.
천하를 굽어보는 듯 오만한 눈빛.
자연체에 가까운 움직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극한으로 단련된 완벽한 신체.
그럼에도 내기는 완전히 갈무리되어 자신의 감각으로도 기운 한 톨 느낄 수 없었다.
마주한 순간 등줄기를 짜릿하게 훑어 오르던 떨림.
여공공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자라면 다시 한번 그 느낌을 느낄 수 있겠지. 나약하고 벌레같이 하찮은 황궁의 무인들과는 다르니까.”
황궁최고수라 불리지만 자신에게 이곳은 너무 좁았다.
하나 환관이라는 굴레를 쓴 이상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곳이 황궁.
여공공은 그 답답함을 삐뚤어진 살심으로 풀고 있었다.
“어쩌면 너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여공공은 한 쪽에 세워져 있는 창으로 다가가 중얼거렸다.
삼 년 전, 사마오대존의 일인이자 천하제일창으로 불렸던 무인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아, 기대된다.”
여공공은 창을 볼에 부비적거리며 입술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