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97화>
‘저런 괴물들은 또 언제 키운 거지?’
백류혼은 이두한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반려 영물인 붕아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뇌조였다.
그런 놈이 네 마리 원숭이들에게 뜯어 먹히는 것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한 마리면 몰라도 네 마리가 떼로 달려들면 붕아라도 무리겠는걸.’
무려 이백 년을 살아온 화식조라지만, 저들과 싸웠다간 뇌조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지닌 기운이 적어도 절정 고수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백가 애송이. 넌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없냐?”
이두한백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류혼의 뒤통수를 갈기며 적사결이 말했다.
청령은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며 경고했다.
“아무리 교주라도 도련님께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내 경고하겠소.”
“경고는 새끼야, 힘 있는 놈이 하는 거고. 나보고 백천악도 아니고 그 아들내미 눈치를 보라는 거냐? 꼬우면 덤벼 보든가.”
“…….”
청령은 입술을 깨물며 단창을 꾹 쥐었다.
“그만해, 청령. 우릴 구해 준 건 사실이니까.”
창궁검제와 뇌조 때문에 자신들의 힘으로는 탈출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교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
백류혼은 포권하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교주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덕분? 곤욕? 애늙은이냐? 고맙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
백류혼은 똥 씹은 표정으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뗐다.
“고…… 고맙습니다.”
“예의 깍듯이 지켜라, 코흘리개 애송아. 노인네 말투 또 따라 하면 이빨을 다 뽑아 버릴 테니까.”
백류혼은 당장에 창을 던지려는 청령을 만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월아.”
“예, 주군.”
“먼저 가서 얘기 좀 해 놓거라. 손님들 곧 가니까 준비하라고 말이다.”
자금성 내에 위치한 영안궁에서 기거해야 하니 삼월을 먼저 보내는 것이었다.
적사결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이, 있는 집 자식. 자금성에서 묵을 건데 괜찮지? 좀 비싸도 이해하라고.”
자금성을 객잔 삼아 한몫 단단히 챙길 요량이었다.
적사결은 두둑한 주머니를 상상하니 웃음만 나왔다.
* * *
“이……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팽도극은 들것에 실려 온 남궁건을 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님…….”
팽천기는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입을 뗐다.
바싹 마른 입술과 핼쑥한 얼굴, 앞섶 사이로 드러난 피부 위가 거멓게 죽은 걸로 보아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다.
“됐다. 너는 가서 치료나 받거라. 운아.”
“네.”
“남궁가주도 약전으로 옮겨 극진히 돌보거라. 그가 본가에서 죽어선 안 되느니라.”
“알겠습니다.”
팽도극은 무호십객의 일인 이극을 향해 눈짓하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극은 침중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거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남궁건이 저 꼴이 되었단 말인가.
자신이 알기로 그 자리에는 사무련의 후계자와 아들인 팽천기를 비롯한 철갑기린대, 그리고 남궁건과 창궁검대가 있었다.
설사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합한다 해도 남궁건 하나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신진 고수가 있었습니다.”
이극은 그 말을 시작으로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팽천기와 백류혼의 대결과, 이후에 등장한 남궁건. 그리고 때를 맞춰 나타난 신진 고수가 남궁건을 패퇴시키고 네 마리 거대 원숭이들에게 처참하게 무너진 창궁검대까지.
설명을 들은 팽도극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천기는 그렇다 쳐도. 소림 출신으로 보이는 젊은 놈이 검제를 이겨? 더구나 병장기를 쓰는 괴물 원숭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 젊은 놈이 어미 배 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어도 검제를 이길 순 없다.
아무리 미친 재능일지라도 시간의 벽이란 그만큼 두터운 것이었으니까.
더구나 무기를 쓰는 원숭이?
영물이라도 한낱 짐승이다.
그런 놈들이 남궁가의 최정예라는 창궁검수들을 썰어 버렸다는 것은 믿기 힘든 말이었다.
“가주님,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극은 팽도극의 심중을 짐작하기에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했다.
“허…….”
팽도극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허탈한 심정을 내비쳤다.
일생의 경쟁자로 여겼던 남궁건의 몰골을 상상하니 한숨이 나온 것이다.
무패가도를 달리던 녀석이 알려진 자도 아닌 무명의 신진 고수에게 패배한 작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한참 한숨을 내뱉는 순간 누군가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극과 함께 무호십객의 일인인 산홍이었다.
“자네는 무슨 일인가?”
“놈들의 뒤를 밟고 오는 길입니다.”
“놈들? 어느 쪽 말인가?”
“남궁가주를 쓰러뜨린 놈과 사무련의 후계자 일행 모두입니다. 그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뭐라? 하면 그 신진 고수가 사파 놈이라는 말인가?”
“그것까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시에 나타나 후계자 놈을 구했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으니 유력하다고 생각됩니다.”
사무련의 새로운 초고수라니.
팽도극은 사무련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저력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데 가주님. 그들이 심상치 않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어디기에 그런 말인가?”
“황궁입니다. 해서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황궁이라…….”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또 무엇인가?”
“사무련과 관계가 있는 곳은 동창인데 놈들을 안내한 자는 금의위 위사였습니다.”
“하면 놈들이 금의위까지 마수를 뻗힌 것이로군…….”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아무리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라 하나 의천맹은 금의위와, 사무련은 동창과 밀약이 있었다.
한데 사무련이 금의위에 손을 뻗었다면 의천맹의 일원으로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지급으로 서신을 보내거라. 아무래도 금의위 지휘사를 만나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 * *
적사결은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앞에는 음치 악도겸, 정확히는 매양옥의 아름다운 몸을 지닌 악도겸이 있었다.
“대뜸 독대를 청하더니 한다는 말이 뭐? 황궁 서고에 가 보고 싶다고?”
“그렇소. 내 언제 이렇게 황궁을 와 보겠소?”
“본 좌가 무슨 안내꾼인지 아느냐. 네놈 구경하고 싶은 곳 구경시켜 주게.”
“교주는 궁금하지 않소? 황궁 서고 말이오.”
“전혀.”
소림을 제외하고 과거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의 전각들도 한 번쯤은 털었던 천마신교였다.
아니, 자신이 얼마 전 장경각에 들어 칠십이종절예의 필사본을 빼돌렸으니 오대세가를 제외하고 유서 깊은 문파들은 다 털어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무학의 보고가 본 교에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 황궁 서고에 가 본단 말인가.
“그리 매정하게 딱 자르지 마시오. 내 듣기에 황궁 서고에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무림을 분석한 자료들이 많다 들었소. 교주도 봐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니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소?”
“객관적 시각? 흐음…….”
적사결은 그 말에 불현듯 잠허자를 떠올렸다.
독특한 시각으로 단전을 조사했던 잠허자 육서성.
그와 나눈 대담 덕분에 적사결은 금단의 실마리를 잡았고 보리연화공에 의한 구토 증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교주는 공주와도 친분이 깊고 금의위 위사들과도 돈독하지 않소? 그러지 말고 한번 가 봅시다.”
“네놈은 왜 황궁 서고에 가 보려 하는 것이지? 그저 호기심 때문은 아닌 듯한데.”
어딘지 모를 절박함도 느껴지는 악도겸이었다.
“실은 내 예전부터 궁금한 점이 있었으나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황궁의 분석 자료에만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오.”
“일단 읊어 봐. 들어 보고 판단하지.”
잠시 고민하던 악도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음공이란 분야를 개척한 것은 알고 있소?”
“물론. 그 헛짓거리를 모르는 무림인도 있을까.”
노래나 연주를 통해 상대의 심혼을 뒤흔드는 수법.
음파에 기의 파동을 더하는 기예로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한 공부였다.
그 장점은 소리가 미치는 모든 대상, 즉, 개인 한 명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대량 살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다만 단점이라면, 자신보다 내공 수위가 낮은 자에게만 통하기에 양민학살무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분야가 음공이었다.
강한 자를 넘어서기 위해 내공을 키우고 기예를 익히고 심신을 닦는 것이 무공인데 음공은 그 반대인 것이다.
하니 패도를 추구하는 마인들에게 음공은 특히나 천대받는 분야였다.
“한 사람이 인생을 걸고 추구하는 길을 헛짓거리 취급하는 곳은 당신들밖에 없을 거요. 항상 그렇게 직설적이니 마인들이 배척받는다 여기진 않으시오?”
“우린 적어도 정파 새끼들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르지도 않고 뒤통수도 안 쳐. 네놈은 그렇게 잘나서 한 여자의 인생을 빼앗아 그 가죽을 뒤집어썼냐? 지랄도 가지가지구나.”
“끙…….”
악도겸은 대꾸할 말이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음공이 뭐?”
적사결이 재촉하자 악도겸은 짧게 혀를 차곤 말했다.
“내 처음 음공에 관심을 둔 것은 사자후 때문이었소. 굉장히 신기했지. 내공을 싣는 것은 기공술뿐인 줄 알았는데 소리에 공력을 실을 수 있다니. 한데 알고 보니 그게 너무 쉽더군. 그저 내공을 목구멍까지 잔뜩 끌어올려 소리치면 되는 거였으니까. 잘만 발전시킨다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소.”
악도겸은 자신의 관심사를 얘기하기 때문인지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한데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니 음공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생각이 들었소. 교주도 들어는 보았을 것이오. 전음이라고. 과거에는 이 전음도 전음입밀, 육합전성, 어기전성 등 다양한 수법이 있었던 것을 기록에서 본 적이 있소.”
“우화등선처럼 허황된 얘기 중 한 가지잖아. 그걸 믿는 건가?”
음파에 공력을 실어 원하는 대상에게만 말을 전하는 기예라니.
그 정도로 내공을 세밀하게 조율하려면 절대 고수 할아비가 오더라도 무리다.
“여러 사료를 읽어 보고 확인한 사안이오. 평범한 무인들은 불가능했지만 과거의 절대 고수들은 그런 음공들이 가능했었소.”
“한데 그 기예들이 왜 전수되지 않고 사라진 거지? 원하는 놈에게 귓속말을 하는 게 집단전에서 얼마나 유용한데.”
적사결이 비웃듯이 말하자 악도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들에겐 너무 쉬웠으니까. 당시의 절대 고수들에게는 그대가 무형기를 사용하듯 자연스러웠을 거요. 알려 줄 수도 없지만 알려 주지 않아도 그들의 경지에 이르면 사용할 수 있으니 따로 비급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않았고 말이오.”
“…….”
악도겸의 말대로였다.
허공섭물을 비롯한 무형기의 기예.
자신을 비롯한 지금의 절대 고수들은 무형기를 따로 배운 것이 아니라 그저 깨우쳤을 뿐이었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깨달음이니 비전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음공에 국한했을 뿐이지만 어쩌면 점차 무인들의 수준은 퇴보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몇 십 년에 걸쳐 아주 조금씩 말이오.”
“한마디로 무림의 역사를 짚어 보고 싶다는 말이군.”
“바로 그렇소.”
황실에는 사학이란 공부가 있다.
대표적으로 실록이라 하여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사관이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는 것이다.
기록의 근본이 사학이니 황궁 서고에 무림에 관한 기록물이 있다면 역사서도 분명 있을 터.
반면 무림은 무공에 대한 개념이나 관련 기록은 뛰어날지언정 넓은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분석할 정도로 깊이 있는 사학자들은 배출하지 못했다.
사학 자체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자료를 쌓아 나가야 하기에 국가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소림도 마찬가지였다.
‘재밌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