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88화>
스슥.
한 발을 옮기며 황녀의 검을 막아선 자는 왕욱이었다.
마치 목숨을 걸고 막는 듯한 모습.
하나 거리가 있었던 덕분에 황녀의 검은 왕욱의 지척에서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왕욱,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서슬 퍼런 기세를 두른 그녀의 검은 당장에라도 왕욱의 심장을 꿰뚫을 듯했다.
“공주님, 궁내에서 직접 손을 쓰신다면 신하들의 지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판결을 해 주시면 처벌은 저희 위사들이 하겠습니다.”
황족이라도 황궁에서 함부로 칼을 휘두를 수는 없다.
황궁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물.
그 소유물을 파괴할 권리는 오직 황제의 검이라 할 수 있는 자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금의위는 그들 중 하나였다.
“알았어. 판결을 내리지. 사형, 즉참, 뭐든 바로 죽여!”
주녹정이 눈에서 불을 뿜으며 말하자 왕욱은 고개를 저었다.
“판결은 지은 죄에 대한 죄목이 있어야 하며 죄인에게 그에 대한 소명을 할 권리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합리적인 판결이 진행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보고 판관 짓거리를 하라는 거야? 내가 판관이야? 나 영안공주 주녹정이야! 황제의 딸!”
“공주님이라도 황궁에서 아무 이유 없이 피를 보실 수는 없습니다. 여긴 그때의 소림이 아닌 황궁입니다. 부디 황궁의 법도를 지켜 주십시오, 공주님.”
“야! 왕욱!”
주녹정은 분노로 쥐고 있는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나 한 가닥 남은 이성을 뿌리치고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저놈에게 볼기를 맞았다고 얘기해야 하나…….’
수치심까지 더해지자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하나 고지식한 왕욱의 간언대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 아바마마의 총애를 잃을지도 몰랐다.
황자와 달리 황녀는 외척으로 분류되기에 정치적으로 큰 힘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의 총애까지 잃은 황녀는 고관대작들이 뜯어먹기 딱 좋은 먹잇감이다.
“다들 물러가고 왕욱과 진무백만 남아.”
주녹정이 그리 말하며 소앵에게 눈짓했다.
척하면 척인 듯 그 뜻을 알아챈 소앵은 궁녀들을 물리고 주변을 폐쇄해 주었다.
적사결까지 넷만 남게 되자 주녹정은 들고 있던 검을 진무백에게 건넸다.
“판결이 끝나면 네 손으로 놈의 목숨을 거두거라. 내 호위 무사로서 내리는 마지막 임무이니라.”
“예, 공주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진무백은 두 손으로 검을 받으며 숙연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검에는 놈을 죽이고 너도 죽으라는 자진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놈의 죄목은…….”
주녹정이 죄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이었다.
“잠깐.”
적사결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본 황녀의 말을 끊어?!”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백하겠습니다.”
“뭐…… 뭐?”
주녹정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 없이 깔끔하게 모욕죄든 불경죄든 시인하겠다 말했습니다.”
“무슨 속셈이냐!”
“황궁까지 왔는데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저 공주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어 그러니 독대를 허락해 주십시오. 하면 무슨 죄든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 말에 진무백이 검첨을 겨누며 소리쳤다.
“네 이놈! 독대라니! 네놈같이 흉악한 놈과 공주님을 함께 놔둘 것 같으냐!”
“그리 걱정되면 사지근맥이라도 자르시지요.”
“뭐…… 뭐?”
이번엔 진무백도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적사결은 두 손목을 보이며 자르라는 듯 내밀었다.
진무백은 왕욱과 주녹정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잘라.”
“공주님.”
“죽이는 것도 아니잖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너도 위충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주녹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왕욱은 입을 꾹 닫았다.
그간 중원을 떠돌며 본 위에서 받은 정보 중에는 천호 위충의 낙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관무도회의 결과보고서에 주녹정이 끼어들어 개판을 쳤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무백. 잘라.”
“충.”
명이 떨어지자마자 잘 벼린 보검이 궤적을 남기며 사지근맥을 잘라 냈다.
단단한 힘줄이 잘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보검은 서늘한 예기를 뽐내었다.
털썩.
발목 힘줄이 잘린 적사결은 그대로 주저앉아 주녹정을 올려다보았다.
“흥, 이제야 좀 속이 풀리구나.”
주녹정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두 위사들에게 눈짓했다.
왕욱과 진무백은 짧게 읍한 후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자, 말해 보거라. 보여 줄 게 뭐지?”
“노납의 진짜 모습이지요. 허허허.”
스스스스.
탄력이 넘치던 십 대 소년의 피부가 메마른 논바닥처럼 변해 갔다.
풍성하던 머리카락도 빠져서 바닥에 흘러내렸고 좁쌀영감 같은 수염이 자라며 드러난 얼굴은 인생을 다 보낸 노인의 외모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주녹정도 아는 얼굴이었다.
“무허대사?!”
분명 소림의 고승 무허대사였다.
주녹정은 적사결을 무허대사의 제자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자가 아니라 무허대사 본인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니 그걸 떠나서 갑자기 늙어 버린 것은 또 뭐야?’
한순간에 늙어 버린 기사에 정신을 못 차리는 주녹정에게 적사결이 입을 열었다.
“반로환동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반로환동? 그…… 그래. 무공이 뛰어난 고수가 겪는 젊어지는 현상이라고…….”
“진정한 반로환동은 신체 나이를 조절할 수 있지요. 젊어질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스스스스.
이번엔 늙은 외양이 다시 젊음을 되찾아갔다.
주녹정은 튀어나온 눈을 넣을 겨를도 없이 다시 놀라고 있었다.
“노납이 황제 폐하의 자제분들에 대해 들은 바가 조금 있습니다. 여덟 분의 황자와 다섯 분의 황녀. 그분들 중 대부분이 요절하시고 지금까지 살아 계신 분들은 황자이신 유왕 주재기님과 황녀 영안공주 주녹정님 단 두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더구나 유왕께서도 그리 강건한 옥체가 아니라 들었습니다.”
십이월이 하북에 소재한 삼월을 통해 입수한 정보였다.
사실 정보라 할 것 없이 북경의 백성 대부분이 아는 부분이었지만.
“영안공주께서 천관무도회까지 참석하시며 무공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 때문이시지요? 무공은 양생술에 기반하여 발전했고 그 덕인지 무림인은 일반인보다 평균 수명이 기니 말입니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단명하니 돌파구로 찾은 것이 무공.
다행히 기를 느낄 만한 자질이 있어 심법 하나 주워다 익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것이다.
하나 그 정도로는 주녹정의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는 그 정도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반로환동을 알려 드릴 테니 절 좀 도와주십사 합니다. 앞전에 있었던 사소한 일은 묻어 두고 말입니다. 허허.”
“사…… 사소한 일?”
“오래 사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지요. 저승보다 이승에서 똥밭을 구르는 게 낫다지 않습니까. 똥 밟았다 생각하시지요. 허허.”
“…….”
주녹정은 입술을 깨물며 갈등했다.
하나 눈앞에서 반로환동을 보았기 때문인지 볼기짝 사건은 기억 저편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이미 마음은 결정을 내렸다는 방증이었다.
“본 황녀가 반로환동을 익힐 수 있다는 건가? 난 무위가 그다지 높지 않은데…….”
“젊어지는 것만이라면 무공을 모르는 범부도 가능합지요. 물론 노납의 도움이 있어야겠지만 말입니다.”
적사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넘어왔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상에 약점 없는 인간은 없고 거길 찌르면 넘어가지 않는 이는 더 드물었다.
특히나 황녀처럼 곱게 자란 탓에 정신력이 빈약한 인간은 더욱 잘 넘어올 수밖에 없다.
“도와 달라는 게 뭐지?”
홀딱 넘어간 얼굴로 침을 삼키며 말하는 주녹정.
적사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뭐든 다 힘 닿는 데까지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각 후.
자리를 비웠던 왕욱과 진무백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다.
아무리 사지근맥을 잘랐다 하나 공주를 혼자 두는 것은 위사로서 부담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별일 없으셨습니까?”
왕욱이 주녹정과 적사결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두 사람의 몸 상태에 변화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대략 훑어본 바로는 별 이상은 없는 듯했다.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다행입니다. 하면 심문을 계속하시지요.”
“아니. 심문할 것도 없어.”
주녹정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자 왕욱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문을 할 정도의 죄가 없으니까 그렇지. 놈이 싹싹 빌더군. 황녀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기로 했어.”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공주의 변덕에 진무백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주님, 죄가 없다니요? 그게 무슨…… 놈은…….”
“진무백! 본 황녀가 언제 죄가 없다 했지? 백성이 용서를 구했으니 황족으로서 아량을 베푼 것이라 했잖아.”
“하…… 하지만.”
“하지만? 뭐야, 지금 항명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진무백은 본전도 못 찾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왕욱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녀의 재판 결과가 있어야 죄의 경중을 떠나 놈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룡심법의 남은 구결을 받은 후 재판 결과를 빌미로 무조건 죽이려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공주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더라도 저희는 위사로서 상부에 보고서를 올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목이 필요하니 말씀해 주시지요. 재판 결과는 공주님께서 무죄를 명하셨다 적어 올리겠습니다.”
죄목만 확실하다면 공주의 판결은 상관없이 금의위의 직권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왕욱은 그것이 무슨 죄든 황실모독죄로 만들 생각이었다.
“왕욱. 꼭 알아야겠어?”
“반년이 넘도록 놈을 쫓아다녔습니다. 금의위의 내규에 따라 장기임무에 대한 보고서는 반드시 제출해야 합니다.”
“내가 얘기해 줄 테니 넘어가.”
“공주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깟 종이쪼가리에 목매다가 위사복 벗기 싫으면.”
“…….”
왕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주녹정은 짧게 코웃음 치고는 다시 말했다.
“둘 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더 중요한 일이라니요?”
왕욱의 물음에 그녀는 적사결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목과 발목을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침 바르면 낫는 상처도 아닌데 그만 만지작거리고 직접 설명하지?
“그러지.”
적사결의 대답에 두 위사가 도끼눈을 떴다.
“네 이놈! 공주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예를 갖추지 못할까!”
그 모습에 주녹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허락했어. 그는 그래도 되니까 입 닫고 듣기나 해.”
“공주님!”
“두 번 말하기 싫다고 얘기했어.”
“…….”
위사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적사결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너…… 어떻게…….”
“침 바르니 낫던데? 흐흐흐.”
적사결은 회복된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실실 웃었다.
세 사람은 괴물을 보는 듯 입을 떡 벌리고 그 모습을 보았다.
‘분명 힘줄이 잘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찌 된 거지.’
사지근맥을 자른 당사자인 진무백은 검을 쥐었던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처음 다뤄 본 보검이라 야…… 얕게 베인 거겠지…… 아무렴…….’
진무백은 말도 안 되는 핑계인 것을 알지만 자신의 실력에 불신을 가지기 싫었기에 그렇게 자위했다.
그러는 순간에 중요한 일에 대한 적사결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조만간 황제 암살 시도가 있을지도 모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