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87화>
사각. 사각.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논에서는 추수가 한창이었다.
열댓 명의 인원은 쉬지 않고 낫을 놀렸고 한 사람이 등장하고서야 쉴 수 있었다.
“자자. 다들 새참 좀 들게나.”
후덕한 인상의 중년인, 송만이었다.
인근 수백 평의 땅을 가진 지주인 그는 소작농들에게 인심이 좋기로 소문나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 저희 같은 것들 먹고살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참까지 챙겨 주십니까요.”
“자네들 덕분에 편하게 먹고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하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야말로 어르신 덕분에 새끼들 굶기지 않고 마음 편히 삽니다요.”
“하면 자네들도 굶지 말고 어서들 들게. 준비해 온 성의가 있지 않은가.”
송만이 시비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준비한 새참 바구니를 내려놓고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소작농들은 몸 둘 바를 모르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이 씨, 자네는 나 좀 보세.”
송만은 이 씨라 불린 중년 여인에게 손짓했다.
“송 대인, 무슨 일이세요?”
“근자에 돌보는 아이들이 더 늘었다지?”
“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받아 주다 보니 계속 늘어나는 처지네요.”
부모 잃은 아이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었다.
나라에서 고아들을 돌보지 않으니 대부분 거지가 되지만, 이 씨 여인처럼 사비로 고아들을 돌보는 자들도 있었다.
“시국이 불안정하니 계속 더 늘어날 테지. 이건 아이들 키우는 데 보태 쓰시게.”
“아닙니다, 대인. 지난번에 보내 주신 쌀도 있는데…….”
“어허, 어디 먹는 것만으로 되는가. 사람 구실하려면 입히고 가르치기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늘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일감이 또 생겼네. 이번엔 거리가 좀 먼데 괜찮겠는가?”
“얼마나 멀기에 그러시죠?”
“팔십 리가량 될 것이네. 집안 어른 중에 환갑이 되신 분이 있는데 잔치 음식을 만드는 일이라네.”
“무조건 가야지요.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인.”
이 씨 여인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잔치와 관련된 일감은 삯도 두둑하고 남은 음식을 싸 올 수 있어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도 있다.
거리가 멀다 하여 마다할 일이 아니다.
“하면 그리 알고 있겠네.”
송만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여인네들은 이 씨 여인 옆에 모여 너스레를 떨었다.
“환갑이면 잔치 중에서도 품삯이 제일 높잖여. 자네 노났구먼, 노났어.”
“고아들 키우느라 고생하는데 이번에 좋은 거 많이 잡숴, 이 씨.”
이 씨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여인네들을 대했다.
하나 가늘게 뜬 눈에서는 반짝하고 기광이 비쳤다.
* * *
“아이들은 다 재웠느냐?”
이 씨 여인의 말에 약관가량의 남자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다들 자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이 씨 여인은 송만이 말했던 일감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정확히는 하오문의 암어였다.
그녀의 이름은 은소령.
당대의 하오문주로 지금은 고아들을 돌보는 소작농으로 위장 중이었다.
“송만의 보고에 따르면 때가 무르익은 것 같구나.”
“역시 부작용은 없었던 것이로군요?”
“그래. 이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이혼대법의 부작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구나.”
하늘의 도움으로 운철을 얻어 반선주를 만들었으나 부작용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고난도의 주술인 이혼대법을 개량했으니 임상 실험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 대상으로 선택된 자들은 천하사괴였다.
천하에 백 명 남짓한 별의 기운을 가진 자들 중 괴짜들만 모아 놓은 듯한 모임.
혼백이 바뀌는 기괴한 일을 벌여도 세인들이 의심하지 않을 만큼 항상 괴상한 짓거리를 벌이는 자들이었으니까.
하나 그들을 필요한 실험 방향으로 이끈 것은 하오문이었다.
살협 엽주평을 포섭해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첫 번째 대상은 금개 이천억. 항상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던 그가 최초로 반선주를 접하도록 만들었고, 엽주평은 그에게 백리세가와 단목세가의 약혼식이 있으니 가 보라 바람을 넣은 것이었다.
이천억은 약혼식을 파탄 내려 움직였고 거기서 반선주의 조건, 별의 기운을 지닌 백리황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오문이 미리 천동성의 기운을 가진 백리황을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몸과 영혼을 바꾸며 확인하고자 한 변수는 나이였다.
세월의 격차가 큰 대상에 이혼대법을 사용할 시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대상은 취불 무허. 땡중이지만 그래도 그는 소림에서 자란 불제자였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고, 엽주평은 그 마음속에 자신의 가치관을 새겨 주었다. 살행으로 협을 행하는 그의 정의가 무허에게 전해져 살계를 열게 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엽주평은 지장보살에 대한 이야기와 마교의 교화를 얘기하며 바람을 넣었다. 무허가 마교 교주와 몸을 바꾸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하오문이 두 사람을 통해 확인하고픈 변수는 내공이었다.
무림을 대표하는 상극의 내공인 불가기공과 마공.
상반된 내공이 이혼대법에 미칠 변수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세 번째 대상은 음치 악도겸. 그는 가장 다루기 쉬웠다. 음악이라는 확고한 이상이 있었으니 그것을 충족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자가 뛰어난 성대를 지닌 항주의 기녀, 매양옥이었다. 더구나 여성이었으니 성별이라는 변수를 확인하는 데 최적의 실험체였다.
나이, 내공, 성별이라는 가장 큰 변수를 임상 실험으로 검증한 결과는 완벽했다.
어떤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혼대법, 반선주의 완성을 입증한 것이었다.
“내 이제 너희들을 천마신교의 교주와 명국의 황제로 만들 것이다.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정했느냐?”
은소령은 두 사람에게 그 결정을 맡겼었다.
천하를 뒤져 고아를 모았고 마침내 찾아낸 붉은 점, 별의 기운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남은 반선주로 아이들을 두 집단의 수장이 되도록 만들 예정이었다.
남자아이, 소청이 말했다.
“제가 교주가 되어 신교를 사무련에 바치겠습니다.”
여자아이, 소민이 말했다.
“황제가 되어 음지에서 사무련을 받들겠습니다.”
은소령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손수 키우며 세뇌시킨 아이들이었다.
아니, 그들은 세뇌가 아닌 교육이라 생각할 정도로 오랜 기간 주입시킨 결과물이었다.
“하면 청이는 나와 함께 신강으로 갈 것이니 채비하거라.”
“네, 어머니.”
“민이는 송만과 함께 황도로 가서 도중문을 만나거라. 그가 다 준비해 놓았을 것이니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될 것이니라.”
“네.”
소청과 소민이 방을 나서자 은소령은 품에서 낡은 천을 꺼내었다.
족히 수십 년은 되었을 정도로 색이 바랜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은소령의 표정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련주,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천하를 안겨 줄 거예요.”
* * *
“여기가 황도…… 허…….”
적사결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막 북경에 발을 디뎠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대로 때문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뻗은 중앙 대로와 수많은 전각과 고루.
인파의 수와 화려함 역시 타도시와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규모였다.
‘징글징글하구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라니.’
천마신교의 수장인 동시에 만 단위의 병력이 부딪치는 변란도 겪은 적사결이었다.
하나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눈에 담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북경엔 처음인가?”
왕욱의 물음에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 중의 변방인 신강에서 자란 그였다.
젊은 시절 적랑대주로서 신강 외 지역에서도 활동했다지만 넓게 봐도 서북 인근.
시골 촌놈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면 북경 유람 좀 해 볼 텐가?”
마룡심법 때문인지 적사결을 대하기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여정 중에 분석해 본 결과 마룡심법, 아니 천룡심법은 일문의 비전이라 해도 될 만큼 뛰어난 내가기공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진무백은 달랐다.
“안 됩니다! 어찌 죄인에게 유람을 하자고 하십니까?”
황녀의 볼기짝을 때리고 왕욱과 자신 사이를 이간질한 적사결이었으니, 좋게 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진 위사, 자네 지금 상관에게 항명하는 건가?”
왕욱은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게 적사결은 세력으로도, 무공으로도 동창에 밀리는 금의위에게 천룡심법을 전해 준 자였다.
금의위의 비결과 심법의 남은 구절을 교환한다 해도 놈은 어차피 황녀의 손에 죽을 터.
즉, 무상으로 그만한 심법을 얻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초고속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해서 죽기 전에 유람이라도 시켜 줄 생각이건만 진무백이 그걸 막은 것이다.
“백호 어른, 그것이 아니라…….”
진무백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세 사람분의 행낭을 혼자 짊어지고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은 금의위 위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하시오, 백호 양반. 우리 풋내기 친구가 아직 사회 경험이 일천하여 그런 것 아니겠소?”
적사결의 말에 진무백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졸지에 사회 경험이 일천한 풋내기가 되어 버렸으니까.
“더구나 본 좌는 이리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을 좋아하지 않소. 바로 궁으로 갑시다. 황궁이 구경거리는 더 많지 않소?”
“물론이오. 황궁은 도시 속의 또 다른 도시라 불리는 곳. 웬만한 소도시 정도의 규모이니 실망하지 않을 것이외다.”
“오, 그거 기대되는군. 어서 갑시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궁으로 보이는 곳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구려.”
적사결은 길을 재촉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진무백은 이를 아득 물었다.
‘도대체 저놈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공주님께선 절대 살려 주지 않으실 터인데…….’
황도에 도착하면 태도를 바꿀 것이라 여겼으나 적사결은 태연자약했다.
오히려 빨리 황궁으로 가자고 재촉할 정도니 진무백은 그 심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백호께선 황도에 왔건만 본 위에 연락도 못 하게 만드시고 놈을 포박도 하지 않으시고 어쩌려고 저러시는지 모르겠구나…….’
죄인을 추포해 온 것이 아니라 모시고 왔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실제 진무백은 밥을 해다 바치고 짐을 들어 주고 마치 하인처럼 수발을 들고 있었으니까.
‘정말 환장할 노릇이구나…… 어휴.’
진무백은 꼬질꼬질한 몰골로 행낭을 추켜들고 적사결과 왕욱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영안궁.
자금성 내 영안공주 주녹정 황녀가 기거하는 거처.
황자와 황녀는 어린 시절만 궁에서 보내고 성인이 되면 궁 밖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의 주녹정은 방년 스물이었으니 응당 궁 밖으로 나가야 했으나 아직 성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만큼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뭐? 왕욱과 진무백이 돌아와?”
주녹정의 물음에 소앵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예, 공주님. 어서 나가 보세요. 그 죽일 놈도 잡아 왔습니다.”
소앵 역시 그때의 볼기짝 사건을 떠올리면 아직 엉덩이가 지끈지끈할 정도.
당시 적사결의 얼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개자식!”
주녹정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진열장 위에 놓인 검을 빼 들었다.
황궁으로 복귀한 그날부터 오늘을 위해 준비한 보검.
한눈에도 명검의 귀티가 줄줄 흐르고 황소의 목이라도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예기를 뿌렸다.
“어디 있어?! 이 천한 버러지 새끼!”
문을 박차며 나온 주녹정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대청 앞을 훑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그 악마가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히익!”
“관세음보살.”
“히이익!”
반장하며 불호를 외는 적사결을 보며 주녹정은 자신도 모르게 경기했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속도였다.
그때의 공포가 본능을 건드린 것이었다.
하나 뒤늦게 주녹정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벌게졌다.
황녀인 자신이 천한 놈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 개자식이이!”
피리리릭.
대명제국 황녀의 검이 적사결의 심장을 향해 짓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