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84화>
수천의 군세가 방진을 이룬 광장.
병사들이 든 장창이 하늘을 향해 있으니 마치 창으로 이루어진 숲을 보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예기를 뿌리는 날붙이의 숲 말이다.
저벅. 저벅.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발걸음.
조용하고 담담한 보보는 한 사람의 존재감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평범한 걸음을 보이니 비범해 보이는 것이다.
“왕욱 님, 외모는 다릅니다. 하나 허리에 찬 도의 형태로 보아 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왕의 형태는 왜국의 왜도나 조선의 환도, 북쪽 몽골의 만곡도와도 달랐다.
도첨이 더 극렬하게 휘어진 형태는 동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였다.
“그래. 놈은 외모를 바꾸는 재주가 있으니 저 이형도에 초점을 맞춰야겠지.”
왕욱은 노련한 눈썰미로 사왕과 적사결을 살폈다.
아직 거리가 있으나 내공을 집중한 그의 안력은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체형, 키, 걸음걸이 등 신체적 특징부터 도집의 무늬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는 것이다.
우뚝.
삼십 장가량을 남기고 사내는 그 자리에 섰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턱밑을 더듬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왕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적사결을 보는 그때였다.
쫘아악.
얼굴 가죽이 벗겨졌고, 왕욱과 진무백은 눈을 부릅떴다. 숭산의 절벽에서 보았던 그자였기 때문이었다.
“일군! 저놈을 잡아라! 이군과 삼군은 방벽을 굳건히 하라!”
서슬 퍼런 군령에 군장들이 기를 흔들자 방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무백, 가자!”
“예!”
발검한 채 걸음을 옮기는 왕욱의 뒤를 진무백이 따랐다. 일군과 함께 적사결을 사로잡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쿵. 쿵. 쿵. 쿵.
장창으로 바닥을 찍고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움직이는 군진은 거대한 괴물 같았다.
공격이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소리와 바닥의 진동만으로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남경지원군만으로 이루어진 관병들은 정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일체감을 보여 주고 있었다.
“새끼들, 후까시 존나 잡네. 아, 이거 왜놈 말이지.”
왜놈들과 싸우다 보니 칙쇼니 후까시니 하는 왜어가 입에 익은 적사결이었다.
그때 군진이 갈라지며 왕욱과 진무백이 앞으로 나섰다.
“정체를 숨긴 놈이 하남에선 파락호들을 때려잡고 강소에선 왜구를 쳐 죽이고 공사가 다망하시군. 한데 왜 여기서 그 얼굴을 드러냈지?”
왕욱의 물음에 적사결은 피식 웃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하남에서 강소까지 중원을 가로지른 분들인데 얼굴은 비쳐야지. 나랏일 하시는 분들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미친! 예의?! 그런 놈이 공주님께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패악질을 저질렀느냐?!”
진무백은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자신의 눈앞에서 황녀를 팬 대역죄인이 눈앞에 있으니 감정이 북받친 것이다.
“어라? 그거 말해도 되는 모양이야?”
적사결은 음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손가락을 살짝 오므렸다 폈다 반복했다.
마치 황녀를 추행이라도 한 것 같은 손짓이었다.
“이 개자식!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지 마라! 당장 그 손 내리지 못할까?!”
매를 맞은 것보다 욕보인 것으로 알려지면 그 파장은 예측 불허였다.
자칫 금의위 전체의 존망이 걸릴 수도 있었다.
진무백은 얼굴이 벌게진 채 검을 겨누었다.
‘이놈은 백리 애송이랑 다르게 또 다른 재미가 있네.’
적사결은 킬킬거리며 들어 올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자수할 테니 추포하란 듯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놈! 뭐 하는 짓이냐!?”
“뭐 하긴, 보고도 모르나?”
손등을 보인 채 까딱이며 묶으라는 눈짓을 한 적사결이었다.
“자…… 자수하더라도 형량이 가벼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보고 이 많은 사람을 쳐 죽이고 도망가라? 못할 것도 없지만 이 몸이 모함이라 외치며 격렬히 저항하면 피곤해질 텐데?”
“이…….”
진무백은 반박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놈의 말대로 소주의 영웅이 된 놈이 그리 날뛰면 백성들이 동조할 수도 있었다.
“좋게, 좋게 가자.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무슨 꿍꿍이속이더냐.”
“없다니까. 그리고 있으면 그걸 알려 주겠냐? 공주가 아낀다는 놈이 보기보다 생각이 짧네.”
진무백은 이마에 혈관이 돋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로잡아 오라는 공주의 명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베어 버렸을 것이다.
“진무백! 놈이 무슨 속셈이든 상관없다. 하니 단단히 포박하고 마혈을 짚어라.”
왕욱은 진무백이 놈에게 휘둘리자 단호한 명을 내렸다.
“예.”
진무백은 포승줄을 꺼내 적사결의 두 손을 묶으며 경고했다.
“자금성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을 것이다. 우릴 가지고 논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테니까.”
“그거 기대가 되는군. 지루하지 않게 재롱을 부려 준다는데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망할 새끼. 언젠가 반드시 그 혓바닥을 뽑아 줄 것이다.”
적사결은 히죽거리며 뽑아 보라는 듯 혀를 쑥 내밀었다.
* * *
“저 인간, 볼수록 파격적이네.”
백류혼은 팔층 첨탑의 꼭대기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황실의 조력자를 얻는 일인데 금의위와 악연이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자수하다니.
더구나 저런 상태에서도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방증이었기에 더 놀라웠다.
“죄인의 신분으로 어쩌려고 순순히 체포된 거지? 알 수가 없네.”
“저자를 상식의 범주에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항상 최악에서 최선을 찾아내는 괴물이니까요. 련주님께서도 십대고수 중 놈을 가장 꺼리시지 않습니까.”
청령도 광장에 시선을 둔 채로 첨언했다.
그의 옆에는 홍령이 지붕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래, 뭐 알아서 잘하겠지. 그건 그렇고 살협에 대한 소식은?”
“북경에 입성한 것은 확실하나 이후 행적이 묘연합니다.”
“뭐 더럽게 큰 도시니까 숨기에도 좋겠지. 참, 야차혈전대는?”
본 련에서 받은 봉서를 보지도 않고 손강에게 건넸던 백류혼이었다.
그걸 읽은 대원들이 한차례 부산스러웠는데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물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홍령이 대답했다.
“전원 본 련으로 복귀를 결정했다 합니다. 얼핏 듣기로 천마신교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기에 그런 듯 보입니다.”
“왜? 마교도들에게 문제가 생겼나?”
“십만대산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답니다. 천마신궁은 접근조차 어렵고요.”
“무허 그 노물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기에 련에서도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것도 영감이 알아서 하겠지. 백령과 자령에게 전해. 악도겸과 매양옥, 그리고 금개 어르신을 모시고 한 시진 후 북경으로 출발할 거라고.”
“존명.”
읍한 청령과 홍령이 사라진 후에도 백류혼은 광장, 정확히는 끌려가는 적사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연이를 위해서라도 함께하는 동안 파악해 놓을 필요가 있겠어.’
여전히 자신은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하니 동생인 백수연이 사무련을 이어받는 데 도움이 되는 일 정도는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천마신교 교주의 행동 양식 정도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 * *
안휘 남궁세가.
천하제일검가로 불리는 곳으로 정파 오대세가의 수좌를 차지한 가문이다.
또한 상계에서도 천하제일로 불리는 휘주상인, 휘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에 무력으로도, 금력으로도 무림의 으뜸가는 혈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수좌는 의천오무제 중 일인인 창궁검제 남궁건.
그 역시 오무제 중 수위를 다투는 절대 고수였다.
모든 면에서 남궁세가는 천하제일가로 불려야 마땅할 정도로 완벽한 위세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더냐?”
남궁건이 재차 확실한 정보인지 물었다.
그 물음에 남궁세가 정보대를 맡고 있는 창궁비연대의 대주가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수십 번 검토해 확인한 사안입니다. 백천악의 아들이 분명합니다.”
“이십 년이 넘도록 꼬리가 잡히지 않던 후계자를 드디어 찾았다라…….”
남궁건은 쉬이 믿기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사무련, 특히 흑천백가와 철천지원수지간이었다.
때문에 백가의 후계자는 남궁세가의 일 순위 암살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도 자신들 후계자의 존재는 철저한 보안으로 보호했다.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양지에 내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놈이 안휘 땅을 밟지 않았다면 저희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이름은 백류혼. 흑야귀령대의 십이사령 넷과 움직이고 있으며 최근 야차혈전대까지 놈의 주변에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만한 호위라면 백가의 후계자가 확실합니다.”
백류혼은 백리황의 명으로 천하사괴, 음치 악도겸의 조사를 위해 안휘에서 활동했었다.
물론 조심한다고 했지만 십이사령이 그를 쫓는 과정에서 생긴 불협화음으로 창궁비연대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백천악의 자식이라 그런지 제법 간덩이가 큰 놈이로구나. 감히 본가의 영역에 발을 디디다니.”
남궁건은 잔잔한 살기를 일으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놈의 위치는 어디냐?”
“강소성 소주 인근입니다. 현재 북상 중에 있습니다.”
“사무련의 영역인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했단 말이냐?”
장강 이남에 있더라도 암살자를 보낼 텐데 이북이라니.
정파의 영역 깊숙이 사파 최고 수뇌부의 후계자가 향하고 있다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본 대의 분석으로는 하북으로 향하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북…… 하북이라…….”
하북에는 팽가가 있다.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남궁세가의 우방이라 하나 남궁건은 백류혼이란 먹잇감을 양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 즉시 창궁검대를 소집하라.”
“예. 놈을 척살하란 명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내 직접 갈 것이니 채비하라 이르거라.”
“가주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팽가의 영역에서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이려면 내가 가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와 팽가는 비교적 사이가 서먹하다 할 수 있었다.
한쪽은 검객을, 또 한쪽은 도객을 대표하는 무가였으니 말이다.
‘팽가의 아들놈이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린다 했었지. 고놈과 붙여 보면 재밌겠군.’
풋내기들에 한정했지만 천하제일이란 수식어를 단 놈이었다.
이 기회에 둘을 양패구상시키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 * *
“와. 쟤들 완전 괴물이 다 됐는걸요.”
사월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림이 천 년 동안 모은 영약과 내가 만든 단환들을 다 처먹고 주변의 영초와 영물을 싹쓸이한 놈들이니 당연하지. 괴물이 안 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겠느냐.”
오 척 단구의 노인, 서 선생도 질린 얼굴로 말했다.
갓 태어난 새끼에서 몇 달 사이에 성체로 자란 백원들은 그야말로 게걸스럽게 영약을 먹어 치웠다.
의원 생활을 오십 년 넘도록 했건만 이런 폭풍 성장은 처음 목도한 자신이었다.
‘하긴 그만한 성장 속도가 아니었다면 영약의 기운에 몸이 터져 버렸을 테지.’
서 선생은 혀를 내두르며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크아아아.
녹 빛을 띠는 거대한 대망을 상대로, 네 마리의 백원들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태행산맥 영물들의 지배자로 불리는 녹주독혈사.
묵린대망과 함께, 뱀 영물의 정점에 올라 있다 알려진 괴물이었다.
벌써 칠 일에 걸친 대혈투.
사 대 일의 싸움이었으나 녹주독혈사의 맹독은 스치는 것만으로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에 백원들은 조심스럽게 전황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사망곡의 절반이 녹아내리고 무너지길 세 시진.
지칠 줄 모르는 백원들과 달리 녹주독혈사는 ‘시익시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그 순간을 간파한 것일까.
네 마리의 백원들이 별안간 황금빛 강기 다발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콰콰콰콰쾅.
사망곡을 가득 채운 먼지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듯 엄청난 양의 먼지였으나 계곡풍의 세찬 바람이 불며 사투의 결과를 자랑하듯 보여 주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가 산산조각 나고 녹색 피가 계곡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쩝. 쩝. 쩝.
그리고 네 마리의 백원은 사이좋게 앉아 녹주독혈사의 사체를 씹어 먹고 그 피를 마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