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82화>
“뭐라?”
구양패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일월을 바라보았다.
익히 아는 암어였지만 이런 시기에 이런 곳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구양장로. 언젠가 이 암어를 말하는 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무조건 도와주도록 해. 설사 그것이 본 좌에게 반하는 일이라도 말이야.’
교주는 분명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설사 반역이라도 암어를 말하는 자가 원한다면 도와주라고 말이다.
이유를 묻지 말라 했기에 더 묻지 않았었고 구양패는 그러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필 교주님의 행보에 의심의 싹이 트는 이런 시기라니…….’
더구나 상대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구양패의 기감에 이곳으로 접근 중인 무리들이 있었으니까.
“대장로님, 피로 얼룩진 길을 지존과 함께 걸으신다 하셨다지요. 도와주십시오. 혼자서는 저들을 떨칠 수 없습니다.”
구양패는 일월을 꿰뚫을 듯한 안광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당으로 들어가 상처를 돌보거라. 얘기는 후에 듣겠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딛는 일월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네가 잘못 들은 모양인데 피로 얼룩진 길은 노부가 먼저 걸을 테니 지존께선 편하게 오라고 말씀드렸었다. 지존의 패도에 걸림돌이 되는 놈들은 내 직접 박살 낼 것이니 말이다.”
구양패의 말에 일월은 미소 지으며 멈추어 섰다.
“하나 지존께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으셨다는데 모르셨습니까?”
“몰랐다. 나이가 드니 귀가 먹고 눈도 멀더구나. 끌끌.”
일월은 피식 웃더니 한마디를 남기고 사당으로 들어갔다.
“보기엔 아직 정정하신 것 같습니다.”
구양패는 모습을 드러내는 피풍의의 사내들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싸울 때는 그렇지. 큭큭.”
구양패는 앞에 자리한 마인들이 눈에 익었다.
분명 교주와 함께 탈마동에서 꺼내 준 마인들이었다.
“이거 구양장로 아니십니까.”
“네놈들이 천마봉에는 무슨 일이냐?”
“쥐새끼가 신궁을 어지럽혀 잡으러 왔습죠.”
“이곳에는 네놈들 말고 얼씬거린 놈이 없었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거라.”
구양패의 말에 선두에 선 자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
뿌아악.
벼락처럼 떨친 일장에 얼굴 반쪽이 터졌다.
.사내는 혀를 길게 뺀 채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구양패는 손에 묻은 뇌수를 빗물에 씻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풍겨 댔다.
“감히 본 장로 앞에서 이죽거리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세 명의 마인들은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혹여 다시금 구양패가 기습할 경우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퍼퍼펑.
세 번의 파열음과 함께 비산한 뇌수와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바닥으로 내려선 노인의 솜씨가 분명했다.
“지존의 수하라는 놈들이 감히 뒷걸음질을 치다니, 쯧.”
비쩍 마른 노인, 맹극은 손을 털며 구양패를 노려보았다.
“이거 전대의 거마이신 맹극 님이 아니십니까.”
“구양가의 애송아, 비켜서라. 사당 안의 쥐새끼는 노부가 데려갈 것이니.”
“애송이라니요. 지금은 본 교의 대장로이니 말씀을 가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구양패는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손목을 풀었다.
상대는 전대 팔장로 중 일인이었던 초마혈수 맹극.
극마결에 도전했다가 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전대의 거마였다.
탈마동에서 풀려난 마인들 중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인 것이다.
“마도인이 직함 따위를 내세우는 것이냐? 노부에게 존중을 받고 싶다면 실력으로 말하거라.”
“실력이라…… 하면 본 장로도 선배 대접할 필요 없겠군.”
“뭐라?”
“실력을 논하자니 당연하지 않은가. 설마 약자 주제에 강자에게 대접받고자 한 것인가? 아, 푸대접이라면 해 줄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이…… 이놈이!”
화아아악.
시간이 느려진 듯한 공간 속에 터져 나가는 경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급작스럽게 끌어올린 공력이 무색하게 엄청난 수준.
스으윽.
하나 구양패는 침착했다.
가슴께까지 올린 쌍장은 물속을 유영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작은 원을 그리며 어루만지듯 경력을 쓸어 담던 장법은 별안간 조법으로 변하며 기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찢었다.
쫘아아악. 콰콰콰쾅.
빨라지는 시간 속에서 경력의 폭풍이 구양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찢어지며 폭발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그 모습은 마치 신당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위패가 모셔진 신당을 보고도 마구잡이로 힘을 써?”
구양패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해진 시간에 신당을 참배할 정도로 신실한 신앙을 지닌 자신이었다.
한데 맹극이 신당이 무너질 정도의 힘을 지척에서 뿌려 댔으니 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퍼퍼퍼퍼펑.
예비 동작도 없이 출수된 먹색 수영이 허공을 수놓았다.
맹극은 시뻘건 혈수를 휘두르며 그에 맞섰다.
콰콰콰콰쾅.
강맹한 마기가 충돌하며 일어난 충격파가 비산하고, 폭우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도 역방향인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만큼 엄청난 기운의 격돌이었다.
후욱.
그런 충격파를 뚫고 먼저 움직인 것은 구양패였다.
거력의 일장이 다시금 맹극을 덮쳤다.
쩌엉.
하나 맹극 역시 일장을 뻗어 맞부딪혔다.
‘노장의 자존심인지 몸부림인지 모르겠군.’
맹극은 척 보기에도 힘겨운 것이 눈에 보였다.
몇 수 교환하지 않았으나 힘과 힘의 격돌에서 우세는 자신에게 있었다.
맹극은 점차 장력에 실린 힘도 줄어들고 대응 속도도 확연히 느려지는 중.
그런데도 상대는 힘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구양패는 알 수 없었으나 이는 성취가 낮은 혈미륵신공의 정신 지배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본래의 맹극이었다면 무작정 힘으로 맞상대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터.
이는 혈미륵신공이 투쟁 본능을 과도하게 자극해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쩌정. 쩡. 쩌저정.
기세를 잡은 구양패의 공세가 거칠어졌다.
아직까지 맹극은 버티고 있지만 마주한 장심에서 떨림이 느껴질 정도로 한계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낸다.’
결심을 내린 구양패의 일장이 뻗어 나갔다.
독문무공인 구유마령장이었다.
“차앗!”
쇠를 긁는 듯한 기합성과 함께 맹극의 절기도 뿜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절초인 초마혈옥수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였다.
하나…….
스르륵.
장법에서 조법으로 변화시킨 구양패의 금나수가 맹극의 손목을 젖혀 들어갔다.
정면 승부를 예상한 맹극으로서는 허를 찔린 한 수였다.
변화한 구유마령조는 팔꿈치 안쪽과 어깨를 찍어 누르고 목덜미를 찢고 천령개를 파고들어 갔다.
절묘함과 더불어 과감함이 돋보인 수법이었다.
콰지직.
이마 위 천령개를 파고들어 간 조강은 그대로 그어 내려져 맹극의 신체를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내 버렸다.
잔혹한 손속으로 말미암아 잔혼마수라 불리는 별호에 걸맞은 신위였다.
“말했지? 내가 더 세다고.”
한마디 툭 내뱉은 구양패는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신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공으로 튕겨 내기 힘들 정도로 공력을 바닥까지 소진한 그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읊조렸다.
“나도 늙었구나, 늙었어.”
* * *
일월은 부복한 자세로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구양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혹 한숨을 쉬었다.
일다경에 걸친 설명이 있은 후.
“해서 지존께서는 지금 강소성에 계시다고?”
“네. 금개를 잡아 영혼이 뒤바뀐 원인을 찾고자 하십니다.”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 돌아오실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단 무허의 현재 상태와 탈마동에 관한 내용도 보고드려야 합니다.”
“천하정화작업이라는 미친 짓거리도 빼놓지 말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한다니. 노괴가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게지.”
구양패는 미간을 펴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이제야 천하정화작업을 비롯해 마구니 사건, 관심법 등 찝찝했던 모든 의구심이 해결되었으나 작금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탈마동의 마인들이 전적으로 무허를 따르는 상황에, 기존의 교주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신교의 칠 할에 달하는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대장로님, 아시겠지만 천하정화작업은 그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총력전이 펼쳐집니다. 무허가 출진 명령을 내리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중원 곳곳 진격의 교두보가 되는 거점에 이미 전쟁 물자들이 이동을 시작했고 조만간 퇴로를 배제한 총공격이 감행된다.
일단 시작되면 각지로 쏟아지는 수십 갈래의 진군을 막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본 장로도 잘 알고 있다. 성공하면 천하를 제패하겠지만 실패하면 신교가 멸할 것이란 사실도 말이다.”
반반인 듯 말하고 있으나 구양패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탈마동의 마인들이 더해져 신교의 무력이 두 배 정도 강해졌다지만 천하제패는 요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정화작업은 의천맹과 사무련, 그리고 사천회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구양패의 계산상 한 곳이라면 필승, 두 곳이라면 양패구상, 세 곳은 필패였다.
‘미쳐 버린 노물이 신교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있구나…… 하아. 천마시여…….’
답답한 마음에 천마조사를 떠올린 구양패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지존께 서둘러 상황을 알리게. 칼침 좀 맞았어도 그 정돈 괜찮지?”
“물론입니다. 빨간약 발랐으니 문제없습니다.”
“빨간약?”
“아, 저희 부대만 쓰는 금창약입니다. 다치셨으면 좀 드릴까요?”
“다치긴. 그런 다 죽어 가는 퇴물을 상대하다 다치면 은퇴해야지.”
“역시 대장로님이시군요. 지존께서 의지할 만합니다.”
일월의 말에 솔깃한 구양패는 다시 물었다.
“지존께서 노부를 의지한다 하셨었나?”
“네. 장로님에 대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습니다. 하니 저희들이 신교 수뇌부 중 연락을 취할 분으로 대장로님만 선택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다른 놈들은 적월의 암어를 몰라?”
“그렇습니다.”
“허허허, 이거 지존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을 달뜨게 만드는구먼.”
적월이라는 특무대의 존재를 자신에게까지 감추었기에 내심 서운했던 구양패였다.
한데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었다니 기분 좋은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대장로님께서는 어떤 행보를 취하실 생각이십니까? 가능하면 그에 대한 간략한 내용도 지존께 보고하고자 합니다.”
일월의 물음에 구양패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미친놈을 상대하는데 다른 방법이 있겠나? 힘으로 맞설 수밖에.”
“하긴…… 기침했다고 철퇴로 때려죽이는 놈이니 계획 따윈 무의미하겠군요.”
“일단 이장로 관패를 만나 봐야겠네. 말이 통하는 친구니 함께 노괴에 대항할 힘을 결집해야겠지.”
흑마검귀 관패.
구양패와 함께 천마신교의 마도쌍패라 불리는 고수였다.
구양가를 이끄는 구양패와 달리 독보강호하는 무인이라 배경이 없는 마인들이 주로 따르는 인물이지만 그 영향력은 막대했다.
가문의 지원을 받은 구양패와 달리 혼자서 그만한 무력을 쌓았다는 것에 대한 존경심.
무를 숭상하는 마인들에게 관패는 흠모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장로님께서 도와주셔도 탈마동의 마인들을 막는 것은 한계가 있을 텐데요.”
“부족한 부분은 기백으로 메워야지 어쩌겠는가. 허허허.”
“무허 노괴도 있지 않습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놈은 신마결을 익힌 듯 보입니다.”
“관패와 함께라면 자신 있네. 우리 두 늙은이가 함께라면 지존과도 자웅을 가릴 수 있지. 마도쌍패가 허명이 아님을 보여 줄 것이야.”
맹극과의 전투로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충만했다.
천상 무골호인.
구양패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듯 전의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