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72화>
“먼저 확실히 해 두자면 나는 사무련의 후계자 자리를 때려 치운지 오래야. 수하들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그렇게 선언하고 뛰쳐나왔어.”
백류혼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유가 뭐냐고 묻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이유를 따지자면 자유가 억압된 그 자리와 성정이 맞지 않아서지. 어려서부터 자유야말로 사파의 존재 의의며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관이라 배웠지. 한데 그 사파의 정점인 사무련주와 그 후계자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더군.”
“당연하지. 군주에게 자유라니? 단체로 망하자는 말이나 다름없지.”
적사결이 질책하듯 대꾸했다.
“그래. 다 그렇게 얘기했지만 난 그게 싫었어. 난 자유롭고 싶었거든.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싶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길 바랐어.”
백류혼은 두 팔을 벌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허파에 바람이 제대로 든 놈이었군. 제법 재능 있다 생각했는데 헛바람 빼려면 꽤 오래 걸리겠어.’
적사결은 어린 치기의 발로와 같은 그 말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나이 때는 구속이 무엇보다 답답한 시기였으니까.
하나 그것은 곱게 자란 도련님의 투정일 뿐이라는 것이 적사결의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와중에 듣게 된 어떤 분의 일화가 있었지. 바로 금개님이었어. 천하 오대거부에 속할 정도의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고 자유의지로 거지가 되는 길을 선택하신 분. 천하사괴의 일인이 되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삶을 실천하신 분이시지. 나는 금개님 덕분에 사무련의 후계자라는 무거운 지위를 내려놓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야.”
적사결은 황당했다.
그 모든 것이 저주 같은 재복 때문이었음을 안다면 녀석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하나 그것을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환상이 깨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이 저런 족속들이었으니까.
지금은 놈이 금개와 백리황을 되돌리는 데 전념하도록 놔둘 필요가 있었다.
“개소리긴 하지만 그건 네놈 사정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이제 하오문주에 관한 걸 말해 봐.”
적사결의 말에 백류혼은 하오문 강소지부장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일단 이자를 통해 알아낸 정보는 두 가지였소. 첫째, 하오문주로부터 직접 백리황에 대한 특별 감시 임무가 내려왔었다는 것. 둘째, 그 특별 감시 임무는 각지의 지부장 중 강소, 하남, 안휘, 절강, 산서, 하북의 지부장들에게만 하달된 것으로 확인되었소.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예상을 해 볼 수 있소.”
백류혼의 설명에 적사결이 말을 이었다.
“강소는 금개, 하남은 백리황, 안휘는 음치, 절강은 매양옥이군. 산서 역시 천하사괴 중 한 놈인 살협 엽주평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고. 하북은 아마 살협과 몸이 바뀐 놈이 있는 곳이겠군.”
살협 엽주평.
살행으로 협을 추구하는 미친놈이었다.
불의를 보면 고수든 단체든 가리지 않고 싸우는 한 마디로 미친개.
그 상대가 정파든 사파든 파벌도 상관 않고 손을 쓰면 무조건 죽이는 자로 일신의 무위는 천하사괴 중 무허 바로 아래이며 천하를 대상으로 본다면 천하 십대고수에 근접한 초고수였다.
장강 이북의 땅 중 산서성만이 거대 문파가 없는 것은 엽주평 때문이었다.
세를 불리려면 기존 세력과 충돌이 필수적이나 그 과정 대부분에 엽주평이 개입했고, 그 때문에 분쟁이 생길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의 무인이 전쟁 억제력을 가진 대표적인 경우였다.
“당신 말대로지. 또한 빼먹은 취불 무허도 하남에 있었으니 전체적인 그림이 맞아떨어져. 다만 살협과 취불은 여섯 지역 중 어느 곳의 누구와 몸을 바꿨는지는 몰라.”
백류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때 잠자코 보고 있던 이천억이 비릿하게 웃으며 적사결을 가리켰다.
“큭큭큭, 네 눈앞에 있지 않느냐. 무허와 몸을 바꾼 자 말이다.”
“네? 그게 무슨…….”
백류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천억과 적사결을 번갈아보았다.
“정말 취불 무허와 몸이 바뀌었단 말이오? 한데 그 얼굴은 뭐지? 인피면구?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백류혼에게 적사결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본좌의 비기니까 관심 끄지 그래.”
“거참 대단한 역용술이 다 있군. 무련의 기술자들이 좀 배워야겠어. 그건 그렇고 당신 참 비밀도 많군. 그 무허대사와 몸이 바뀐 인물이라니.”
“말할 필요가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 비밀이랄 것도 없지. 비밀로 하려면 저 새끼 보자마자 턱주가리를 부숴 놓았을 테니까.”
“뭐 그건 그렇군. 한데 당신은 여섯 지역 중 어디 있었지? 하북인가?”
“하북은 아니다.”
“아하! 그래서 살협과 몸이 바뀐 놈이 하북에 있다 얘기한 거로군.”
백류혼은 박수를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천하사괴 중 세 명과 관련된 자들이 모였고, 여기 사람들은 반선주를 다 쓴 것으로 확인된 것으로 간주하면 남은 희망은 살협 엽주평이라는 말인데.”
좌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협 엽주평이 반선주를 사용했는지 아닌지 현재 상황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네놈이 말한 하오문주도 있지 않나. 그걸 만들고 사용한 놈이라 들었는데.”
적사결의 지적에 백류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오문주도 있지. 하나 그를 만나는 것은 살협을 찾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어려워.”
“네놈이 지닌 사무련의 후계자라는 배경이 있는데도 그러한가?”
“그래. 하오문주의 위치는 누구도 몰라. 사무련 뿐만이 아니라 하오문도들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어. 그렇지?”
백류혼은 매양옥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하오문도인 그녀에게 확인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맞아요. 본문은 철저한 점조직. 지부장들도 명령만 하달 받을 뿐 문주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어요.”
매양옥의 말에도 적사결은 반론을 제기했다.
“아랫것들은 그렇지. 하면 사무련의 주인이라면 어떨까?”
“하오문주 그가 연락하지 않으면 우리 영감도 모른다고 봐야 해.”
“백천악도 모른다? 글쎄…… 애송이 네놈이 그렇게 아는 것일 뿐. 백천악이라면 어떻게든 연락할 방법이 있을 거다.”
“흠…… 당신 우리 영감도 잘 아는 듯 말하네?”
백류혼은 미심쩍은 눈으로 적사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손강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잠깐! 광혈수라공! 당신 설마!”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뜬 백류혼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무허와 몸을 바꿨으니 그 몸에 담긴 불가기공을 사용했을 터.
하나 초식은 본래 알고 있던 무공인 광혈수라공이라 본다면 상대의 정체는 하나로 귀결된다.
천마신교의 교주, 광혈존 적사결.
백류혼은 침을 꼴깍 삼켰다.
“흥. 그래, 본좌가 대천마신교의 지존이다.”
적사결의 당당한 시인에 백류혼을 비롯해 좌중은 경악하며 입을 떠억 벌렸다.
그제야 그들은 야차혈전대를 압도한 엄청난 무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무허 그 친구, 터무니없는 인물과 몸을 바꾸었구먼…… 대단해. 허허.”
음치 악도겸이 두 손을 들며 항복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여인이 된 그를 어이없이 보던 이천억이 허탈하게 말했다.
“나는 우리 중 자네를 이길 놈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림승이 마교주라니. 엽주평 그 친구도 무허는 못 이기겠는걸. 흐흐.”
“황제와 몸을 바꾸지 않는 이상 절대 못…… 헉…….”
악도겸이 실소를 흘리며 말을 내뱉다 숨을 멈췄다.
황제가 있는 곳은 북경 자금성. 하북이었기 때문이었다.
“푸하하하. 황제가 뭐 아무나와 술잔을 나눈다던가? 살협 그 친구가 아무리 협사로 이름을 날린다지만 달리 보면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는데 어사주나 받을 수 있겠는가? 큭큭.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구먼.”
이천억의 냉소에 악도겸이 욱하고 대꾸하며 적사결을 가리켰다.
“소림승과 마교주도 술잔을 나누는데 황제라고 못할까?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 사람아, 그래도 황제는 아니지!”
“잘 생각해 봐. 황제가 정사도 돌보지 않고 도술을 배운다고 두문불출한지 오래라고 했어. 살협, 그 친구라면 그런 황제를 죽이는 게 협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라.”
“…….”
이천억은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엽주평이라면 충분히 지금의 황제를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여길 수 있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엽주평이라도 황제를 시해하지는 못한다.
만일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다면 무림인은 모조리 추살될 테니까.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래도 그 자식은 우리 중에 그나마 좀 제정신이잖아?”
불의를 못 참고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과격할 뿐.
천하사괴 중 그나마 평판이 좋은 편에 속하기에 별호에 협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이다.
“그 밥에 그 나물이지 제정신은 개뿔. 쓸데없는 지레짐작하지 말고 아가리 닫아라. 여기서 네놈들은 가해자일 뿐이니까.”
적사결이 으름장을 놓자 이천억과 악도겸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적사결에게 옮겨 갔다.
마교주라는 정체가 드러났으니 그 존재감이 더 크게 다가온 것이었다.
“야, 백리 애송이.”
“네…… 넵!”
혼란스러워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백리황이 적사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복잡한가 보구나. 본좌의 정체를 알게 되니 당황스러운 게냐?”
“그…… 그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본좌가 정체를 숨긴 것은 정파의 영역인 이곳에서 불협화음을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까. 네가 선택할 것은 두 가지다. 이곳을 떠나 네 본가와 함께 하든지. 아니면 이들과 함께 몸을 되돌릴 방법을 찾든지.”
“…….”
백리황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적사결이 한숨을 쉬며 다그쳤다.
“이곳엔 마도, 정도, 흑도 세 파벌에 속한 자들이 모두 있다. 하나 이곳에서 거취를 고심하는 놈은 너뿐이야. 다들 다른 놈들을 이용해 지금의 상황을 되돌릴 목적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느냐? 아직 어린 네놈도 파벌이니 뭐니 하는 것에 물들어 머릿속에 선입견만 가득한 것이더냐?”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면 무엇이냐?”
“저는 적운님께서 마도의 지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백리황은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쑥 뽑혀져 나간 기분이었다.
그 허탈감에 정신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껍데기가 그렇게 중요하더냐?”
“예?”
“본좌가 정체를 숨기는 데 그리 급급했더냐? 정체가 밝혀지고도 당황해하거나 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더냐?”
“아…… 아닙니다.”
“그래, 본좌는 바뀌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니 너는 네가 내키는 대로 나를 대하면 되느니라. 강요하진 않을 테니 모든 것은 네가 바라는 대로 행하거라. 이것이 내 마지막 가르침이다.”
“…….”
백리황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적사결은 백류혼을 바라보았다.
“어이, 백가 애송이.”
“응? 아…… 말씀하시오.”
아비인 백천악과 배분을 나란히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백류혼은 반존대로 적사결을 대했다.
“사무련의 본단으로 가서 하오문주와 접선할 방법을 알아와라. 백천악은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 알겠소.”
“그리고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설명해 줄 것이 있다.”
“무엇이오?”
“반선주 말이다. 하오문주 그놈이 그 귀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너는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문주의 얼굴도 모르는 지부장 따위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렇다면 백류혼은 자신만 아는 정보로 추측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것도 놈이 확신에 차 말할 정도로 높은 확률의 추측 말이다.
“반선주는 분명 하오문주가 만든 것이 확실하오. 이는 본련과 하오문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니.”
백류혼의 대답에 좌중은 귀를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