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68화>
잠재 근력을 사용한 최속의 기습.
왼손의 단검이 장우의 목을 꿰뚫고, 오른손의 단검이 혁종의 심장을 가르고 지나갔다.
“끄르륵.”
장우는 피거품이 섞인 소리가 잇새 사이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점혈로 지혈하기 늦을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방심했다지만 우리 두 사람을 동시에 해하다니…….’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장우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먼저 가 있어. 다들 네 곁으로 보내 줄 테니까.”
적사결은 비릿하게 웃으며 장우의 사혈을 짚어 단번에 목숨 줄을 끊어 버렸다.
목에 칼이 박히고도 살아 있을 정도의 질긴 생명력이라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어디 보자.”
적사결은 장우가 죽자 품속을 뒤졌다.
품에서 꺼낸 것은 각패였다.
앞면엔 야차의 형상이 있었고, 뒤편엔 장우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각패를 챙긴 후 놈들의 시신을 으슥한 곳에 숨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야차혈전대의 옷과 검까지 착용한 후 이어진 변화.
우드득. 우득.
금령의 얼굴에서 장우의 얼굴로 바꾼 것이었다.
‘서둘러 금개를 찾자.’
문지기 두 놈을 처리한 것이 알려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터.
그 전에 장우란 놈의 행세를 하며 금개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적사결은 코끝에 힘을 주고 다루의 정문을 넘었다.
저벅. 저벅.
다루는 꽤 넓었다.
가운데는 널찍한 정원이 있었고 그 너머 전각이 자리해 있었다.
금개의 냄새는 그 전각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이, 장우. 벌써 교대한 거야?”
뒤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적사결은 살짝 긴장하며 돌아섰다.
그곳엔 야차혈전대원 다섯이 있었다.
그들은 장원 내 순찰조 중 하나였다.
이런 순찰조가 못해도 열 개 이상 다루 내를 돌아다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장원 곳곳에는 흉흉한 기세를 갈무리한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으니까.
“왜 대답이 없어? 교대 아니야?”
“……어, 도련님께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보고라니? 번을 서다 이상한 거라도 본 거야?”
“그래. 수상한 놈이 왔다 갔다 하더군.”
“흠…… 하오문도들인가. 일단 우리가 가서 확인하지. 그래도 도련님과 대주님께 보고는 하도록 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게 되자 적사결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충 둘러 대다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쯧.’
방금 나간 놈들이 자리를 비운 문지기 놈을 찾으려다 숨겨 둔 시체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촉박한 시간을 더 단축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더 밖으로 돌리자.’
이백 명 중에 티도 나지 않을 숫자지만 시작이 반이다.
그렇게 적사결은 다루의 중앙 전각까지 당도하는 데 세 개의 조를 더 만났고 모두 바깥으로 순찰을 나가도록 조장했다.
한데 적사결은 전각을 눈앞에 두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윽.
뒤를 돌아보니 처음에 만났던 다섯 놈.
그들이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큭큭큭큭.”
그들은 비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젠장.”
들킨 거구나.
“어떻게 알았지?”
적사결의 물음에 가장 앞에 선 사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장우는 나의 가장 절친한 벗이다.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는 어디 있나? 혹시 죽였느냐?”
사내의 물음에 적사결은 피식 웃었다.
“그냥 이상한 느낌만 들었겠지. 그래서 거리를 두고 뒤따르며 본좌의 행동을 지켜봤을 테고. 알긴 개뿔.”
“이 새끼가 뒈지려고 환장을 했구나. 네놈은 지금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온 것이다. 말해라, 장우 어디 있어!”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 봐. 호랑이라면 혓바닥 나불거리지 말고 이빨과 발톱을 쓰라고.”
“개새끼가!”
쾌속한 발검에 이어 사내의 검격이 어깻죽지로 날아들었다.
‘하, 이 새끼. 지금 날 제압하겠단 거야?’
동귀어진이라도 모자랄 판에 살수가 아니라 생포하기 위해 손속에 자비를 둔 것.
적사결로서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것은 보리연화공을 완전 소진해 단전이 갈무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수다운 기세가 흘러나오지 않으니 방심하고 손을 쓴 것이다.
푸우욱.
어깨를 내주자 관통과 동시에 검이 어깨 뒤로 쑥 빠져나갔다.
적사결은 거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일권을 휘둘러 사내의 얼굴을 곤죽으로 으깨 버렸다.
경화된 주먹과 잠재 근력의 조합은 말 그대로 살상 병기나 다름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라…… 애송이가 제법이구나. 안다고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야.”
또 다른 대원의 눈짓에 그들은 적사결의 주위를 에워쌌다.
동료가 한 명 죽었음에도 단순히 포위망만 형성한 것이었다.
아직 상대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누가 살을 줬지? 본좌는 아무것도 안 주고 뼈를 취했는데 말이야.”
적사결은 통증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어깨에 박힌 검을 빼 버렸다.
그리고 피가 흐를 새도 없이 상처가 수복되어 갔다.
“뭐…… 뭐야, 저놈…….”
야차혈전대원들은 그 기괴한 모습에 한껏 경계심을 드러내었다.
수많은 전투 경험을 지닌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덤비기나 해. 이렇게 된 거 정면으로 너희 야차 새끼들을 도륙내 줄 테니까.”
그래, 그게 패도의 길이다.
괜히 이놈 저놈 얼굴로 바꿔 가며 찔끔찔끔 기습이나 하는 짓거리라니.
적사결은 자신을 되돌아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약해진 마음에 혀를 찼다.
사투를 벌이고 내공이 소진되고 피로감에 젖은 육체라는 현실이 정신까지 나약하게 만든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정신력과 체력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으니까.
하나 일반적인 상식은 뛰어넘어야 절대 고수다.
‘어쩌면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정신력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겠구나.’
천하제일에 근접했다는 무허의 육체가 약할 리 없다.
늙었어도 그는 젊은 자신에 못지않은 외공을 발휘했으니까.
믿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었다.
스스로 쌓아 올린 강함이 아니기에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육체가 한계에 봉착하자 정신도 따라서 나약해진 것이었다.
‘왜구놈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 되새기게 되다니. 한심하군.’
적사결은 다시금 자신을 다잡고 의념을 집중했다.
뿌드드득. 뿌득.
전신에 핏줄이 불거지며 옷가지에 가려지지 않은 손과 얼굴까지 뒤덮었다.
현 상태로 공격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것.
동시에 경화된 피부가 방어력을 그 위에 둘렀다.
후웅. 콰콰콰쾅.
검 한 자루를 휘두르는 듯 일치된 소리가 네 명의 야차혈전대원의 검에서 피어나고, 이어서 폭음이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의 발원지로 장원 내 야차혈전대 순찰조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은 그들이 정예 중의 정예인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 * *
‘뭐지…….’
백리황은 왜구들을 쫓는 추격대에 속해 있었다.
백리세가의 무사들이 주축이 되기에 자신도 빠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데 조금 전부터 뒤통수가 찌릿찌릿한 감각이 들고 있었다.
‘살기? 아니야…….’
이 정도 농도의 살기라면 주변의 검풍대원들도 눈치 챘을 터.
하나 대원들은 누구 하나 눈치 챈 자들이 없었다.
이건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설마 월혼님인가?’
월혼은 십이월이 알려 준 가명이었다.
백리황은 그가 자신에게만 알릴 것이 있어 신호를 보낸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감 대주님.”
“네, 도련님.”
“먼저 가십시오. 저는 잠시 후에 뒤 따라가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잠시 만날 분이 있습니다.”
“혼자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호위로 몇 명 남겨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왜구들의 수가 아직 만만찮으니 한 손이라도 부족할 판이지 않습니다. 기감으로 훑어보니 주변에 적도들은 없습니다. 걱정 말고 먼저 가십시오.”
절정 고수에 오른 백리황이다.
그런 그가 기감으로 확인한 것이니 감영대주는 안심해도 될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게다가 도련님께서 따로 만날 인물이라면 적 대협이나 개방도들이겠지.’
감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 백리황이었으니 믿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너무 늦지 마십시오. 절정 고수인 도련님이 빠지시면 전력이 약화되니까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백리황은 감영에게 싱긋 웃어 주고는 경공을 전개해 우측으로 빠졌다.
감각이 이끄는 방향으로 달려가니 신호의 주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응?”
월혼이 아니다.
으슥한 나무를 기준으로 위아래로 포진한 자들은 스물에 달하는 괴인들이었다.
“뭐야 저 녀석. 지금 제 발로 우릴 찾아 온 거야?”
야차혈전대 오조의 조원들은 허탈한 얼굴로 백리황을 바라보았다.
금개의 몸을 가진 놈을 생포하기 위해 온 그들은 백리세가의 무인들과 한바탕 혈전을 각오했었다.
한데 수하들과 떨어져 혼자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당신들…… 누구지? 혹시 적운 님의 수하들인가?”
백리황은 십이월 이상의 고수로 보이는 그들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다.
십이월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실력으로 적사결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시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운? 그게 누구지? 우린 그런 놈 모르는데.”
아니구나.
백리황은 긴장한 채 내공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괴인들의 기도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좆 됐구나. 확인하고 조심해서 접근하는 건데…… 어휴…….’
경험이 너무 일천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할 리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방심하지 말라고 수십 번 가르쳤던 적사결의 충고가 이제야 뼈에 와 닿았다.
파바밧.
마음이 움직이자 취팔선보가 백리황의 신형을 번개같이 움직였다.
잔영을 남기며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찰나였다.
“산개.”
야차혈전대는 방사형으로 비산하며 넓은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다.
상대의 신법이 고절하니 그만큼 추격 범위를 넓힌 것이었다.
별다른 의사소통 없이 각자가 필요한 만큼 판단해 즉각적인 움직임을 보였음에도 일사불란하기 그지없었다.
* * *
“후욱. 후욱. 후욱.”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나 적사결은 입을 한껏 벌리고 산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짧고 빠르게 규칙적으로 호흡을 진정시키려 했다.
긴 호흡은 신체가 이완되고 긴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
특히나 외공에만 의존해야 하는 지금은 육체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대단하구나. 사상자가 열 명이나 발생하다니…….”
티는 내지 않지만 야차혈전대의 대주 곽산은 속으로 경악을 토하고 있었다.
내공도 쓰지 못하는 놈이 외공만으로 일개 조의 절반을 압살하다니.
그것도 오직 홀로.
절정 고수이자 대주인 자신도 다섯 이상은 감당할 수 없는 수하들이었다.
한데 놈은 죽인 열 명만 상대한 것이 아닌 백 명, 야차혈전대의 절반에 달하는 인원을 상대하다 만든 결과였다.
“후욱. 후욱. 본좌가 좀 대단하긴 하지.”
적사결은 야차혈전대의 병기인 야차검을 고쳐 쥐며 이죽거렸다.
사왕은 다루에 들어오기 전 숨겨 두었기에 장우란 놈을 죽이고 얻은 검을 쓰고 있었는데 벌써 수명이 다한 모습이었다.
쉴 새 없이 검기를 쳐 내고 막다 보니 보검에 속하는 야차검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한 번? 아니 두 번이면 부러지겠구나. 사왕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까?’
적사결은 좌우를 훑으며 상황을 살폈다.
스물, 사십, 팔십……
세 겹으로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처음 백 명에서 어느새 오십여 명이 더 늘어난 것이다.
싸우는 와중에 충원된 듯 더 이상 증원되는 놈들은 없었다.
‘나머지 놈들은 후계자라는 그놈이 있는 곳에 있는 건가.’
고개를 들어 전각 쪽을 살피니 야차혈전대원들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잠재 근력을 쓴 적사결의 속도가 말도 못할 만큼 빨랐기에 그런 것이다.
욱씬. 욱씬.
‘큰일이다…… 회복했다 생각했는데 피로감이 더 빨리 찾아오고 있어.’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새대가리 놈과의 싸움에서 얻은 후유증이 생각보다 몸속 깊숙이 남은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야차 새끼 한 놈도 제대로 상대할지 의문.
절체절명의 상황이 주는 압박감에 적사결의 머리 회전이 빠르게 돌아갔다.
위기가 주는 경고에 굴하긴커녕 뛰어난 생존본능이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그래! 새대가리!’
번쩍하고 떠오른 것은 왜구들의 대장, 그놈이 최후의 한수로 선보였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