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66화>
“서명?”
이천억은 황당한 얼굴로 백류혼을 바라보았다.
“백지에 무슨 서명을 하오?”
계약서에만 서명을 해 본 이천억이었다.
백류혼이 내민 종이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가보로 간직하려 합니다.”
“엥?”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종이쪼가리에 이름 써놓은 걸 왜 간직해?
“가보가 별거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게 가보지요.”
“그게 노부의 이름 석자다?”
“네.”
“미친…….”
자신도 괴짜라지만 눈앞의 사내는 진짜 미친 게 분명했다.
“구명지은을 입고 서명 하나 못해 주겠다는 거요?”
야차혈전대 일조장의 말이었다.
백류혼이 명하면 다리몽둥이를 부숴서라도 강제로 서명시키겠으나 자신처럼 대하라는 엄명 때문에 행동에 못 옮기는 그였다.
“…….”
이천억은 말없이 세필붓을 쥐고 끄적거렸다.
그의 말대로 자신을 구해 줬으니 이름 석자 써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흐음…….”
백류혼은 이천억의 서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필적 감정으로 그가 이천억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맞군요. 금개 어르신이 확실합니다.”
심드렁하게 휘갈긴 탓에 필체가 죽어 있었으나 백류혼은 그 안에서 특징을 잡아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금개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이천억의 물음에 대답은 야차혈전대에게서 나왔다.
“사무련. 당신 앞의 그분은 본련의 후계자이신 백류혼 님이시다.”
그 말에 백류혼이 발끈했다.
“야! 후계자 얘기 더 꺼내지 말랬지!?”
“도련님, 저자를 구하면 협조하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한데 아직 다 구한 거 아니잖아.”
“나가는 것 말입니까? 정문으로 들어와 정문으로 나갈 수 있는 저희입니다. 저자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끝난 거나 다름없지요.”
“뭔 소리야? 처음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어르신을 구해 드려야 협조하겠다고.”
“그래서 구해 드렸잖습니까.”
백류혼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청령을 돌아보았다.
“얘들 왜 이렇게 답답하냐? 눈치가 왜 이렇게 없어?”
“전 흑야귀령대 소속인데요.”
청령은 대답을 피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래서 힘세면 무식하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애들도 아니고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 줘야 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조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금개 어르신 영혼이 다른 놈하고 바뀌었다고 얘기했지? 어르신의 몸은 따로 있다고.”
“예.”
“영혼만 구한 게 구한 거야? 몸은?”
“…….”
“누가 단순하게 몸뚱이만 구하랬어? 인생을 구하란 의미였잖아. 척하면 척 몰라? 쟤들은 단번에 알아먹던데 너네는 밥숟가락을 떠서 먹여 줘야 돼?”
백류혼이 청령을 가리키며 타박하자 야차혈전대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청령은 그 모습을 보며 구석에서 키득거렸다.
자신들은 말귀를 잘 알아먹는 똑똑한 놈들이 되고 꼴보기 싫은 저놈들은 단순무식한 취급을 받자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파파팟.
대화를 듣고 있던 이천억이 순식간에 경공을 전개했다.
“잡아.”
백류혼의 한 마디에 야차혈전대 다섯이 움직이더니 단번에 이천억을 몰아넣고 바닥에 찍어 눌렀다.
“역시 어르신. 눈치가 백단이십니다.”
“나를 되돌려 놓겠다고? 싫다! 나는 예전 몸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저도 싫습니다. 무조건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해 드릴 겁니다. 잘 감시해. 너무 거칠게 모시지 말고.”
백류혼의 말에 야차혈전대원 다섯은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네놈들 정체가 뭐냐! 어찌 노부가 몸을 바꿨다는 걸 알고 있지?”
이천억은 제압된 상태로 백류혼에게 따져 물었다.
그로서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차근차근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본래의 옥체를 되찾을 생각만 하십시오.”
백류혼은 이천억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일조장에게 말했다.
“가서 어르신 몸을 지닌 백리황이란 놈을 잡아 와. 우리는 하오문 지부로 가 있으마.”
“……예, 도련님.”
1조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명령에 따랐다.
의사소통이 원할하지 못했던 부분은 대주가 따질 문제니 일단 자신은 명을 수행하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가장 시급한 어르신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하오문이라…….’
소주에 도착한 직후 백류혼 일행은 하오문 소주지부로 향했었다.
왜구들로 인한 바깥의 상황과 백리세가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금개로 위장한 놈과 금칠대로서 서신을 주고받을 때 그 출처가 백리세가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보가 필요한 것이었다.
십이사령이 있기에 하오문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은 손쉬웠다.
사무련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하오문은 오랜 우방으로서 필요시 흑야귀령대를 통해 정보교환을 하는 관계였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정황상 하오문 지부장은 금개 어르신과 백리황의 몸이 바뀐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과거 두 사람의 접점이나 기타 자잘한 증거들로 관계가 있다는 듯 유도했으나 백류혼은 넘어가지 않았다.
하오문 지부장은 말하지도 않은 그 사실을 알기에 마치 진실의 주변에서 맴도는 듯한 언변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십이사령들도 감지하지 못했으나 백류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무련의 후계자로서 제왕학을 배운 자.
아랫사람의 보고를 듣고 의도를 꿰뚫는 데 도가 튼 경지에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금개 어르신이 이렇게 된 것에 하오문이 관계가 되었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정보 집단으로서 중요한 정보를 숨긴 것인지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나 백류혼은 어느 쪽이든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 * *
백리세가가 습격당한 그때.
소주성의 전투도 일단락되어 가고 있었다.
항주를 공격하려던 왜구들이 소주로 향한다는 첩보 때문이었다.
정보를 접한 관병과 무림인들은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가진 전력을 다했다.
지금이라도 최대한 놈들의 수를 줄여 후속 부대와의 합류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만이라는 숫자는 그만큼 절망적이었다.
물론 제궁명과 황자기가 붙잡히고 가왜라는 사실이 드러난 데다 배후인 제금상단까지 드러나자 왜구들의 사기는 급전직하했기에 전투는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렇기에 전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서둘러 성벽을 보수하라.”
위지휘사 조정생은 가장 먼저 무너진 성벽을 막기 위한 지시를 내렸다.
퇴각한 왜구들을 추격하는 일은 무림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수성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남경에도 다시 파발을 보내 지원군에 대한 사안을 재확인하거라.”
“장군. 지원은 없을 것이라 하셨잖습니까.”
“개방도들이 가져온 첩보가 있었다. 금의위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하나 양쪽의 도착 시기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 필요하다.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부관은 화색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금의위가 움직인다면 반드시 군은 올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제금상단이라…….’
조정생은 전쟁 이후를 생각하며 말끝을 흐렸다.
제금상단은 강소성에서 제일가는 거부 제문종이 그 주인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미치는 영향력은 강소성의 권력자들을 너머 중앙의 황실까지 뻗어 있다 알려져 있었다.
개방도들이 가져온 증좌가 있어도 일개 위지휘사인 자신이 건드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금의위가 핵심이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주를 지키는 것.
그리고 금의위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 그뿐이었다.
* * *
“주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십이월은 수하들에게서 정보를 받자마자 적사결에게 보고했다.
“또 무슨 일이냐?”
적사결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다 여겼다.
정말 교를 떠난 후로 손발이 고생이었다.
“왜구와의 전투가 벌어지는 중에 소주성으로 들어온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놈들이기에 그리 호들갑이냐?”
“야차혈전대입니다.”
“뭐!?”
적사결은 피곤한 태도를 싹 지우고 십이월을 돌아보았다.
그만큼 야차혈전대가 주는 충격은 컸다.
“얼마나? 몇 조나 들어왔느냐?”
“확인된 놈들은 삼개조입니다.”
“삼개조라면 삼분지 일……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습니다. 드러난 것만 그 정도이니 야차혈전대 전체가 투입되었다고 가정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이백에 달하는 인원이 전장을 뚫고 들어온 것은 아닐 테고…… 설마 또 비밀 통로냐?”
“네, 하오문 놈들이 만들어 놓은 곳으로 추정됩니다.”
십이월의 대답에 적사결은 혀를 찼다.
“뭔 놈의 도시에 두더지 굴이 이렇게 많아?”
“향락의 도시지 않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다른 놈들이 파 놓은 것도 또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놈들이 소주에 온 목적은 짐작할 수 있겠느냐?”
야차혈전대의 움직임은 사무련주 백천악이 직접 지시한 것일 터.
놈들의 목적을 짐작하는 것은 백천악의 행보를 예측하는 것과 같았다.
“백리세가로 향했다는 것까지는 짐작되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인 불가입니다.”
“백리세가? 확실한 것이냐?”
“예.”
“…….”
소주를 넘어 강소성의 무림문파 중 가장 큰 세력과 의미를 지닌 곳이 백리세가였다.
적사결은 놈들이 강소성을 접수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무련의 영역인 절강성과 맞닿아 있기에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추측이었다.
“백리세가를 치기 위함은 아니더냐?”
“아닙니다.”
“그렇게 단정짓는 이유는?”
“절강성도 왜구 때문에 관리가 어려운 지역입니다. 한데 강소성까지 관리하기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그런 준비를 시작했다면 오대세가에서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안휘의 남궁세가는 절강과 강소의 지척에 있으니까요.”
“남궁세가의 움직임이 없으니 계획된 것이 아니고 즉흥적인 행보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흠…….”
적사결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백리 애송이와 떨거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모를 겁니다. 저희도 방금 전에야 확인한 사실입니다.”
“지금 어디 있지?”
“퇴각한 왜구들을 쫓는 추격대를 맡아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쯧, 빈집털이 당하겠군.”
가주가 자리를 비우고 정예부대가 왜란에 동원된 상황.
한가닥하는 늙은이들이 있다지만 그들만으로 야차혈전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알려야. 지금의 백리세가는 야차 새끼들 1개조도 당하지 못해.”
“설마 주군께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한숨 돌리자마자 바빠지는구나.”
“주군, 야차혈전대입니다. 위험합니다.”
“위험해? 이 꼴이 되었다고 지금 본좌를 걱정하는 것이냐?”
미소를 지운 적사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속하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야차 새끼들이 본좌의 시야에 들어온 이상 멋대로 설치게 놔두지 않는다. 술 한잔 마시러 왔다 해도 술상을 엎고 냉수 한 잔도 못 마시게 해야지 않겠느냐.”
“속하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너는 백리 애송이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라. 수하들 시켜서야 어느 세월에 전해지겠느냐.”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보중하십시오.”
“염려 말거라.”
적사결은 십이월의 어깨를 두드린 후 걸음을 옮겼다.
‘내공은 깔끔하게 다 썼고……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지만 잠재 근력을 사용한 반동은 아직 남아 있다. 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군.’
뭐 힘들지 않은 전투가 있었던가.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면 천하 십대고수는커녕 신교의 교주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사결이 무직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