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65화>
닌자.
이름 그대로는 인술을 사용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정찰, 침투, 암살 등 특수 전투를 수행하는 집단으로 왜국에서는 시노비라고 불렀다.
왜국의 전국시대에 다양한 유파가 탄생했으며 각 파벌마다 독특한 전투법과 특기가 존재했다.
신스케는 후마류라는 화둔계의 정점에 군림하는 유파의 두령이었다.
인법. 화령난신.
불의 기운을 정제한 단약을 섭취하고, 그 화기를 바탕으로 불의 화신이 되는 인술이었다.
다만 보통은 신체의 일부분을 화신체로 변하게 하거나 불을 토하는 등 사용에 제한을 둔 고등 인술.
지금의 신스케와 같이 전신에 불의 기운을 두르면 다시 본래의 몸으로 되돌아오기 힘들었다.
불의 영령이 되어 버리면 전신이 타 버리기 전에는 그 불을 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화르르르륵.
‘같이 가자. 명국의 괴물이여.’
신스케는 생명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피워 올리며 적사결을 저승길 동행으로 삼으려 했다.
설마 마지막 남은 화령단을 본국이 아닌 이국에서 쓰게 될 줄이야.
하나 신스케는 주군의 재건을 위한 대업을 좌절시킨 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크으으윽.’
전신의 피부를 경화시킨 후 화력을 버텨 내는 적사결은 미칠 노릇이었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놈은 칼로 베어지지도 않고 떨쳐지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공 좀 아껴 쓸걸.’
오랜만에 제한 없이 공력을 쏟아 내니 거의 폭주에 가깝게 힘에 취했던 것.
사용한 강기도 회수해 다시 쓰던 적사결로서는 오갑자, 삼백 년 공력이 주는 도취감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이대론 얼마 버티지 못한다. 방법을 찾아야 해.’
껍데기만 급히 경화시켰다지만 신체를 혹사한 대가로 오래 유지할 순 없었다.
내공도 바닥인 데다 외공도 한계를 넘은 상황.
몸뚱아리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믿을 건 사왕뿐이구나.’
처음 강기를 씌우고 도파를 뻗어 냈을 때의 감각을 되살렸다.
분명 작은 양이지만 기공이 사왕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싸울 때도 정신없었지만 되새겨보면 그런 느낌이 있었어…….’
특히 마지막 초수를 교환 때 사왕은 상대의 사기조차 빨아먹었었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잠재 근력으로 신체 방어력을 높였다지만 사기에 잠식된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사왕이 사기의 침범으로부터 주인을 지킨 것이었다.
‘사왕의 힘은 흡수와 증폭. 그 두 가지가 분명하다.’
그 힘의 한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얼마나 다양한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은 저지르고 볼일이었다.
웅. 웅. 웅.
적사결이 마음을 먹자 사왕이 떨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의 진정한 힘을 알아봐 준 주인에게 호응한 것이었다.
‘큭큭. 너도 갑갑했던 것이냐.’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이 넘도록 시골 무기상의 장식용 도로써 지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말이다.
사왕은 마음껏 포효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 한번 날뛰어 봐.’
허락이 떨어지자 사왕의 도신 위 물결무늬가 요동쳤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싼 불꽃이 사왕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슈아아아아.
불꽃이 장막을 거두자 그 속에는 새카맣게 탄화된 해골이 있었다.
신스케는 이미 절명한 상태였던 것이었다.
‘새끼, 죽이겠단 의지만이 남아 불꽃을 유지한 것이었더냐.’
적사결은 적이지만 신스케의 의지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걸 이제 어찌한다.”
죽은 놈은 죽은 거고 산 놈은 다음 행보를 취할 뿐.
적사결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왕을 바라보았다.
화령난신의 화기를 흡수하고도 끄떡없지만 이대로 기운을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흡수했으니 증폭시켜 뱉어 내야 할 차례.
‘아하! 적당한 장소가 있었지.’
적사결은 금룡표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요신키와 경천동지할 생사결을 벌이고 신스케의 동귀어진까지 이겨 낸 그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 정도면 되겠군.”
그러고는 거침없이 사왕을 바닥에 찔러 넣었다.
후와아아악.
화기는 순식간에 지반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운이 얼마나 증폭된 것인지 반경 백장에 이르는 대지가 지글거리고 무사들의 신발 밑창이 타 버릴 정도였다.
“큭큭 비밀통로에 있던 놈들은 쪄죽었겠고 당분간 찜통 구멍을 이용하는 쥐새끼들도 없겠지?”
적사결이 왜구들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동시에 그들의 얼굴은 똥을 씹다 못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병장기를 떨구었다.
텅. 텅그렁.
아직 일천에 달하는 왜구들이 남아 있었지만 저항할 의지를 잃은 것이었다.
“어이, 거지들 뭐해? 뭘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어?”
적사결이 돌아보며 외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개방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지들이 분주해지는 그때 금룡표국 내에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타났다.
십이월이었다.
“주군,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땀 좀 흘렸구나. 한데 증좌는 찾아왔느냐?”
“여기 있습니다. 꼬리 자르고 도주하기 전에 확보한 놈들입니다.”
십이월은 두 사람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것들이 누군데?”
“제금상단의 소상단주 제궁명과 금룡표국의 국주 황자기입니다. 그리고 수배범에게 왜구의 무구를 구매한 이력이 적힌 서류와 기타 약탈 대상에 대한 계획서 등등 가왜로 위장하고 왜구와 결탁한 증거는 차고 넘쳤습니다.”
십이월은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엥? 그걸 왜 남겼데? 이거 생각보다 엄청 허술한 놈들이네.”
성벽을 터트리고 비밀통로까지 만들었기에 생각보다 꾀를 쓰는 놈들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적사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획을 세운 건 제금상단주입니다. 이놈들은 수행자였지요. 하니 상부에 보고하기 위한 보고 자료로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비밀금고에 꽁꽁 숨겨 뒀던 것을 제가 찾아냈고 말입니다.”
“실패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은 거로구먼. 쯧쯧.”
“제법 계획이 철저했으니까요. 주군께서 이곳에 계신 것이 가장 큰 변수였지 않습니까.”
십이월의 설명을 듣던 적사결은 코를 킁킁거렸다.
“근데…… 이것들 술 마셨냐?”
“예. 술상에 엎어져서 자고 있던 놈들을 업어 온 것입니다.”
“뭐? 처자고 있었다고?”
“예. 기녀도 두 명씩 끼고 있더군요.”
“…….”
적사결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놈들에게 있어선 결전의 날이었을 것이었다.
한데 그 중요한 순간에 술판을 벌인다?
도무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금상단주라는 놈…… 똑똑한 거야 멍청한 거야? 계획만 잘 세워 놓으면 뭐해 수행하는 손발이 병신인데.”
“장천보라고 낭인십검에 속한 놈이 있었습니다. 세부적인 수행은 그자가 행했고 이놈들은 그저 얼굴만 내민 것이겠지요. 참고로 그 장가 놈은 제가 죽였습니다. 외부와 연락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외부와 연락을 해? 제금상단?”
“아닙니다. 이놈들 추가 병력이 더 있었습니다. 주군께서 나서시고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연락을 취하려 하더군요.”
“만 명 외에 또 있었다? 하…… 나라 팔아먹은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아. 그래서 얼마나?”
“만 명입니다. 계획서를 뒤져 보니 본래 항주를 치려던 놈들이 방향을 바꿔서 소주로 오고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만 명이라…… 한데 기존의 계획을 뒤엎을 만한 변수가 있었다?”
“예. 자세한 것은 본단에서 내려온 엄명이라고만 적혀 있어 알 수 없었습니다. 항명을 용납지 않는 수준의 변수라는 것이겠죠.”
“흐음…… 근처 군부에서 나선 건가…….”
잠시 고민하던 적사결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 그건 우리 알바 아니고 어쨌든 연락을 차단한 것은 잘했다.”
“기본 아니겠습니까. 주군께 배운대로 행할 뿐입니다.”
“녀석.”
적사결은 십이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고는 죽선개와 삼당의 당주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당신들도 들었겠지? 만 명이 더 몰려 올 거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죽선개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적사결에게 물었다.
“도대체 귀하는 누구시오?”
엄청난 무위와 더불어 가왜들의 준동을 미리 감지하고 움직인 듯한 선견지명.
게다가 증좌와 함께 죄인들의 신병을 확보하기까지.
정보집단인 개방의 분타주인 죽선개지만 적사결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강호에 모래알만큼 많은 것이 은거고수 아닌가? 일단은 백리세가의 빈객으로 알아 두면 될 것이야.”
적사결의 대답에 죽선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역시 강소의 패자 백리세가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적사결과 십이월이 행한 모든 것들이 백리세가라는 수면 아래로 감춰지고 있었다.
* * *
소주성 안팎으로 왜구와의 전쟁이 한창인 그때.
백리세가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기의 폭발과 함께 감노를 비롯한 은풍대의 노인들이 튕겨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풍사환혼진을 뚫고 들어와 은풍대까지 무릎 꿇린 자들은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크웩…….”
내상을 입은 감노의 입에서 검게 죽은피가 왈칵 쏟아졌다.
쓰러진 상태로 돌아보니 동지들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황이었다.
‘스물……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수다…… 하나 우리들이 단 한 놈도 처리하지 못하다니…….’
백리세가의 숨겨진 힘이라는 의미에는 초대부터 내려오는 특별한 유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은풍대 개개인의 무위가 절정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상대는 자신들을 가지고 놀듯 압도한 것이었다.
“쿨럭…… 진법을 파훼한 방법이나 무공으로 보아 그대들은 사무련. 그것도 야차혈전대로군. 그렇지 않은가?”
감노의 말에 선두에 선 자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늙은이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통찰력이 좋군. 네말대로 우리는 야차혈전대 소속 제일조다.”
“사무련주의 검이 본가를 왜 공격한 것인가? 그것도 월담을 하면서까지 말이야.”
감노는 적들이 백리세가의 정문을 들어오지 않고 몰래 잠입해 풍림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면공격에 특화된 무인들이 그런 암행을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그가 알기에 암행은 흑야귀령대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뭐 우리 방식은 아니지만 본 련의 후계자께서 그리 명하셨으니까.”
금개의 신병확보를 최우선에 두고 움직이라는 지시.
그들은 흑야귀령대원인 홍령과 청령이 파악한 위치인 풍림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한 것이었다.
“후계자?”
사무련에 후계자가 있었던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없었다.
감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 때였다.
“이런 씨, 후계자 아니라니깐! 새끼가 걸핏하면 소문을 흘리려고! 너네가 싸움꾼이지 정보꾼이냐!?”
뒤늦게 나타난 백류혼이 투덜거렸다.
수호신조를 보인 후 틈만 나면 후계자라는 걸 알리려는 듯 수작을 부리는 야차혈전대였다.
‘붕아를 안 보여 줬으면 따르지 않는다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아, 짜증 나.’
진정한 사무련주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한 수호신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호신조는 초대 사무련주 때부터 이백여 년을 살아남아 사무련의 역사를 증명하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그럼 후계자 말고 바로 련주의 위에 오르시지요. 저희들은 도련님을 적극 지지합니다.”
“이런 벽창호 같은 새끼들…….”
백류혼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야차혈전대의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아 됐고! 금개님은 어디 계셔? 무사하신거야?”
주위를 둘러봐도 네 명의 늙은이 외에는 없기에 물은 것이었다.
그 순간 때를 맞춰 두 명의 인영이 새롭게 나타났다.
십이사령인 청령, 그리고 그에게 팔을 붙잡힌 백리황, 아니 금개였다.
“예, 예. 무사히 모셔 왔습니다.”
청령이 한 숨을 쉬면서 금개를 툭 떠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류혼이 눈을 번득였다.
“야, 날 대하 듯하라 그랬지? 두 번 말해야 해?”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청령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은 누구요? 누군데 나를 구해 주는 거지?”
금개는 처음 보는 자들이 자신을 떠받들듯 대하자 긴장하며 물었다.
백류혼은 품에서 세필붓과 종이를 꺼내며 내밀었다.
“일단 여기 서명 좀 해 주십시오. 이천억이라고 이름 석 자 써 주시고 밑에 작게 백류혼에게라고 적어 주시면 됩니다. 꼭 뵙고 싶었습니다, 어르신!”
초롱초롱한 눈빛은 금개 이천억의 모습이 비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