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57화>
* * *
사사삭.
적사결이 주먹 쥔 손등을 보인 채 들어 올리자 감영과 백리황이 움직임을 멈췄다.
오감 중 청각과 시각, 후각을 강화하고 절대 고수의 육감까지 장착한 적사결은 최강의 척후병이었다.
‘꽤 자유분방하군. 설마 소주의 병력이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건가.’
왜구의 첫 번째 진지는 망루도 제대로 세워 놓지 않은 상황.
더구나 목책도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웅성. 웅성.
거리가 제법 가까워진 덕분에 적사결의 귀에는 왜구들의 대화 소리가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물론 감영과 백리황은 내공을 집중해도 듣지 못할 거리였다.
“소주에 부자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진짜 우리 인생 바꿀 수 있겠지?”
“이 사람아. 하늘에 천국이 있다면 지상에 항주와 소주가 있다 했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아 참. 자네는 소주에 가 봤었지? 어땠는가?”
“말도 말게. 으리으리한 전각과 기루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런 장원과 고급스런 연회장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네. 운하 도시라는 말처럼 성내 교통도 좋고 운치는 또 죽여주지. 전리품을 운하로 이동시키면 수레에 실어 한탕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챙길 수 있을 걸세. 뿐만인가?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단으로 둘러싸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것이 교태가 사람 애간장을 녹이다 못해 십이지장을 똥구멍으로 싸도 모를 정도네.”
“허어…… 같은 강소성에 살아도 우리 같은 뱃놈들과는 차원이 다르구먼.”
역시 왜어가 아닌 중원의 언어.
가왜라는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싸울 때는 아가리 처닫고 있었고 ‘칙쇼’니 ‘빠가야로’니 간단한 단어만 내뱉었지만 전투가 끝난 후라 마음 놓고 입을 터는 것이다.
적사결은 그대로 진지 바깥을 돌아 산기슭 아래 큰 바위 뒤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가왜에 대한 것을 감영과 백리황에게 말해 주었다.
한데 그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못해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진짜 왜구도 있을 것이고 왜구 행세를 하는 중원인도 있을 겁니다. 먹고 살 길이 어려워 도적이 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으니까요. 강소성은 해안가를 접하고 있으니 해적이 많은 것이고 해적은 왜구와 결탁하기 쉽습니다.”
감영은 왜구가 주를 이룬 채 가왜를 흡수한 형태라 보고 있었다.
가왜는 몇 해 전 해적왕 왕직을 토벌하며 거의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반대로 적사결은 가왜가 핵심이라 여겼다.
왜구가 세력을 키우기 위해 가왜를 흡수한 형태라면 그들에게까지 왜도를 지급할 리가 없다 여겼다.
“적 대협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수십 년에 걸쳐 왜구와 싸워 온 곳이 강소성입니다. 주인을 잃은 왜구의 장비가 암시장에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고 개인끼리 은밀히 거래된 경우도 있을 겁니다.”
“모든 장비를 확인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말이 없군.”
“아닙니다. 저희야 가왜가 익숙하지만 타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매국노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어쨌든 적장을 하나씩 없애 가다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감영의 말대로였다.
적장이 왜구인지 가왜인지 판별하면 전체적인 그림이 나올 터.
지금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가지. 자네 말대로 족치다 보면 절로 알게 될 테니.”
적사결이 먼저 움직이고 감영, 그리고 백리황이 차례로 움직였다.
왜장의 군영.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큰 막사 혹은 경계가 가장 삼엄한 곳이 장수가 있는 장소였으니.
적사결과 일행도 백 장 남짓한 거리에서 막사 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지금의 진지가 작전 시작 전에 협의한 첫 번째 공격 장소였다.
진지의 식량 저장고가 불타는 즉시 움직여 막사의 적장을 처리. 이후 다음 진지로 이동.
이것이 그들이 행할 단순하지만 어려운 작전의 실체였다.
그때였다.
-삐리리. 삐비비.
야조의 울음 소리가 낮고 짧게 울렸다.
진짜 야조의 소리는 아니었다.
폭풍대의 대원 중 누군가가 암어로 의사를 전달해 온 것이다.
그리고 감영은 그것을 해석하고 검지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일각 후.’
이어서 수신호는 네 개의 손가락과 주먹 하나를 쥐었다 폈다.
‘식량 저장고의 위치는 사십 장 남짓.’
그것만으로도 의사소통은 충분했다.
일군의 규모가 크니 식량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렇기에 장수의 막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
중요한 장소를 떨어뜨려 놓지 않고 같은 곳에서 지킨다는 의미는 세 가지였다.
첫째, 두 곳을 방어할 여유가 없다는 뜻. 즉, 일만이라는 엄청난 군세인 지금의 경우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둘째, 전쟁을 장기화하지 않고 단기전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 방어 병력을 줄이고 공격에 집중한다는 의미였다.
셋째,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경우. 한 마디로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의미라 봐야 하는 건가…….’
적사결은 눈빛으로 감영과 백리황에게 신호를 주고 먼저 움직였다.
그러고는 팔목의 아대에서 준비해 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은밀하고 효과적인 원거리 공격에는 비도술만 한 것이 없었다.
준비가 끝나고 열 번 정도 숨을 들이켰을까.
서쪽 하늘에 화광이 충천하고 비명 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폭풍대 일조의 야습이 시작된 것이다.
그 상황을 파악한 막사의 경계병도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일 듯 잡혔다.
빈틈을 찾은 적사결은 벼락같이 양손을 떨쳤다.
쇄쇄쇄쇄쇄쇅.
검게 칠해 놓았기에 빛살조차 남지 않은 흑색번개가 여덟 명의 경계병을 고꾸라트렸다.
동시에 튀어 나간 감영과 백리황은 동료들의 죽음에 당황하는 잔존 병력을 상대했다.
그 사이 적사결은 막사를 찢고 난입.
막사 내에는 비상 상황임을 파악한 왜장이 옷을 갖춰 입는 중이었다.
“웬 놈이냐!”
서걱. 툭. 데구루루.
적사결의 일도에 왜장은 그 말을 유언으로 머리통을 바닥에 내려놓아야 했다.
‘첫 번째 놈은 가왜로군.’
곧바로 막사 밖으로 이동.
적사결이 튀어 나가자 감영과 백리황도 상대를 밀쳐 낸 후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들을 왜구들은 감히 쫓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적운 님, 어땠습니까?”
백리황의 물음에 적사결이 짧게 답했다.
“가왜.”
“그렇군요.”
다음 목표는 두 번째 진지.
지금의 진지보다 북쪽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스슥.
적사결 일행이 사라진 후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
그는 다시 은신술을 펼친 듯 어둠에 녹아들며 적사결 일행이 나아간 방향으로 움직였다.
* * *
‘이…… 이럴 수가…….’
폭풍대 일조 조장 방조경은 눈앞의 왜구를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야습은 성공적이라 생각했었다.
한데 조원이 야조의 소리를 응용한 신호를 보내자마자 나타난 두 명의 왜구.
붉은 천을 허리에 감은 두 놈에게 폭풍대원 네 명이 순식간에 압살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놈들과 함께 나타난 흑의인은 이상한 구슬을 던지더니 화마에 뒤덮인 식량 창고를 촛불 끄듯 손쉽게 꺼트려 버렸다.
방조경을 바라보는 붉은 천의 왜구는 서투른 한어로 비릿하게 내뱉었다.
“멍청한 새끼들 잘도 함정인지도 모르고 잘도 기어 들어왔구나.”
왜도를 빼 들고 다가오는 분위기는 실로 흉흉했다.
살기와 비슷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듯 방조경은 가슴 한편이 욱씬거렸다.
더구나 쇠로 만든 거미줄에 얽힌 듯 온몸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몇 번인가 왜구를 상대하며 느껴 본 감각이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 놈은 진짜야.’
꿀꺽.
방조경은 살아서 벗어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놈이라도 저승으로 데려 간다.
촤아앙.
이를 악물고 발검한 방조경이 검초를 전개했다.
일초에 혼신의 힘을 다한 듯 입가엔 핏줄기가 내비쳤다.
내상을 각오하고 내공을 급격하게 끌어올린 것이다.
따당. 따다다당. 따따당.
왜구는 변초와 실초를 구분하지도 않고 오로지 힘과 속도로 방조경의 검초를 모조리 받아 내고 있었다.
더구나 받아 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큭, 무슨…… 검격이 닿을 때마다 진창에 빠져드는 것만 같구나…….’
점차 무거워지고 진득한 감각이 검을 통해 전해졌다.
내상을 등한시 하고 동귀어진의 각오였건만 몸이 지치니 마음까지 점차 무뎌져 갔다.
“목숨을 건 듯한데 꽤 가벼운 목숨이구나! 큭큭.”
왜구는 방조경의 검의를 느꼈는지 비릿하게 웃었다.
“진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일갈과 동시에 내질러진 일도는 평범한 찌르기였다.
하나 방조경에겐 평범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방조경이 뻗은 일검을 무시하고 마주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같이 죽자는 동귀어진.
왜구는 눈빛에서부터 자신의 생명 따윈 무가치 하다는 듯 죽은 시체의 눈깔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내지르면 이놈은 데리고 갈 수 있다.’
방조경은 짧은 순간 그렇게 되뇌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검첨이 놈의 목줄기에 닿기 직전 본능적으로 움츠린 것.
그리고 그 순간 왜구는 왼손을 들어 방조경의 검을 틀어쥐었다.
움찔한 순간이 아니었다면 손과 목이 동시에 꿰뚫렸을 터. 하나 왜구는 그 찰나를 낚아챈 것이었다.
푸욱.
“꺼억…….”
반대로 왜구의 도는 방조경의 늑골을 뚫고 심장을 파먹었다.
“키키키키. 목숨은 버려야 비로소 걸 수 있는 것이지.”
방조경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왜구의 귀기 어린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다.
‘도…… 동료들이 위험해…….’
차마 내뱉지 못한 한 마디.
방조경은 바닥에 쓰러져 차갑게 식어 갔다.
* * *
세 번의 야습과 세 번의 왜장을 처리한 후.
적사결은 숲속에 자리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적운님 왜 그러십니까? 빨리 이동하셔야지요.”
백리황의 물음에 적사결은 고개를 저었다.
“꼬리가 붙었다. 더구나 하는 짓을 보아하니 작전이 노출된 것 같구나. 더 이상의 암살은 소용없겠어.”
“예? 작전이 노출되었다니요? 이번 야습은 극비에 진행되었다 들었습니다. 감 대주님 아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상층부에서도 야습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오늘 즉흥적으로 결정된 작전이라 전해 들었습니다.”
적사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많든 적든 상층부 놈들 중에 작전을 누설한 간간자가 있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 포위망을 설명할 순 없지.”
“포위망…….”
감영은 기감을 고조시키며 주변을 훑었다.
하나 그의 능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다.
“백리 애송이, 너는 어떠냐?”
“……있, 습니다. 어느새…….”
백리황은 포위망을 눈치 채고 신음을 삼켰다.
“첫 번째 진지에서부터 꼬리가 붙기에 반신반의했었다. 한데 그때부터 서서히 포위망을 형성하더군. 두 번째 진지에서 의심이 강해졌고, 방금 전 확신했지. 아까 화마가 오른 곳을 봐라. 화광이 충천한 아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지? 이미 화재를 진압했다는 거다. 작전이 노출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적사결의 설명을 들은 감영과 백리황은 머릿속 한 구석에 경종이 울리는 듯했다.
세 번의 왜장을 베며 확인한 것은 그들이 모두 가왜라는 것.
그 말은 소주성 상층부에 가왜와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떤 의미로 진짜 왜구보다 가왜가 더 무서웠다.
중원인의 행동 양식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구행세를 해야 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그들이었으니까.
“대단하군. 벌써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는 어눌하지만 한어를 쓰는 흑의 복면인이었다.
“처음 붙었던 꼬리로군. 말투로 보아하니 왜놈인가?”
“그렇다.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가 파악하기로 백리씨에 당신 같은 자는 없었다.”
“당연히 없었겠지. 본좌 같은 인물이 어디 흔한가. 큭큭.”
적사결이 이죽거리자 흑의 복면인 뒤의 왜구가 앞으로 나섰다.
“물러나라! 우린 담소나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다.”
“네! 긴조 님.”
신스케라 불린 닌자가 물러나자 긴조가 앞으로 나섰다.
“칙쇼! 단칼에 죽여주마!”
“네놈 따위가? 할 수 있으면 해 봐.”
적사결은 사왕을 매만지며 긴조 앞에 마주섰다.
한데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이며 마치 석양의 그것처럼 핏빛 섬광을 쏟아 냈다.
적사결은 그 모습에 시선을 두며 생각했다.
‘저쪽은 소주성…… 설마…….’
쉬이익.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적사결의 귓가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