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45화>
* * *
‘아…… 패고 싶다.’
지금 적사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약과 암시에 의한 심문이 아닌 구타와 협박으로 놈의 입을 열게 하고 싶었다.
하나 소가주의 몸을 지닌 놈에게 그런 짓을 허용할 은풍대가 아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백리림의 물음에 이천억이 이죽거렸다.
“숙부님의 조카, 백리황이지 않습니까.”
자백제를 먹었다지만 미미한 양이었기에 그것만으로 이천억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딱. 딱. 딱.
백리림은 손가락을 세 번 튕긴 후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천억.”
이천억의 눈동자가 찰나간 썩은 동태 눈깔이 된 후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본래의 눈빛으로 돌아갔다.
그는 방금 전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의식이 있었지만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한 상황을 말이다.
“이제 알겠나? 아무리 네놈이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하나 약과 암시, 두 가지 모두 걸려 든 이상 나의 물음을 피해 갈 수 없다. 하니 순순히 자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흐흐흐. 두 가지 모두라? 잘못되면 백치가 될 수도 있는데 숙부님께선 본가의 후계자에 대한 최소한의 조심성도 없는 겁니까?”
“잘못될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혹여 백치가 된다 해도 네놈이 잘못되는 것이지 소가주의 몸에는 아무 이상 없을 것이니.”
백리림은 정말 그리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차가운 기세를 내보였다.
흑도나 마도와 달리 잔인한 고문을 대놓고 할 수 없어 이 같은 고문이 발달한 정파.
강소성을 주름잡는 백리세가 역시 간접적 고문에 일가견이 있었다.
“…….”
이천억은 여전히 이죽거리고 있었지만 내심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몸을 바꾸는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속내를 파악한 듯 백리림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상황 판단이 되나보군. 자, 본론으로 들어가지. 영혼을 바꾼 방법이 무엇이냐?”
잠시 갈등하던 이천억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말하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오?”
살아만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삶인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살려는 주지. 하나 죽을 때까지 햇빛은 보지 못할 것이다.”
백리림은 달콤한 말로 회유할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
굳이 자백하지 않아도 불게 만들 수 있으니 상관없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이었다.
“빌어먹을…… 휴우…….”
이천억은 욕설과 함께 한숨을 길게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반선주. 그것으로 영혼을 바꾸었소.”
빠드득.
역시 맞구나.
적사결은 이를 갈며 이천억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술을 나눠 마시면 영혼이 바뀌는 것이냐?”
“그렇다. 하나 아무하고나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무슨 조건이 필요하지?”
“별의 기운을 타고난 이들끼리만 가능하다. 나의 경우 무곡성을 타고났지. 나와 몸을 바꾼 백리황은 천동성이었고.”
무곡성은 북두의 제육성, 천동성은 남두의 제사성이었다.
두 별자리 모두 자미두수 중에서도 열네 개의 주성에 속하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칠 때 사용하는 별점에 나오곤 했다.
자미두수란 백 개 이상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명반으로 사람의 운명을 추단하는 점술이었다.
‘그럼 나도 별의 기운을 타고 났단 말인가? 난 무슨 별이지? 고아라서 태어난 일시 같은 건 모르는데…….’
적사결은 갓난아기일 때 천마신교로 팔려가 그곳에서 자랐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주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무허가 알았다?
적사결은 고개를 젓고는 이천억에게 물었다.
“별의 기운을 타고난 이들을 감별할 방법이 따로 있나?”
“있다. 그런 자들은 모두 신체에 붉은 점이 있지. 나도 백리황의 손바닥에 있는 붉은 점을 보고 그 아이가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무허의 왼쪽 쇄골 아래에도 그런 점이 있었다.
자신도 오른쪽 어깻죽지에 붉은 점이 있었고 말이다.
분명 그간 적지 않게 싸워 보았으니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점을 확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반선주는 누가 만든 것이냐? 어떻게 얻은 것이지?”
백리림이 이천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이천억은 갑자기 처량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나는 본디 내 운명을 저주했었소.”
그랬다.
모두가 부러워 할 재복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고독한 삶.
그 삶을 벗어나기 위해 전재산을 기부하고 개방도가 되었지만 재복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이천억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도사를 만났지. 당시 나는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그 답례로 반선주라는 술 한 병을 받았소. 그리고 그는 나에게 반선주의 효능과 대상자의 조건에 대해 말해 주었지.”
이천억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이어서 말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었소. 해서 그것을 천하사괴 그 친구들에게 보여 줬고, 한 친구가 과감하게 그것을 사용했소. 한데 놀랍게도 그것은 사실이었지.”
“네놈과 무허대사 말고 이 짓거리를 한 놈이 또 있다?”
“그만이 아니라 사괴들 모두 사용했을 것이오. 공교롭게도 우리들 모두에게 붉은 점이 있었으니까.”
공교롭게도?
과연 공교로울까? 강호에 우연은 없다.
천하에 별의 기운을 가진 자는 고작 백 명 남짓인데 그들이 천하사괴라는 이름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고 그들에게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반선주가 주어졌다.
적사결은 직감적으로 음모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 도사라는 놈은 누구지? 그리고 처음 반선주를 쓴 놈은 나머지 둘 중 누구냐?”
가장 수상한 건 그 두 사람이었다.
그런 적사결의 물음에 이천억이 담담히 대답했다.
“도사의 정체는 나도 모르오. 극구 만류했지만 술병을 떠넘기듯 맡기고 제 갈 길 갔으니까. 당시엔 그저 약이나 파는 사기꾼 말코도사라고 생각해서 관심도 두지 않았었소. 그리고 처음 반선주를 쓴 친구는 음치 악도겸이오.”
음치 악도겸.
별호 그대로 그는 음악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산동악가라는 대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가문을 버리고 음악을 선택한 괴짜.
그가 평생에 걸쳐 매진한 것은 음공이었다.
사자후처럼 음율에 공력을 더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강호의 종사로 대우 받지 못했었다.
음악은 광대나 기녀와 같이 신분이 낮은 자들이 배우는 것이라 여기는 풍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그는 장례식장에서 음공으로 사람들을 깔깔 웃게 만드는가 하면 잔치집에서 슬픈 곡조로 모두를 울리는 기행을 일삼았다.
“악도겸은 누구와 영혼을 바꿨지?”
“항주의 보옥, 매양옥이란 기녀를 들어 보았을 것이오.”
물론이다.
그녀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절세가인이자 예인.
그리고 그 이름이 걸맞게 뛰어난 노래 실력과 칠현금의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기녀는 왜 들먹…… 이런 씨발…… 설마?”
“그렇소. 그는 매양옥과 몸을 바꿨소.”
“이런 미친! 여자랑?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냐?”
“지금까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오. 어차피 마지막에 암시를 써서 확인할 것 아니오?”
이천억이 백리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백리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앞서 말한 것은 모두 재확인할 것이니 속일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아. 한데…… 악도겸이 남색이었나? 왜 여자와 몸을 바꾼 거지?”
“음악 때문이오. 그 녀석은 늘 자신이 이상적으로 꿈꾸는 노래는 여인만이 가능하다 말했었소. 그것도 아주 뛰어난 성대를 가진 여인 말이오. 더구나 매양옥은 입술 밑에 붉은 점이 있었으니 금상첨화였지.”
좌중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음악에 미쳤다지만 타고난 성별을 버리면서까지 이상을 추구하다니.
‘천하사괴…… 정말 파면 팔수록 모르겠구나…… 이런 미친놈들…….’
적사결은 혀를 차며 이천억을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백리림도 같은 표정으로 이천억을 보다 불현듯 물었다.
“남은 반선주는 어디 있지?”
그렇다. 방법을 알아낸 이상 반선주만 있다면 원래의 몸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나 이천억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진 건 다 썼소. 애초에 반선주는 작은 술병에 담겨 있었고 그나마도 네 명이서 나눴으니 두 잔 분량밖에 되지 않았소.”
이런 개 같은!
적사결은 죽을상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반만 마시는 건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의 말대로 당시 자신이 마신 반선주도 한 모금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그럼 나머지 한 놈이 반선주를 썼다면 남은 게 없다는 거잖아!”
“내 생각엔 그 친구도 사용했을 것 같은데…… 대충 알겠지만 워낙 살업을 많이 쌓은 친구지 않소.”
적사결은 천하사괴의 마지막 놈을 떠올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확실하지 않으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살업을 많이 쌓은 만큼 원한을 가진 이도 많았으니까.
백리림도 그 사실을 아는지 암시를 이용해 다시 한번 이천억의 말을 재확인했다.
손가락을 튕긴 후 앞서의 말이 진실인 걸 확인한 백리림은 침음성을 삼켰다.
“젠장. 사실인 걸 재확인하니 더 짜증 나는 군…….”
적사결이 탄식하자 백리림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시오.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니…… 그리고 그 도사라는 자도 있지 않소.”
백리림의 말에 적사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은 그냥 위로차 건네는 말일 뿐이니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도사를 어찌 찾는단 말인가?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찾기나 마찬가지였다.
“감노.”
“예, 각주.”
“놈을 풍림의 뇌옥에 가두고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시오.”
“걱정 마시오. 한데 이제 어쩔 요량이시오?”
“일단 가주께 이 사실을 보고드리고 향후 행보를 논의할 것이오. 이 일은 우리들만으로 해결하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니 말이오.”
백리림은 자신도 막막한지 한숨을 푹푹 쉬며 이번엔 적사결을 돌아보았다.
“휴우. 일단 그대는 조카를 데리고 다시 와 주시겠소? 내 그전까지 가주께 설명을 드리고 자리를 준비해 놓겠소.”
“알겠소.”
아마도 설명이 아닌 설득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리라.
지금의 심문을 백리검이 본 것이 아니니 쉽사리 믿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 * *
‘하아…… 안 그래도 심사가 복잡한데.’
백리림은 풍림을 나서다 두 명의 여인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머, 숙부님. 혹시 저희가 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리 나와 계시다니요.”
그녀는 단목련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여인은 유모인 양화였다.
“혹시 지난번 일로 온 것이냐?”
“네, 제대로 된 자리는 오늘 가지는 것이 어떨까 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단김에 빼는 것이 좋긴 하겠지.”
“역시 숙부님께선 말이 통하시는 분이시군요. 한데 예서 이럴 게 아니라 백풍각으로 가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단목련의 물음에 백리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망설임 없는 거절의 뜻에 단목련은 표정을 굳혔다.
“어찌…… 그러십니까?”
“네 말대로 쇠뿔을 단김에 빼기 위해서란다. 멀리 갈 것이 무에 있겠느냐. 한 마디면 될 것을.”
“한…… 마디라니요?”
“은풍대는 그 자체로 바람. 누군가에게 귀속될 수 없느니라. 또한 본가에 중차대한 일이 있어 너희들의 혼인은 얼마간 미뤄질 것이니 그리 알거라.”
정신적인 충격을 연이어 얻어맞은 단목련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자신이 은풍대에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 칼 같은 거부의사를 표함은 물론 혼인까지 미룬다는 강력한 한 방이었으니까.
“아…… 아니 그게 무슨…….”
“더 할 말이 없으니 이만 가 보마.”
백리림은 그대로 단목련을 스쳐 빠르게 사라졌다.
겉보기에 평범한 걸음인데도 경공이라도 펼친 듯 그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아…… 아가씨?”
양화는 단목련의 표정을 살피며 난감해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감히 나에게 이런 모욕을 줘!”
태어나 이런 괄시와 면박은 처음이었다.
단목련은 이를 갈며 백리림이 떠난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