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44화>
쉬이이익.
풍신보를 전개한 이천억의 속도는 완연한 절정 고수의 그것이었다.
마치 바람에 올라탄 듯한 움직임은 한 마리 비조와 같았다.
‘안 따라오잖아?’
이천억은 적사결의 추적을 예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법 안이라서 천천히 몰이사냥을 하겠다는 건가? 끙…….’
그럴지도 몰랐다.
지금도 꽤 달렸지만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만 계속되었으니까.
더구나 자신은 진법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았다.
상계에 적을 둔 시절 돈을 들여 써 본 경험은 많으나 직접적인 공부는 하지 않았기 때문.
이는 개방도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식견은 높으나 지식이 없는 것. 그게 문제였다.
‘이런…… 문제가 또 있네…….’
이천억은 걸음을 멈추고 사막 한가운데 멈춰 섰다.
적사결이 말했던 구경꾼의 존재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스스스.
눈앞에 나타난 중년인은 백리림이었다.
이어서 이천억의 시선이 전후좌우를 살피며 굴렀다.
사방에 한 명씩, 네 명의 노인이 나타나 자신을 기준으로 포위망을 형성했다.
“숙부님. 어찌 된 일입니까?”
이천억의 물음에 백리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닥쳐라! 금개 이천억!”
“……!”
이천억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숙부님.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나 일단 제 말도 들어 보십시오.”
“무슨 얘기? 아까의 대화는 다 들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발뺌은 소용없을 것이다.”
“하! 숙부님! 설마 몸이 바꼈다느니 하는 미친 말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
백리림은 말없이 이천억을 주시했다.
“다른 사람의 간악한 말이 아닌 저를 보십시오! 숙부님의 조카이자 대백리세가의 소가주인 저, 백리황 말입니다!”
“…….”
그래도 백리림이 말이 없자 이천억은 고개를 숙여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며 섬뜩한 눈빛을 발했다.
“아무래도 숙부님께서 풍림 같이 외진 곳에 오래 계시다 보니 정신이 온존치 못 하신가 봅니다.”
이천억의 입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독설이 나오자 백리림이 피식 웃었다.
“후후, 형님 가주님께 그렇게 둘러 댈 셈인가 보군. 하나 과연 그럴 기회나 있을까?”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여긴 풍림이다. 네놈은 결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큭큭, 상관없습니다. 숙부님께서 나가게 해 줄 테니까요.”
“뭐라?”
그 순간이었다.
푸우욱.
이천억은 검을 자신의 배에 찔러 넣었다.
“끄으으윽.”
그러고는 그대로 고꾸라지자 백리림을 비롯한 네 명의 노인들이 기함했다.
“안 돼!”
백리림은 이천억에게 다가가 다급히 상세를 살폈다.
“이…… 이런 죽일 놈!”
자상의 위치로 보아 장기를 건드린 것으로 보였다.
바로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시급을 요하는 중상이었다.
타타탁.
백리림이 서둘러 점혈을 짚었다.
하나 장기에 손상을 입은 탓에, 쉽사리 지혈이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노괴 같으니!”
다분히 의도적인 자해.
이대로라면 놈의 생각대로 자신이 풍림 밖 의약전으로 옮겨야 할 상황이었다.
“각주, 어쩔 것이오?”
감노의 말에 백리림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긴요. 어찌 되었든 몸은 소가주의 것. 이대로 놔둘 순 없지 않습니까?”
백리림의 말에 은풍대는 좁혀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
의약전으로 가는 즉시 천풍각의 가주에게 기별이 갈 터.
그리 되면 놈이 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었다.
“만일 가주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각주와 우리를 믿어 줄 것이라 생각하시오?”
“모르겠습니다. 가주께선 은풍대에 대해 알고 계시는 유일한 분이지만 강동 제일신룡이 된 아들을 대하는 소문은 이전과 딴판이니까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맞춰 돌아가도록 생각한다는 것.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던 이전의 백리검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만큼 아들을 아끼는 마음이 커졌다는 방증이었다.
그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뭐야, 이건?”
적사결이 등장해 내뱉은 첫말이었다.
당연히 이천억을 구속하고 심문 중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놈을 잡은 것은 맞으나 이천억은 배에 검을 꽂은 채 누워 있고 은풍대원들은 죽상이었다.
“아니 이렇게 칼침을 놔 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다섯 명이서 이놈 하나 사로잡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오?”
“우리가 한 게 아니오.”
“응? 그건 또 무슨…….”
“놈이 스스로 자해했소.”
백리림의 말에 적사결은 이마를 짚고 탄식했다.
“아이고, 이런 골 때리는 새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자신의 몸을 인질로 삼은 것이다.
‘이게 될려나 모르겠네…….’
적사결은 이천억에게 다가가 살폈다.
꽤 중상이었고 놈은 의식이 없었다.
“이보시오. 어쩌려는 것이오?”
감노가 적사결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이대로 놈이 바라는 대로 의원에게 갈 것이오? 잠자코 내게 맡겨보시오.”
적사결은 어깨를 흔들며 감노의 손을 떨쳤다.
그 모습을 보며 백리림이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하나만 묻겠소. 아까 그대도 무허대사와 몸이 바뀌었다 했는데. 도대체 정체가 뭐요?”
“말해도 모를 터인데.”
“그래서 지금껏 정체를 숨기고 무허대사 행세를 했단 말이오?”
백리림의 질문에 적사결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 불똥이 튀는 듯했다.
그 순간이었다.
팍. 푸슈슉.
적사결이 번개같이 이천억의 배에 꽂혀 있던 검을 빼 버렸다.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
백리림과 은풍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동작 그만!”
적사결의 일갈에 그들은 그와 이천억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내가 누구건 당신들이 방법이 없다면 나에게 맡겨라!”
더 이상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과감한 수단을 쓴 것이었다.
백리림은 이를 빠드득 갈면서 은풍대를 뒤로 물렸다.
“잘못되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백리림은 자신도 물러나며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천억의 배에 손을 올려놓았다.
‘후우…… 남의 몸인 건 마찬가지다.’
지금 자신의 영혼이 들어와 있는 몸.
이 몸은 본래 자신의 몸이 아닌 무허의 몸이다.
영혼이 그릇으로 삼은 몸에 지배력이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 다른 그릇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할까?’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적사결은 마음속으로 ‘남의 몸인 건 마찬가지’라는 정의를 내렸다.
의념은 신념을 기반으로 할 때 더욱 증폭된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의념이 천축유가신공의 구결과 결합되자 기적이 일어났다.
파츠츠츠.
마치 자신의 몸인 양 이천억의 상처를 수복하는 적사결이 지그시 미소 지었다.
‘삼분지 일 정도뿐이지만 가능은 하구나.’
더디지만 확실히 재생이 되고 있었다.
적사결은 이천억의 상처 주변에 한해 세포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제어해 갔다.
장기의 상처가 아물었음이 느껴지자 적사결은 손을 떼고 한숨을 돌렸다.
“휴우.”
그와 동시에 백리림과 노인들이 달려와 이천억을 살폈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치료법이었다.
“그리 멍청하게 쳐다만 보지 말고 어서 마혈을 짚지 그러시오?”
적사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제야 백리림이 나서 이천억의 마혈을 짚었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런 기막힌 의술이라니…….”
화타나 편작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백리림의 뇌리에 이처럼 기상천외한 의술을 보인 인물은 없었다.
“적운. 내 이름이오. 초야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내세울 만한 별호는 업소.”
“스승은? 사문은 어디오?”
“사부님의 존함은 적송. 내 아버님이시오. 사문은 일인전승의 적검문. 강호에 나온 적이 없기에 아마 모를 것이오.”
물론 모조리 거짓이다.
적사결은 고아였고 적검문은 대충 지어 낸 이름이었다.
하나 그런들 어찌 알 것인가.
강호엔 기인이사가 모래알만큼 많았고 알려지지 않은 문파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무허대사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 거요?”
“없소…… 아니 이젠 악연이 있군. 내 몸을 빼앗아 갔으니.”
“그대는 어찌 몸이 바뀐 거요?”
“말하자면 긴데…… 간단히 요약해서 말해 주겠소.”
적사결은 대충 지어서 둘러 댔다.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자작하는 와중에 그곳을 지나던 승려를 만났다.
그가 무허였고 대뜸 마시던 술을 뺏어 먹었다.
자신이 화를 내자 허리춤에 있던 술을 건네며 같이 한잔했다.
그러고는 몸이 바뀌었다.
어찌 보면 지어 낸 말이라 할 수 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무허는 술을 보면 환장하는 취불이었고 천하사괴였으니까.
백리림은 의심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닌 듯했으나 일단 경계심이 누그러져 있었다.
“증좌가 없어 다 믿기는 어려우나 일단 당신에게서 사공이나 마공의 흔적은 볼 수 없었소. 당장의 의심은 거둘 것이나 백리세가에 있는 한 우리는 당신을 주시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거면 충분하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자신은 이천억에게서 반선주의 비밀만 밝히면 되는 것이니까.
“자, 그럼 시작합시다.”
백리림은 이천억에게 다가가 작은 약병을 입에 갖다 대었다.
앞서 백리황에게도 사용한 적이 있는 자백제였다.
한데 이번에는 하나의 과정이 더 있었다.
딱. 딱. 딱.
이천억의 귓가에 손을 세 번 튕기는 행위였다.
‘암시로군.’
약과 암시, 둘 중 하나만 제대로 다뤄도 고신(拷訊)에 있어서 일류 소리를 듣는다.
하나 두 가지를 적절히 사용하는 전문가는 생각보다 적었다.
이는 약이 육체적, 암시가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치기에 분야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백리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타타탁.
암시가 끝나자 백리림의 손이 이천억의 혈도를 누볐다.
그러자 의식이 없던 이천억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고 있었다.
“여…… 여긴……!”
눈앞의 광경에 이천억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여섯 명의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깼냐? 이 개새끼야!”
* * *
단목련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면서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 머리칼을 만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생각이 정리되셨나요?”
양화는 그녀가 갓난아기 때부터 지켜본 유모였다.
눈빛만 봐도 그녀의 심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눈은 아까의 혼란스런 마음에서 벗어나 본래의 총기 가득한 빛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응. 결심했어.”
“어찌하실 건가요?”
“백리 공자와 혼인할게.”
“호호, 잘 생각하셨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니 어떠셨나요?”
양화는 흐뭇한 표정으로 단목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혼인 준비를 위해 백리세가로 직접 온 것은 혼인의 결심 때문이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정략 결혼이지만 스스로의 결정을 더하고 싶었던 것.
거기에 그녀가 정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만약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가문에서 정한 혼인이라도 그녀는 파할 예정이었다.
안 되면 가출을 해서라도.
“첫째, 사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백리 공자를 보고서 그가 정말 강동 제일신룡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남편감으로서 부족함은 없다는 판단이 들었지.”
단목련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둘째, 아버님의 추측대로 은풍대는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어. 은풍대의 힘을 얻게 되면 본가가 백리세가를 역으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내가 은풍대를 얻고 나서 확인해 볼 거야.”
창가를 등지고 양화를 돌아본 단목련의 뒤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야망을 빛내듯이.
“아주 바빠질 것 같아, 유모.”
“한데 은풍대를 얻을 계획은 있으신가요?”
“아직 없어. 우연한 기회에 만났을 뿐 제대로 된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거든.”
“제대로 된 자리는 약속하셨나요?”
“약속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가면 만나 주실 거야.”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단목련이 양화를 향해 하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