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43화>
* * *
스승.
누군가에게 특정 분야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가르침을 내리는 분야는 그 영역이 방대했다.
간단하게는 학문이나 기술과 같은 전수에 해당하는 영역부터 삶의 지침이나 기준 등 정신적인 부분까지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이르는 것이었다.
하니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을 모두 스승이라 지칭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허…… 대사님께서 제 스승님으로 오셨다는 말인가요?”
이천억은 눈앞에 자리한 적사결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말했다.
‘이 자식이 여긴 왜 온 거지…….’
자신이 이천억이란 걸 알고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도 백리세가의 자제와 몸을 바꿀 것이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저는 백리세가의 후계자입니다. 어찌 대사님께 사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천억의 물음에 적사결이 푸근한 미소로 답했다.
“사사라……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지. 나는 단지 몇 수 가르침을 내리는 것일 뿐이니 사승관계를 맺는다 생각지 말고 가볍게 배우면 될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이천억은 내심 불안했다.
자신이 알던 무허는 과거 가르침을 핑계로 싸가지 없는 후기지수를 쥐어 팬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리황은 평판도 좋고 조용한 놈이었는데 설마 그러려고 온 건 아니겠지?’
만일 패고 싶어 온 것이라면 곤란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공에 있어 무허는 차원이 다른 괴물.
그가 때리고자 한다면 맞지 않고 배길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놈이 무허가 맞긴 한 걸까?’
눈앞의 무허가 혹시 몸을 바꾼 다른 놈은 아닐까 의심하는 이천억이었다.
하나 증좌가 없으니 일단은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수련 장소로 갈 테니 따라오거라.”
적사결은 이천억에게 그리 말한 후 걸음을 옮겼다.
이천억은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수련 장소라니요?”
“아무리 가벼운 가르침이라도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무공을 알려 줄 순 없지 않느냐.”
“그래도 본가에서 제 거처만큼 인적이 드문 곳도 없을 텐데요?”
백리황의 몸을 얻고 난 후 여러 차례 가솔들에게 주의를 주었기에 자신의 거처는 흔한 하인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상함을 느낄 수 있기에 일부러 폐관 수련처럼 환경을 조성한 것이었다.
“네 거처보다 인적이 드문 곳이 있더구나. 가 보면 알 것이니라.”
“혹시…… 말씀하시는 장소가 풍림입니까?”
자동 폭발 장치가 가동된 줄 알고 도망치듯 떠났던 백풍각이 있는 곳.
이천억은 어제 그 일도 그렇고 괜히 풍림이 꺼려졌다.
한데 그의 기대와 달리.
“맞다.”
“…….”
아, 찝찝하다.
이천억은 적사결의 뒤를 따르는 내내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 * *
“모두 준비하십시오.”
백리림의 신호에 네 명의 노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약속대로 적사결과 이천억이 풍림의 입구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금개 이천억. 감히 본가의 후계자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백리림의 신형이 투명해지며 풍림의 배경에 녹아들었다.
그가 사라지자 주변에 버드나무잎이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이건?”
이천억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며 시야가 어지러워짐과 동시에, 주변 환경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러한 현상은 오직 진법의 발현 때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대사님. 이게 어찌 된 것입니까?”
이천억의 물음에 적사결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수련 장소로 풍림을 소개해 주신 분은 네 아버지이니라. 풍림의 진법 속에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수련에 매진할 수 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구나.”
적사결은 이천억을 함정에 몰아넣었지만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절정 고수란 맹수를 사냥함에 있어 최후까지 방심은 금물이었다.
“하면 여기서 수련을 한단 말이군요.”
주변을 돌아본 이천억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러난 환경은 사막이었다.
방금 전까지 숲속에 있었건만 한순간에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것이었다.
‘그새 진축을 수리하다니 제법이군.’
적사결이 부숴 놓은 진축을 감쪽같이 고쳐 놓은 것은 은풍대의 솜씨였다.
취선에서의 만남 이후 밤을 새운 결과물인 것이었다.
“자, 무대는 마련되었고 이제 시작해 보자꾸나.”
“네, 대사님.”
“우선 네 실력을 봐야겠으니 익히고 있는 무공을 시연해 보거라.”
적사결의 말에 이천억은 검을 뽑고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고는 눈에 기광을 빛내며 바람처럼 움직였다.
파파파팟.
풍신보의 현란한 보법에 천풍검법의 초식이 어우러졌다.
쾌속하지만 단순한 찌르기는 풍신의 발걸음이 더해지자 현묘하기 그지없는 검초로 탈바꿈했고, 변의 묘리에 집중한 검초는 속도의 부족함을 보법으로 메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보법과 검법, 그리고 공수의 조화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무공이 보법에 꽤 치우쳐 있다. 뛰어난 보법의 성취가 검초를 보완하고 있음이야.’
물론 보법은 무공의 기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놈의 무공은 상당한 경지라 할 수 있었다.
하나 그것이 통하는 것은 일류까지.
절정의 경지는 모든 방면을 극한까지 다듬어야 진정한 절정에 이르렀다 할 수 있었다.
‘풍신보는 큰 관점에서 본다면 취팔선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 놈의 장기가 권법인 만큼 검법과는 잘 맞지 않는 모양이군.’
적사결은 이천억의 시연을 보며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천억의 무공이 지닌 장단점이 뚜렷하게 보이는 중이었다.
“대사님. 기공술을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초식을 전개하는 와중에 갑작스런 이천억의 제안이었다.
적사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슈슈슈슈슉. 파아앗.
이천억의 검이 잔영을 남기더니 아홉 개의 검기가 사방으로 발출되었다.
천풍검법의 광역기, 구궁신풍이었다.
‘엥? 이 자식 봐라?’
아홉 검기가 폭풍처럼 적사결에게 날아들었다.
짧은 순간 신형을 회전시키며 대부분의 검기를 피했으나,
피핏. 촤악.
하나는 어깨 부근을 스치고, 다른 하나는 왼쪽 허벅지의 삼분지 일 가량을 베어 냈다.
그와 동시에 피가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 친구가 아니었군.”
“어찌 알았지?”
적사결은 한쪽 손으로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누른 채 말했다.
“그 녀석은 남을 가르칠 때 학생의 상태를 진단하는 친절한 녀석이 아니거든. 뭐 본인이 워낙 천재다 보니 모자란 놈들 가르치는 걸 싫어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렇지. 그런 불친절한 새끼였지. 본좌가 그걸 간과했군.”
“뭐 녀석에 대해 알 만큼 알아도 소림승이란 위치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곤 하지. 그런데…… 누구냐 넌? 무허 녀석과 몸을 바꾼 걸 보면 보통 놈이 아는 듯한데?”
“본좌에 대해서는 차차 알게 될 것이고…… 일이 이렇게 된 거 하나 묻지. 반선주, 그것이 영혼을 바꾸는 방법인 것이냐?”
“끌끌, 궁금하겠지. 하나 그걸 그리 쉽게 알려 줄 것 같으냐? 죽어서 혼백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니 그리 재촉 말거라.”
이천억은 적사결을 향해 다시금 검을 겨누었다.
“망할 능구렁이 새끼들. 이만큼 허점을 보여 줘도 도무지 물지를 않는군.”
적사결은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피 묻은 손을 승복에 닦았다.
그의 상처는 더 이상 상처라 할 수 없었다.
근육을 조이고 지혈한 후 상처 부위를 재생시킨 것이었다.
“그만한 상처가 사라져? 무슨 사술이냐!?”
이천억은 자상이 말끔히 사라진 허벅지를 보며 일갈했다.
그로서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술은 무슨.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다 나아!”
쇄액.
적사결의 신형이 쾌속하게 짓쳐 들었다.
동시에 이천억의 검이 바람처럼 날았다.
파카카카캉.
적사결의 손과 이천억의 검이 충돌하며 금속음이 이어졌다.
그것은 그의 손이 천축유가신공으로 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형태로 손날을 세운 뒤 경화시키니 손 자체가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파치치칭.
불꽃이 튀며 이천억의 검이 튕겨나갔다.
미숙한 검초 사이를 적사결이 정확히 공략하자 낭패를 본 것이었다.
‘크윽. 그새 검초를 파악한 건가…….’
숨긴다고 숨기고 최대한 적게 보여 주었다 여겼다.
하나 그 짧은 시연에서 상대는 적잖게 자신을 파악한 것이었다.
이는 적사결의 정체를 몰랐기에 그의 식견을 간과한 것이라 어쩔 수없는 부분이었다.
“큭큭, 권이 아니라 답답하지?”
적사결이 따라붙으며 이천억을 압박해 갔다.
무기를 들지 않던 자가 무기를 들면 공격로가 한정되어 움직임에 제한이 생긴다.
아무리 절정 고수라도 이천억은 아직 검에 익숙하지 않기에 당연한 약점이었다.
“흥! 내 아무리 검이 서툴다지만 내공도 쓰지 못하는 놈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콰우우우웅.
옅은 반투명 검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강동 제일신룡이라는 별호를 가지게 해 준 기예.
촤좌자자자작.
검강이 더해진 초식은 허초 하나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살상기였다.
더구나 아무리 경화되었다지만 검강은 손으로 받아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번은 받아칠 순 있어도 결국 팔이 잘릴 거다. 아무리 재생력이 있어도 잘린 팔을 붙이진 못할 거야.’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른다.
하나 적사결은 본능적인 판단으로 계산을 내렸다.
지금으로서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큭큭, 내공을 못 쓰니 답답하지? 아무리 무허의 몸을 얻었어도 보리연화공은 구결을 모르는 이상 사용하지 못하니 갑갑할 것이다. 후후후.”
앞서 말한 말을 되돌려 주는 이천억이었다.
그는 보리연화공이 미완성이기에 구전으로 전해지며 비급 또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허의 무공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이죽거리는 것이었다.
“고작 사술에 의지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쇄애애액.
이천억의 검이 허공에 일자 궤적을 남기며 그어졌다.
풍신보가 더해진 지독하게 빠른 쾌검이었다.
이천억의 말대로 제대로 보법을 발휘할 수 없기에 적사결은 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하나.
푸우욱.
검이 왼쪽 어깨를 뚫고 등 뒤로 빠져나왔다.
서걱. 푸화악.
그 상태로 휘두른 검.
강기가 서려 있기에 손쉽게 적사결의 쇄골을 부수고 어깨를 베어 낸 것이었다.
앞서 허벅지를 베어 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중상.
왼쪽 팔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너덜거렸다.
푸쉭. 푸시시싯.
잘려진 동맥에서 선홍색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적사결은 무심히 그걸 보고는 시선을 이천억에게 돌렸다.
“네 말대로 이놈의 내공은 까탈스럽고 구경꾼도 있어 본좌가 몸을 사린 점이 있다.”
“뭐? 구경꾼?”
이천억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그의 기감에 잡히는 자들은 없었다.
“진법 속에 동화되어 있으니 아무리 네놈이라도 찾지 못해.”
“……!”
“본좌에게 집중해라. 지금부터는 제대로 상대해 줄 테니까.”
적사결의 안광이 빛나자 어깨의 피가 멎고 잘린 상처가 수복되어 갔다.
동시에 승복이 물속에 잠긴 듯 넘실거렸다.
점차 강렬한 기공이 운용되자 기운이 유형화되고 공기가 무겁게 주변을 침식해 갔다.
“어…… 어떻게?”
“구결을 모른다 하여 내공의 운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잖나?”
“하나 보리연화공은 내공의 응집력이 높은 특성 때문에 의지만으로 다루기 어려울 텐데…….”
“그 어려운 걸 본좌는 해낸 거지. 후후. 한데 무허의 친우라 그런지 소림 중놈들도 모르는 걸 꽤 알고 있구나?”
“…….”
이천억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가 입을 다문 것은 그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막의 열기가 주는 무거운 공기와 더불어 적사결이 발산하는 엄청난 압박감.
내공까지 사위를 옥죄니 숨이 턱 막히고 마치 심해에 잠긴 듯 몸이 무거웠다.
‘엄청난 내공이다…… 무허 녀석…… 저런 막대한 내공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몸을 바꾸다니…… 나도 나지만 녀석은 진짜 괴짜구나…….’
평생을 수련해도 일갑자의 내공도 지니지 못한 무인들이 부지기수다.
한데 그 다섯 배인 오갑자의 내공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 무허를 생각하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천억은 적사결에 대해 불현듯 두려움이 몰려왔다.
범상치 않은 사술부터 그 무허가 내공을 포기하며 몸을 바꾼 상대.
더구나 구결 없이 다루기 어려운 무허의 내공을 저토록 유연하게 다루기까지.
주르륵.
‘내…… 상대가 아니다…….’
이천억은 계산이 빠른 인물이었다.
견적이 나오자 발은 곧바로 풍신보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적사결은 피식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허세도 가끔 부릴 만하군. 아이고, 어깨야.”
급하게 어깨의 상처를 수복했지만 겉만 멀쩡할 뿐 아직 속은 곯아 있었다.
어깨를 툭툭 두드린 적사결이 이천억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당신들도 구경만 하지 말고 일 좀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