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42화>
* * *
“이런 쳐 죽일!”
적사결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었다.
“감노, 진정하십시오.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각주!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이까? 그 씹어먹을 늙은이가 본가의 소가주를 건드렸다는데!”
“소가주에 관한 일이니 더욱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백리림의 말에 감노는 씩씩 거리며 분을 삭혔다.
“휴우. 대사님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근자에 소가주가 갑자기 변한 것 같다는 말은 많았습니다. 갑자기 무위가 급격하게 상승한 것부터 침착하고 조용하던 성정이 대범하고 과감하게 변한 것까지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한데 그것만으로 소가주가 금개와 몸이 바뀌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지요. 본가의 소가주를 정황만으로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지요.”
적사결은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대사님이 말씀하신 진짜 소가주를 직접 만나보고 싶군요. 모처에 있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a“물론입니다.”
“아시겠지만 대사님을 비롯해 금개는 천하사괴의 일인. 저희로서는 두 분이서 장난을 치고 계신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습니다. 해서 여기서 단언하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소림과 개방은 본가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순 없을 것입니다. 본가의 후계자를 능멸한 대가는 어느 한쪽이 멸문할 때까지입니다.”
백리림의 서늘한 말에 적사결이 우묵한 눈을 들며 말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장난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요. 노납이 금개를 찾아갔을 때 이미 몸이 바뀌어 버린 백리 소가주를 만났고 그의 참담한 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가주는 하루아침에 젊은 육신을 빼앗기고 가문과 부모를 잃었습니다. 불제자로서 이를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친우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짓을 말입니다.”
“…….”
백리림과 네 명의 은풍대는 침음을 삼켰다.
“친우가 저지른 짓을 수습하기 위해 직접 온 것입니다. 하니 부디 그의 목숨만은 보존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납이 그와 함께 평생 부처님의 품을 벗어나지 않고 회개할 터이니 말입니다.”
실수로라도 금개를 죽여선 안 된다.
반선주의 비밀을 밝히고 몸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내기 전에는 말이다.
“대사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백리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 각주! 놈을 살려줄 것이란 말이오?”
“감노, 대사님이 아니었다면 우린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본가의 모든 이가 지금의 소가주를 반기면 반겼지 의심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힘겨운 걸음을 하신 무허대사님의 숭고한 뜻을 생각해서라도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십니까?”
백리림의 말에 다른 세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각주의 말이 맞소.”
“동의하오.”
“당연히 그래야지 않겠소.”
백리림은 흐뭇하게 웃으며 적사결을 돌아보았다.
“대사님 뜻대로 따를 것이니 오늘 밤 진짜 소가주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시지요. 장소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팔선루에 취선을 빌려 놓겠습니다. 그곳으로 오시지요.”
팔선루는 여덟 개의 배를 운용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중 정취를 즐기는 용도의 배가 취선이었다.
‘하필 취선이냐. 재수없게.’
* * *
천리객잔.
백리황이 묵고 있는 곳으로 미리 약속된 곳이었다.
적사결은 점소이에게 들은 객방으로 찾아가 문을 열었다.
“적운 님!”
문을 열고 들어온 적사결을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백리황이었다.
그리고 십이월과 묘 선생은 그 뒤에 담담히 서 있었다.
“보자마자 호들갑 떠는 걸 보니 성과가 있었나 보구나.”
“예! 이제 진짜 절정 고수가 된 기분입니다.”
백리황의 말에 적사결이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아니. 아직은 아니지. 스스로 절정 고수가 되었다 자신하려면 진짜배기 절정 고수를 죽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니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날 때까지 겸손하거라.”
“……예.”
백리황은 곧바로 자신감이 무너져 버렸다.
정말 절정 고수 되기란 엄청나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랜만이구나. 선생도 오랜만이오.”
백리황이 십이월과 묘 선생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주군!”
십이월은 부복하며 포권했다.
하지만 적사결이 주의를 준 것이 있기에 천마신교의 구호를 외치진 않았다.
“간만입니다, 적…… 운님.”
묘 선생은 교주를 입에 올리려다 꿀껌 삼키고는 가명을 가까스로 내뱉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내 인선이 딱 들어맞은 모양이군. 후후후.”
“그러게나 말입니다. 진짜 누구 말대로 되어 버렸군요.”
묘 선생이 십이월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영혼이 바뀌는 경험이라니. 적운 님께서는 별걸 다 경험해 보는군요.”
“휴우, 불혹을 넘기고부터는 웬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부했는데 이번만큼은 본좌도 당황스러웠소.”
적사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자, 인사치레는 이 정도로 하고 백리 애송아.”
“네, 적운 님.”
“만나야 할 자들이 있으니 같이 좀 가야겠다.”
“누구요?”
“가 보면 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십이월과 묘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고, 백리황은 어리둥절해 하며 서둘러 나가는 적사결의 뒤를 따랐다.
‘다들 나만 보면 어디 가자 그러냐…… 에휴.’
또 뭐가 있을지 심히 걱정되는 백리황이었다.
* * *
‘만날 사람이 숙부님이었다니.’
취선에 오른 백리황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네 명의 노인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가운데 앉은 자는 숙부, 백리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백풍각에서만 두문불출하는 숙부는 본가에서도 가장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나마도 가문의 행사가 있을 때에만 볼 수 있어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이인 것이었다.
“사정은 들었으나 그대가 본 각주의 조카인 걸 아직 확신할 수 없으니 일단 존대를 하겠소.”
백리림의 말에 백리황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할 것이오. 하나 그전에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켜시오.”
“무엇이 들었습니까?”
“약간의 자백제가 들어 있소. 정신을 놓게 만들 정도도 아니고 단지 의도적인 거짓말을 배제하기 위함이니 본인에게 믿음을 주려면 마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마시겠습니다. 미심쩍으시면 더 넣어도 좋습니다.”
백리황의 대답에 백리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세상엔 강력한 자백제에 대한 방비로 무의식에 암시를 거는 경우도 있으니 의식이 있는 편이 거짓을 판별하는 데 더 용이하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백리황은 눈앞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자, 지금부터 대답에 머뭇거림이 있다면 그 즉시 그대는 금개 본인이라고 여길 테니 있는 그대로 대답하시오.”
“알겠습니다.”
백리림은 백리황이 대답하자마자 질문을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백리황이 머리가 굵어지는 시기에 백리림은 풍림으로 들어갔으니까.
하나 소가주의 어린 시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백리림이었다.
은풍대가 음지에서 지켜야 할 우선 순위를 따지자면 가주인 백리검 다음이 백리황이었으니 말이다.
사소한 것 하나부터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까지 백리림이 준비한 질문은 치밀했다.
백리황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확실한지 여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백리림의 눈빛에 압도되었기 때문인지 입이 절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질문이 쏟아진 후.
“흐음…….”
백리림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머릿속에서는 치열하게 대답을 산정하고 있었다.
‘진짜 소가주인가…….’
대답이 완벽했다면 금개라고 의심했을 것이나 정답률로 보자면 칠 할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
일단은 백리림이 사전에 정한 범위 내였다.
십대 중반의 나이가 지닌 기억력은 생각보다 왜곡이 많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게 섞은 질문이었기에 칠 할을 넘으면 백리황이 아니란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믿어 주시는 건가요, 숙부님?”
한참 동안 말이 없는 백리림을 향해 백리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을 믿어 주지 않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질문에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겠소. 그대가 정말 본 각주의 조카인 백리황이라면 본가의 소가주라는 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는…….”
백리황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주저했다.
그러자 적사결이 다가와 손을 휘둘렀다.
빠악.
“백리 각주께서 머뭇거리지 말라 미리 못 박지 않았느냐. 자, 머릿속 번뇌가 사라졌을 테니 속 시원하게 말해 보거라.”
쓸데도 별로 없는 멍청한 대갈통 굴리지 마라.
있는 그대로의 날것만 보이는 것이 네 장점이니.
적사결이 눈빛으로 그리 말하자 백리황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이런 때는 솔직해야 하는데…… 소가주자리…… 한때는 잘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죠…… 후…….”
백리황은 한숨을 내뱉은 후 취선 아래 흘러가는 물결을 보며 말했다.
“열한 살이었나? 그런 눈빛을 처음 받았을 때가…… 백풍현원공을 배우고도 내공을 느끼지 못하고 축기가 안 되자 할아버님께서 보여 주신 눈빛은 무척이나 시렸습니다. 열두 살 즈음 천풍검법의 초식을 반도 익히지 못하자 아버지께선 한심한 눈빛으로 제 가슴을 후벼 파셨었죠. 열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때까지 전 삼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저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그 추운 겨울은 끝나지 않더군요.”
찰랑.
물속에서 뛰어오른 물고기의 비늘이 달빛에 반사되었다 사라졌다.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저는 용이 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고작해야 미꾸라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막연히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겉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검을 휘두르고 노력했지만 속은 엉망진창이었죠.”
백리황은 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억지로 삼킨 채 말을 이었다.
“소가주…… 저는 사실 다시 소가주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소가주에 어울리지도 않고요. 한데 이렇게 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가문의 사람들……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두 손을 꼭 쥔 백리황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마음이 경동한 것을 추스르느라 그런 것이었다.
“후후후후.”
백리림은 말없이 나직이 웃었다.
“네 아버지 젊었을 때와 아주 판박이구나, 하하하.”
“예?”
백리황의 반문에도 한참을 웃은 백리림은 푸근한 미소로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도 너만 한 나이 때 세가를 뛰쳐나가 가출하신 적이 있었다. 이거야 원, 씨도둑질은 못한다더니.”
백리림은 백리황의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말했다.
그의 뒤에 시립한 네 명의 노인도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는 약관이 될 때까지 삼류였지. 흐흐.”
“가출한 이유도 똑같고 돌아온 이유도 같으니 어찌 의심할 수 있을꼬. 허허허.”
“정말 소가주가 맞으시구려. 허어…… 어찌 이런 기사가…….”
“이 호로 금개 자식! 당장 가서 주리를 틉시다!”
노인들의 말에 백리황이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약관이 될 때까지 삼류였다고요? 그럴 리가요?”
강동 십대고수로 꼽히는 아버지였다.
백리황으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정말이다. 본가의 가전 무공, 특히 가주 직전의 비전무공은 정종 무공 중에서도 성취가 극악하게 느리지. 다만 일정한 수준을 넘어가면 반대로 사공이나 마공에 못지않게 성취가 빨라지는 특징이 있단다. 그리고 네 어린 시절 아버님이나 형님께서 그런 눈빛을 한 것은 너에게서 예전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엔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그 당시의 벽은 하잘것없으니 자기도 모르게 당시의 한심한 자신을 본 것이지.”
“…….”
“안 믿기느냐? 하면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그분들께서 너에게 계속 그런 눈빛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언뜻 언뜻 자신을 닮은 너를 보며 그 당시를 떠올린 것이 분명하단다.”
“……!”
한참을 생각하던 백리황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숙부의 말대로 지속적으로 그런 것이 아닌 찰나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하나 십대에 접어들어 예민했던 자신은 당시 그것을 너무도 큰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툭. 툭.
백리림이 백리황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네가 소가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니라. 너는 본가의 후계자로서 당당할 자격이 있단다.”
그 모습을 보며 적사결은 한심한 얼굴로 생각했다.
‘후계자가 고작 삼류라는데 소임을 다해? 당당할 자격이 있어? 참나…… 별 개똥같은 철학도 다 있군.’
자신의 후계자가 삼류라면 당당하게 다리몽둥이를 부숴 버릴 것이다.
책임을 느낀다면 그만한 성과를 내고 결과를 보이는 것이 수장의 자리이니 말이다.
적사결은 짧게 혀를 차고 외쳤다.
“꼴값들 다 떨었으면 개새끼 잡으러 갑시다.”
백리림과 노인들이 황당한 얼굴로 적사결을 돌아보았다.
‘아차!’
적사결은 반장하며 불호를 읊조렸다.
“아……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