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41화>
묘 선생이 백리황과 십이월을 이끈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절벽을 아래에 두고 낡은 다리가 밧줄 두 개에 의지해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여기네.”
묘 선생이 백리황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백리황이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가…… 기관진식이라고요?”
“정확히는 저 다리가 그렇지.”
그가 가리키는 다리는 기관진식이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다 믿기지 않았다.
그냥 그런 낡은 다리로 보일 뿐이었다.
“그대가 치를 시험은 저 다리 끝까지 가는 것이네.”
“엄청…… 낡았는데 다리가 끊어지진 않겠죠?”
“끊어질 수도 있지. 저놈을 만든 지 십 년이 넘었으니까.”
“뭐라고요? 그럼 하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확인하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백리황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노부가 이래봬도 강호에서 손꼽히는 기관진식의 대가네. 대가는 세월의 흐름조차 변수로 계산할 수 있기에 대가라 불리는 것이지. 생로만 잘 찾아 들어가면 끊길 일은 없을 것이야.”
묘 선생이 팔짱낀 손을 불뚝한 배 위에 올려놓은 채 말했다.
백리황은 왠지 믿음이 안 갔으나 십이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 저런 사람이 인정하는 노인네라면 대가라는 말이 맞겠지. 믿어 보자.’
백리황은 바람에 휘청거리는 다리 앞에 서서 침을 꼴깍 삼켰다.
기관진식이 없더라도 건너기 쉽지 않아 보였다.
삐걱.
고작 한 걸음을 내디뎠건만 나무판자에서 낡았다는 반응이 바로 일었다.
양손으로 건너편까지 이어진 밧줄을 쥔 백리황은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흐름을 변수로 계산해? 그게 가능은 한 건가?’
당장 내일의 날씨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바람이 불지 모르는데 변수계산이 될까?
백리황이 미심쩍은 눈으로 뒤를 바라보는 그때였다.
“허억! 이건 뭐야!”
있어야 할 묘 선생과 십이월은 어디가고 뒤쪽에는 또 다른 절벽이 있었다.
한 걸음만으로 진법이 펼쳐진 것이었다.
‘앞으로 갈 수밖에 없구나. 이런 씨…….’
백리황이 후회막심한 얼굴로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뭐? 저 늙은이가 실제로는 열다섯이라고?”
묘 선생이 십이월에게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백리황이 진법 안으로 들어가자 십이월은 지금의 사태에 대해 말해 준 상황이었다.
적사결에 대한 것까지 모두 말이다.
“더구나 교주도 저놈처럼 몸이 바뀌었고? 그것도 취불 그 노괴와? 허허허. 말도 안 돼.”
“말이 됩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셨으니까요.”
“야, 몸이 바꼈다는 건 영혼이 바꼈다는 얘기야. 영혼이 무슨 가래떡이냐? 쑥 뽑아서 쑥 집어넣게?”
“주군께서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십이월의 말에 묘 선생이 학을 뗀다는 듯 말했다.
“그래, 씨발. 니들이 어디 보통 놈들이냐. 그가 적 교주란 것을 확인했으니 미친 듯이 추종하겠지. 근데 말이야. 내가 이래봬도 온갖 초자연 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기관진식을 공부하는 놈이다. 사람의 영혼이란 건 자연현상을 예측하는 것보다 더 난해하고 복잡하고…… 하여튼 존나 어려워! 거의 불가능하단 말이다.”
“역시 취불, 주군의 호적수라 불릴 만한 노괴군요. 그 어려운 걸 해냈으니 말입니다.”
“왜 그게 또 교주에 대한 찬양으로 빠지냐…… 어휴.”
묘 선생은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 선생께서 뭐라 하시든 이것은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어쨌든 난 계약대로 할 뿐이니까. 만일 저놈이 시험을 통과하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이냐?”
묘 선생의 말에 십이월이 피식 웃었다.
역시 까다롭긴 해도 확실한 양반이었다.
‘주군의 말대로군. 사실대로 밝혀도 비밀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을 듯해. 신교에 입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쯧.’
서 선생과 묘 선생.
교주 적사결의 수하가 되고도 신교에 입교하지 않은 자들.
과거의 인연으로 그리 되었다지만 십이월은 이 두 사람이 좋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들에게는 교도로서의 충성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제 보니 계약으로 인한 주종 관계지만 나름의 확고한 기준은 있어 보였다.
“주군께서는 지금 옥체를 되찾을 방법을 찾는 중이십니다. 그 방법을 얻게 되면 십만대산으로 가실 예정이시지요.”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지 그래?”
“천마신궁 교주전으로 비밀리에 들어가려면 선생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맡아 주십시오.”
“명색이 교주전인데 비밀 통로 하나 없어?”
무릇 한 단체의 수장이 머무는 공간은 비밀 통로를 만드는 것이 상식이었다.
비밀 통로는 일종의 구명줄.
위험상황에 대비해 수장의 목숨을 온존할 수 있어야 집단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없습니다. 개구멍을 만들어 도망칠 바에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는 것이 패도이기 때문입니다.”
“잘났네, 정말. 그럼 나 보고 교주전까지 통하는 쥐구멍을 파 달라는 거야? 어느 세월에?”
있는 것을 뚫는 것과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것도 몰래 해야 한다면 후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천마신교에는 없지만 과거 마교라 불리던 시절에는 있었습니다. 폐쇄된 지 오래지만 선생이라면 기관을 재개하고 되살리는 것이 어렵진 않을 겁니다.”
십만대산은 최초의 마교가 개파했던 곳.
하나 당시 정마대전에서 패한 마교는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후예가 십만대산에 다시 자리 잡은 것이었다.
천마신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과거의 마교…… 그렇다면 거의 구백 년 가까이 된 거잖아? 나 보고 그렇게 낡은 걸 가동시키라는 말이냐?”
묘 선생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으나 십이월은 피식 웃었다.
“당시 최고의 기관진식가들이 만든 곳입니다. 대가들은 세월의 흐름조차 변수로 계산한다 하셨잖습니까?”
“대가도 대가 나름이지. 나 정도 돼야 그것도 가능한 거야.”
“그러니까요. 선생 정도 되시는 분이니 세월의 흐름을 계산해 가동시켜 보십시오. 설마 자신 없는 겁니까?”
“아니 자신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있는 개구멍이 오래되고 낡았다지만 그걸로 쥐구멍도 못 만들면서 대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겠으면 미리 말씀하십시오. 주군께 말씀드려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이월의 말에 묘 선생이 욱했다.
“야! 아까는 적 교주가 능력 안 되는 놈에게는 중책을 안 맡긴다 어쩌고저쩌고 씨부리더니 뭐라고!?”
“그래서 저놈은 열심히 다리를 건너고 있잖습니까. 한데 선생은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시니 뭐 어쩌겠습니까? 남이 믿어 줘도 본인이 싫다는데.”
“이런 씨! 한다 해! 하면 될 거 아냐! 대신 저놈이 다리를 끝까지 건넜을 때 유효한 거야! 그건 확실히 하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십이월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답했다.
* * *
“크으윽, 살 떨려 죽겠네.”
백리황은 다리 아래에서 한 손으로 나무판자를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세 걸음도 떼지 않아 전면에서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왔고 또 다섯 걸음도 걷지 않고 바닥의 나무판자가 훅 꺼지며 몸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앞의 나무판자를 붙잡지 않았다면 절벽 아래로 자유 낙하했을 것이었다.
휘익.
두 손으로 판자를 붙잡고 손을 떨치자 몸이 붕하고 떴다.
취팔선보라는 경신공을 대성한 후 백리황은 깃털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척.
백리황의 발끝이 내려선 곳은 나무판자가 아니라 다리의 주축이 되는 두 개의 밧줄 중 하나였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위태로운 밧줄이나 백리황은 가볍게 서 있었다.
그러고는 마치 평지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쫄지 말자. 난 절정 고수다. 절정 고수.’
나무판자를 밟을 때마다 위험한 상황에 몰리니 백리황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무섭기 그지없지만 절정 고수라 되뇌며 밧줄 위를 달리니 생각보다 할 만하다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핏. 휘리리릭.
딛고 있지 않은 반대쪽 밧줄이 끊어지며 백리황의 전신을 감아갔다.
꼬여 있는 밧줄이 풀리자 다섯 개의 가느다란 줄이 되었고 이윽고 백리황의 목과 팔다리를 옥죄었다.
딛고 있는 발판이 밧줄인 탓에 피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제기랄.’
백리황은 전신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했다.
하나 밧줄이 마치 내공을 빨아먹는 듯 전신의 힘은 빠지는데 옥죄는 힘은 강해져 갔다.
‘사로(死路)다. 밧줄 위가 진짜 사로였던 거야.’
멍청했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는데.
백리황이 발버둥을 쳐도 밧줄은 풀리지 않았다.
이대로는 내공이 바닥나고 진법 안에서 죽을 것이 분명했다.
‘내 힘으로는 무리야. 나한테 왜 이런 일을 맡긴 거야, 도대체.’
백리황은 적사결을 생각하며 울상을 지었다.
한데 그때 불현듯 수련 당시의 말이 떠올랐다.
“싸움은 말이야. 흐름이 중요하다. 어떻게 흐름을 만들고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지. 하나 흐름을 빼앗기고도 이길 수 있는 일발역전의 방법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판을 뒤흔들고 부숴 버리는 거지.”
“예? 그게 무슨 말이죠?”
“상황을 바꾸라는 말이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백리황은 상황을 바꾸라는 적사결의 마지막 말을 깨닫기 시작했다.
“상황을 바꾼다. 상황을!”
백리황은 오른발의 신발을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발가락으로 밧줄을 움켜쥐었다.
“이야아압!”
발가락에 강기가 집중되자 어마어마한 힘이 밧줄을 압박해 갔다.
투두두둑.
발가락 사이에 밧줄을 끼고 돌리자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발가락에 힘을 주자 그제야 줄은 완전히 끊어졌다.
“됐다!”
남아 있던 밧줄마저 끊어지자 진법이 깨진 것일까 구속하고 있던 밧줄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하나 백리황의 몸도 하강하기 시작했다.
‘히이익. 무섭다.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백리황!’
생사가 달렸기 때문일까 백리황의 집중력이 높아지며 주변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런 백리황의 눈에 발가락 강기로 끊어진 밧줄이 요동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잡아!’
생각과 함께 취팔선권이 반사적으로 펼쳐졌다.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밧줄이었으나 취팔선권 또한 권공에 어울리지 않게 변초가 장점.
술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주먹은 밧줄의 끝에 닿을 수 있었다.
덥썩.
‘좋았어! 으히익!’
밧줄을 잡자마자 백리황의 신형이 절벽 사이를 가로질렀다.
거의 절벽 중간 즈음에서 밧줄 끝에 매달려 날아가니 파공성이 무시무시하게 귓가를 스쳤다.
‘히이익. 무서워!’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
이대로는 절벽에 처박혀 오징어포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리황은 절정 고수, 상승의 방호기공인 호신강기를 쓸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절벽 한쪽이 움푹 패이고 박살 난 돌덩이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백리황은 축 늘어져 있었지만 두 손은 밧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헉, 헉. 살았다.”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절정 고수의 악력이 아니었다면.
온몸의 뼈가 박살났거나 벽에 부딪치며 튕겨 나갔을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이유라면 오직 절정의 경지, 그것 하나였다.
척. 척.
백리황의 두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절벽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원숭이와 비슷한 속도로 밧줄을 타고 올라 절벽 끝까지 올라서자 주변 풍경이 변해 갔다.
“뭐야 이게!”
눈앞에 보인 광경에 백리황이 입을 떡 벌렸다.
오십여 장에 이르는 절벽은 일장도 안 되는 구덩이였고 낡은 다리는 구덩이에 걸쳐진 새끼줄 두 개였다.
그리고 구덩이 너머에 묘 선생과 십이월이 피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이거 넘는다고 그 고생을 한 거야?’
백리황이 구덩이와 묘 선생을 번갈아보며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묘 선생은 인상을 팍 구기고 소리쳤다.
“그 한심한 얼굴 집어넣어라. 비록 십 년 전이지만 그거 만드는 데 한 달 넘게 걸렸으니까. 직접 겪어 봤으니 알 거 아냐?”
백리황의 정체를 알기 때문일까 묘 선생의 말은 완전한 하대로 변해 있었다.
하나 백리황은 정신이 없어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네? 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안에서 죽었다면 진짜 죽었을 거다. 실제로는 절벽이 아닌 그 구덩이에 빠져 죽는 것이지. 어때? 대단하지 않아?”
“대……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진법이지. 땅 짚고 헤엄치다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게 만드는 공부. 흐흐흐.”
묘 선생이 한껏 콧대를 세우는 그때였다.
“시험은 통과했으니 선생께서는 채비를 하십시오.”
십이월이 묘 선생에게 재촉을 시작했다.
“챙길 거 없어! 그냥 가면 돼! 자랑질도 못하냐! 어휴!”
묘 선생이 불뚝한 배를 출렁이며 걸음을 옮겼다.
“안 와!? 빨리 가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