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38화>
* * *
“도대체 누가 온다고 기다리라는 거지…….”
백리황은 으슥한 뒷골목에서 사왕을 품에 안고 있었다.
무허 행세를 하며 도검을 들고 갈 수 없기에 적사결이 잠시 맡긴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기형도는 처음 보는데…… 잠깐 볼까?”
보도와 보검이 가지는 마력.
백리황은 사왕을 뽑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간 적사결의 손을 타며 바랬던 빛을 되찾은 사왕은 도집에 갇힌 상태에서도 흉포함을 보이고 있었다.
주인을 닮아가는 것이었다.
스릉.
부드럽게 뽑히는 발도 소리가 매끄러운 도신 위를 타고 흘렀다.
웅. 웅. 웅.
소리조차 베이는 듯 공명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허업. 끄…… 끝내 준다…….’
도신의 물결무늬가 눈을 어지럽히며 빨려 들듯 황홀감이 찾아왔다.
하나 이내 정신을 차린 백리황이 고개를 저었다.
“에휴. 아직 멀었구나. 병기에 마음을 뺏겨 버리다니.”
지난 고행에서 적사결은 알려 줬었다.
절정에 이르러 강기를 다루는 경지에 오르면 병기가 주는 이점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좋은 무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물론 좋지만 강기로 어느 정도 보완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천하 십대기병이니 뭐니 하는 병기에 혹하지 않고 반대로 병기가 자신에게 매료되는 역전 현상이 생기는 것이었다.
병기를 사용하는 무인으로서 적사결이 생각하는 절정의 기준은 그것이었다.
하나 병기도 병기 나름.
알려진 명성이 없지만 사왕은 천하 십대기병 이상일지도 몰랐다.
갓 절정에 오른 백리황으로서는 마음을 뺏기는 것이 당연했다.
철컹.
사왕을 납도하고 품에 안은 백리황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접선자가 오고 있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응? 이건…….’
백리황의 기감에 어렴풋이 무언가가 잡혔다.
뚜렷하지 않으나 등 뒤를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찌리릿.
적사결이 살기를 품고 내지르는 일격을 받을 때의 느낌.
백리황의 신형이 번개처럼 회전하며 담벼락에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누구냐!?”
담벼락에서 튀어나온 단검을 노려보며 백리황이 일갈했다.
거센 기파가 뿜어지며 주위를 진동시켰다.
모습을 숨긴 살수를 드러내는 방법. 십이사령의 암습에 대비해 적사결이 알려 준 것이었다.
지잉. 스르륵.
담벼락에서 유령이 나타나듯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십이월. 강소성을 담당하는 적월이었다.
적사결이 남긴 표식을 보고 이곳에 온 접선자는 바로 십이월이었다.
“주군의 종복은 맞는가 보구나. 그걸 피하다니.”
물론 공격을 피한 것만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기파로 은신을 파훼하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지존의 고유한 수법이 녹아 있었다.
더구나 표식에서 읽었을 뿐이지만 사왕은 한눈에도 알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아니, 그걸 피하지 못했다면 죽었을 텐데! 무슨 확인이 이렇게 과격하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백리황은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죽는다면, 주군의 종복일 리가 없지. 당연한 확인 절차일 뿐이다.”
“허…….”
백리황이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절정에 이르기 전이었다면 십 할의 확률로 가슴을 꿰뚫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만큼 방금 전의 암습은 섬뜩했다.
“한데 종복이라니? 내가 그분의 종복이란 말이오?”
“주군께서 그리 암어를 남기셨는데 아닌가?”
“아니오!”
“종복이 아니라면 확인을 더 해 봐야겠군.”
십이월이 손을 한번 털자 단검이었던 검이 중검으로 쑥 길어졌다.
검신을 검병 속까지 숨길 수 있어 단검과 중검을 오가는 적월만의 고유병기 월영검이었다.
“아, 아니오! 종복 맞소! 확인할 필요 없소!”
서슬 퍼런 기운에 사색이 된 백리황이 양손을 저으며 종복이라 시인했다.
절정에 올랐다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한 무인과 싸우고 싶진 않았다.
“역시, 그 기개가 딱 종복 수준이구나. 따라와라.”
“어딜 말이오?”
“만날 분이 있다.”
“그게 누구요?”
“묘 선생.”
“묘 선생?
“모르면 그냥 조용히 따라와라.”
십이월의 냉담한 말에 욱한 백리황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보기에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말하는 족족 명령조인 건 너무한 거 아니오?”
자신의 신체는 금개 이천억의 몸.
누더기 옷을 벗고 단정한 차림새를 한 지금의 백리황은 한 눈에 보기에도 존대를 받아 마땅한 노강호의 그것이었다.
“너는 주군의 종복, 나는 주군의 손발이 되는 직속수하다. 더 말이 필요한가?”
나이는 서열을 나누는 데 하등 쓸모없다.
오로지 능력만으로 고하가 정해지는 천마신교에서 자란 십이월이었다.
여기서 더 따지자면 말싸움이 아닌 몸싸움으로 판가름해야 한다.
십이월이 다시금 소매 속에서 월영검을 꺼내 들었다.
“거…… 거참. 살벌하구려! 이거 원…… 됐으니 앞장서시오.”
어차피 실제로는 자신이 더 어리다.
반말이면 어떻고 명령조면 어떤가. 백리황은 괜한 분란을 조장할 필요가 없겠다 생각했다.
다만 표정은 구겨진 채 십이월의 뒤를 따랐다.
‘훗, 정말 다루기 쉬운 놈이네. 저놈처럼 묘 선생도 고분고분하면 얼마나 좋아.’
십이월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주군이 남긴 표식대로 백리황을 다루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서 선생과 함께 적사결의 숨겨진 힘이라 할 수 있는 묘 선생의 거처였다.
뛰어난 무공은 기본이되 의술에 조예가 깊은 서 선생과 기관진식의 대가 묘 선생.
그들은 교도는 아니지만 적사결이 적월대주 시절 인연이 닿은 은거기인들이었다.
‘저 어수룩한 놈으로 묘 선생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휴우…….’
다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서 선생과 달리 묘 선생은 억지로 수하가 된 경우였다.
과거 기관진식을 걸고 한 내기에서 이긴 덕분에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부려먹으려도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백리황은 그 까다로움을 충족시켜 줄 일종의 제물이었다.
* * *
백풍각.
풍림은 그저 버드나무만 덩그러니 심어 놓은 곳이 아니었다.
그곳을 관리하는 전각이 있었고 가문 내에서 일어나는 행사는 이곳 백풍각 내에서 치러졌다.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풍림의 버드나무와 어울리는 고풍스런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멋지네요.”
“나도 그렇다 생각하오. 조사님께서 이 백풍각에서 시작해 지금의 본가를 세우셨으니 백리세가의 역사가 이곳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소.”
“그럼 우리 여기에 신방을 차리는 건 어떨까요?”
단목련의 말에 이천억은 흠칫했다.
백풍각은 천풍각이나 풍령전만큼 중요한 전각은 아니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애매한 전각을 고를 줄이야.
이천억은 단목련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여긴 가문의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오. 더구나 가문 내에서 가장 외진 곳이라 할 수 있지. 그러지 말고 천풍각과 가까운 곳을 고르는 것이 어떠하오?”
“조사님께서 첫 발걸음을 시작하신 곳에서 신방을 꾸리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고풍스런 느낌을 더 좋아한답니다.”
단목련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천억은 단목련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며느리가 되면 집안의 살림을 도맡게 된다.
그건 무가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단목련은 향후 내총관과의 기싸움을 위해 그의 거처를 내어달라 요청할 것이라 여겼었다.
한데 예상이 빗나간 것은 물론 상당히 애매한 곳을 원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문제가 없는 곳이긴 한데…….’
신방으로 삼는 데 문제는 없지만 다른 의미로 뜻 깊은 곳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실리는 없으나 명분이 있는 것이다.
이천억이 고민하자 단목련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자, 생각해 보세요. 이곳은 집안 행사의 대부분을 치르는 곳입니다. 이곳을 며느리인 제가 맡는다면 집안 어른들께서 좋게 보시지 않을까요?”
“…….”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행사의 주관은 현풍각에서 이루어진다.
현풍각은 천풍각 바로 옆이며 그곳의 각주는 내총관이었다.
그 두 개의 각이 붙어 있는 것은 백리세가의 안주인인 이옥연이 천풍각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백풍각에 신방을 차려 봐야 할 수 있는 것은 행사를 위해 안방을 내주고 그 후 뒤처리를 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궂은 일만 가득하고 챙길 것은 없다는 말이다.
‘괜히 찜찜한 건가…….’
처음 요구한 장소를 곧이곧대로 허락해 버리면 기 싸움에서 밀리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천억은 그 때문에 자신이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 보단 모든 전각을 둘러보고 차차 정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일단 이곳까지 왔으니 각주이신 숙부님을 뵙고 가는 것이 어떻겠소?”
이천억이 화제를 돌리자 단목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도리겠죠.”
이천억이 어깨에 두른 손을 내리고 백풍각의 정문을 넘었다.
집안의 어른 앞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에.
백풍각주 백리림의 집무실은 전체적으로 단출했다.
하나 사용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러 잡동사니가 이곳저곳을 굴러다녔고, 난잡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 나쁘게 말하면 귀찮음이 묻어 있었다.
“그래, 혼례 준비로 세가 내를 둘러보고 있다고? 하면 신방을 물색하고 있는 것이냐?”
백리림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숙부님.”
“하면 백풍각에서 살림을 차릴 생각으로 온 것이고?”
“아…… 아닙니다. 단목 소저가 본가의 내부 구조를 잘 모르니 소개차 둘러보는 것입니다.”
“하하하, 이 숙부는 그리해 줬으면 좋겠구나. 여긴 꼬장꼬장한 늙은이들만 있어서 영 재미가 없거든. 너희들이 이 숙부 좀 구해 주지 않겠느냐?”
백리림의 말대로 백풍각은 가솔들 중 은퇴한 자들이 세가를 떠나지 않고 거주하는 곳이었다.
백리세가의 혈족들이 은퇴하면 풍령전에 거취를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쉽게 이곳을 내주겠다? 설마 세월의 풍파에 쓸려 나간 건가…….’
단목련은 백리림의 말에서 풍림의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었다.
과거 백리세가와 단목세가가 한 가문일 당시. 풍림은 가문의 숨겨진 힘이었다.
오직 당대 가주만이 아는 비밀 병기였지만 단목세가의 초대 가주는 우연히 분가 전에 그 비밀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단목련은 아버지로부터 풍림의 힘을 얻게 되면 단목세가가 백리세가를 역으로 삼킬 수 있다 알려 주었던 것이었다.
‘아니면 백풍각주는 풍림주가 아닌 걸까?’
정체를 숨겨야 하는 곳이니 대외적인 얼굴로 백리림이 이곳에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진짜 풍림주가 따로 있다면 누구일까?
단목련이 궁금증을 가지고 백리림에게 되물었다.
“혹시 이곳에 있는 가솔들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숙부님을 구해 드리려면 꼼꼼히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교가득한 단목련의 말에 백리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래, 그래. 어려울 것 없지.”
백리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일을 보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내려 탁자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꾹 눌렀다.
‘기관?’
단목련이 눈을 빛내며 그 모습을 보았고, 그걸 모르는 이천억도 놀란 눈빛이었다.
‘뭐야. 이곳에 왜 저런 기관 장치가 있지?’
그도 그럴 것이 상계에 적을 두었을 때 저러한 기관 장치를 써본 적이 있었기에 이천억이 놀란 것이었다.
저런 고도의 기관 장치는 많은 돈이 들었고 중요한 물건이나 인물이 있는 장소에나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꽤 놀란 눈치로구나. 이건 조사님께서 이곳을 건설할 당시 설치한 기관이란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지금은 그냥 이곳에 머무는 늙은이들 집합시킬 때나 사용하는 물건일 뿐이지.”
백리림의 말에 단목련과 이천억은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전에 만든 기관이 아직 작동한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이유가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콰콰콰쾅. 꽈과광. 꽈르르릉.
갑작스런 폭음과 함께 땅울림이 느껴졌다.
이천억이 다급하게 백리림을 향해 물었다.
“숙부님. 혹시 잘못 누르신 건 아니죠? 두 번 눌렀다거나…… 하는…….”
보통 저런 류의 기관은 짧게 한 번 누르면 경보음, 길게 한 번 누르면 비상탈출, 짧게 두 번 누르면 자동 자폭 장치가 가동된다.
“어? 두…… 두 번? 그랬었나?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백리림의 얼떨떨한 말에 이천억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