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37화>
* * *
“아버님, 어머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단목련이 백리검과 이옥연 앞에서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아직 혼인 전인 만큼 예비 시부모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거지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우리 아가씨. 도착하기 전의 틱틱거리시던 태도는 조금도 없구나.’
단목련을 보며 양화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싫은 사람을 보고도 미소를 짓는 것이, 윗사람의 덕목이라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곳에서 지내며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거라.”
“배려 감사합니다, 아버님.”
단목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백리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이렇게 어여쁜 딸과 벌써 헤어지다니. 단목가주의 마음이 말이 아니겠구나. 가주께서는 잘 계시느냐?”
“건강하십니다. 아들이 없으셔서 적적하셨는데 곧 아들이 생긴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른답니다.”
“하하하하. 그래, 그래. 나는 딸을 얻고 그분은 아들을 얻으셨지. 오래전 헤어진 가문이 다시금 가족이 되었으니 좋은 일이지.”
“아버지께서도 같은 마음이시랍니다.”
단목련이 웃으며 화답했다.
그때 한 사람이 들어섰다.
백리황의 모습을 한 이천억이었다.
“단목 소저, 오랜만이오.”
쿵.
그를 보자마자 단목련은 가슴에 돌덩이가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눌린 것이었다.
‘무…… 무슨…… 정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야? 말도 안 돼…….’
충격적이었다.
설마 만나자마자 그 무위가 피부로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였다.
“황아.”
백리검의 주의에 이천억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 이런 미안하오. 방금 전까지 수련 중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이천억은 기세를 갈무리하며 내기를 다스렸다.
물론 초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깨달음을 얻어 아직 힘을 주체 못해 그러니 양해 바라오, 단목 소저.”
“……네, 네. 괜찮아요.”
단목련의 당황한 표정을 읽은 이천억은 속으로 히죽거렸다.
‘흐흐흐. 어린 계집이 날고 기어 봐야 하룻강아지 재롱잔치지.’
기선 제압은 성공.
이걸로 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아, 네가 직접 련이에게 본가를 구경시키고 차후 혼례 준비에 대한 일을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옥연이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께서 하지 않으시고 제가 말입니까?”
“련이가 책임자이니 이 어미가 나서면 불편해서 마음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잖느냐. 련이, 너도 황아가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냐?”
이옥연의 물음에 단목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저는 어머님도 괜찮습니다. 어느 쪽이든 어머님의 말씀대로 따를 것입니다.”
“호호호, 그러느냐. 하면 황아만 허락하면 되겠구나.”
이옥연이 이천억을 바라보며 눈빛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단목 소저와 혼례 준비를 맡도록 하지요. 잘 부탁하오, 단목 소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백리 공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본가를 둘러보겠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갑시다.”
이천억의 주도로 단목련이 따라 밖으로 나섰다.
백리검은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황아 녀석 하는 것을 보니 잡혀 살진 않겠구려. 녀석, 무공만 는 것 아니라 심계 또한 성장했는가보오.”
“무공도 삶의 일부라 하지 않습니까. 무공에 비례해 정신적인 면도 성장한 것이죠.”
“하나 강호엔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많소. 우리 아들이니 그런 것이오, 하하하.”
“어휴, 당신 점점 팔불출이 되고 있는 거 아세요?”
“그리 보이오? 하하하.”
백리검이 호탕하게 웃는 그때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백리세가 외당을 맡고 있는 백리영이었다.
“가주님.”
“그래, 영아. 무슨 일이냐?”
“본가에 중요한 손님이 방문하여 직접 보고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미리 기별을 받은 객은 없지 않았느냐?”
혼인 준비로 당분간 대외행사가 없는 백리세가였다.
더구나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혼례일에 맞춰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것이…… 사전 약속도 없이 방문하셨습니다.”
“한데 중요한 손님이다? 그가 누구냐?”
백리영이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취불 무허대사님이십니다.”
* * *
“허허허허. 이리 환대를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허의 얼굴을 한 적사결이 한껏 너스레를 떨었다.
“아닙니다. 정도 무림을 지탱하는 분이신데 당연한 처사이지요. 잘 오셨습니다. 하하하.”
백리검이 포권을 하며 기쁜 마음을 내비쳤다.
상대가 불문을 대표하는 기둥이었으니 당연했다.
의천맹 내에서는 오대세가라는 거대한 파벌에 대항해 과거 구파일방 출신의 불문과 도문 그리고 오대세가에 편입되지 않은 무가들이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무가들의 대표 중 한 곳이라 할 수 있는 백리세가주로서 무허대사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제일인이라는 그가 있기에 오대세가를 견제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어인 일로 이리 본가를 찾아주셨는지요?”
백리검의 물음에 적사결이 반장을 하며 말했다.
“노납이 혼례 일에는 참석하지 못할 듯하여 미리 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사님께서 바쁘신 것이야 온 강호인들이 다 아는데 잊지 않고 이리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장난질을 친다고 바쁘겠지.
백리검은 무허가 천하사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혼례 전에 무슨 괴이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니 방심할 순 없었다.
“듣자 하니 백리세가의 자제인 백리 공자가 강동의 동량지재라 들었습니다. 다음 무림의 대들보가 될 아이 아닙니까. 한번 만나보고 싶더군요. 허허허.”
적사결이 넌지시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이옥연이 그걸 덥석 물었다.
“어머, 정말 우리 황아를 만나러 오셨단 말입니까?”
“부끄럽지만 노납이 아직 후학을 양성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각지의 재원들은 두루두루 살피는 중입니다.”
적사결의 말에 백리검이 흠칫했다.
“대사님. 하나 우리 아들은 본가의 적통입니다. 아무리 대사님이라 해도 소림의 속가제자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들이 예전 같았으면 얼씨구나 하고 보냈을 것이다.
속가제자라지만 정도제일인의 진전을 잇는다면 그것이 주는 혜택은 측정하기 힘들 정도였기에.
하나 지금 자신의 아들은 강동 제일신룡이다.
굳이 소림의 꼬리표를 달 이유는 없었다.
“허허허, 백리가주께서 오해를 하신 듯하군요. 노납은 제자를 바라는 것이 아닌 그저 약간의 도움을 주고 싶을 뿐입니다. 후학을 양성한다는 것이 꼭 제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자를 들이기엔 늦은 나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면…… 설마 대사님께선…….”
백리검이 말끝을 흐리자 적사결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납은 아이들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어 잘 자라길 바랄 뿐입니다. 너무 늙어 후인을 남기지 못했으니 그렇게라도 강호의 안녕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그런 연유로 혼인 전에 직접 오신 것이군요.”
혼인 전과 후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특히나 남자는 한 가정의 대들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어른, 즉 완성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른 것이다.
더구나 동년배를 월등히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자신의 아들이라면 그 마음이 오만한 걸 넘어 광오함으로 변질될지도 몰랐다.
‘하긴…… 최근 들어 황아는 가문의 어른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홀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허대사라면 그러한 점을 바로잡아 주실지도 모르는 일이야.’
백리검은 적사결이 만든 상황에 오해와 착각이 뒤범벅된 해석을 갖다 붙이고 있었다.
“대사님. 부디 제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백리검.
한 가문의 가주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비로서 아들의 스승께 올리는 예였다.
“대사님만, 믿겠습니다.”
이옥연 역시 남편을 따라 적사결에게 머리를 숙였다.
“허허, 두 분이 염려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나무아미타불…….”
적사결이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였다.
“대사님,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사람 무엇이든 대사님의 말대로 따를 것입니다.”
아주 좋은 태도다.
적사결이 속으로 웃으며 겉으로는 근엄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 지켜 주실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도대체 그게 뭐냐는 두 쌍의 눈빛.
백리검과 이옥연이 침을 삼키며 적사결의 입을 주시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존나게 팰 거다, 씨발.
* * *
풍림.
백리세가에서도 가장 북쪽 외진 곳에 위치한 숲이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백리세가의 장원은 마치 삿갓을 쓴 듯한 모습이었다.
백리세가는 중앙의 장원인 백화장과 북쪽의 풍림이 절경이었다.
“어머나. 이곳이 말로만 듣던 풍림이군요.”
단목련이 버드나무로만 이루어진 풍림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람에 물결치는 버드나무 잎들이 풍림 자체가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을 뽐내고 있었다.
“본가에 몇 번 왕래가 있었을 텐데 와 보지 못했었소?”
이천억의 물음에 단목련이 생긋 웃었다.
“외적인 업무 자리는 백화장에서, 가문 내부적인 행사는 풍림에서 치른다죠? 본가는 그간 외인이었잖아요. 호호호.”
“그래도 소저가 원했다면 와 볼 수 있었을 텐데.”
“백리세가의 사람이 되면 오고 싶었던 거죠. 이제는 올 자격이 생긴 거 아닐까요?”
단목련의 눈웃음에서 이천억은 실소를 흘렸다.
끼를 부리는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었다.
‘새파란 년이 반반한 얼굴을 한번 써 보겠다? 후후후.’
거상이었던 시절 온갖 향락을 경험하고 일성을 쥐락펴락하는 미녀들을 품었던 그였다.
단목련이 한 미모 한다지만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일 뿐이었다.
“하하하. 단목 소저는 자격이 충분하지! 갑시다.”
이천억이 단목련의 어깨에 척하니 팔을 두르며 말했다.
끼를 부리든 멋을 부리든 상관없다.
애초에 혼인할 상대이기도 했고.
‘뭐야, 이사람.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다.
그녀의 나이 방년 십오 세.
남자의 손길이 닿은 적 없었던 단목련은 화들짝 놀랐다.
‘흐흐, 이런 깜찍한 것.’
이천억은 그 파릇파릇함을 만끽하며 풍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아이, 아니 이 여인이 곧 자신의 마누라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천억은 흐뭇할 뿐이었다.
저벅. 저벅.
이천억과 단목련이 풍림 안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가주내외와 인사를 나눈 후 이천억을 찾아온 적사결이었다.
강화된 후각으로 이천억의 냄새를 더듬으며 풍림 앞까지 온 것이었다.
“킁. 킁. 여기로 온 건 맞는 거 같은데. 장원 안에 숲을 조성해 놓다니…… 거참…….”
적사결은 풍림의 입구를 보며 혀를 찼다.
인공 숲을 만들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지 짐작이 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보통 숲은 아닌 듯한데…….”
적사결의 눈에는 보였다.
풍림은 겉으로 보기에는 경치 좋은 숲이나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풍사환혼진.
허락받지 않은 자를 배제하는 환영진의 일종.
그 변화가 바람을 닮은 듯 끊임이 없어 파훼법이 따로 없는 고도의 진법이었다.
정해진 파훼법이 없다는 것은 즉석에서 사문과 생문을 구별해 내야 한다는 의미.
진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면 진입은 불가능했다.
“백리세가 내에 이런 고급 진법이라……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세가에 들어 본 적 없는 진법이 있다면 이번 기회로 경험해 보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적사결, 그는 진법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파훼에 있어서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