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29화>
“보국공을 뵙습니다. 금의위 백호 왕욱이라 합니다.”
왕욱은 백리황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보국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 공신이란 뜻으로 황제가 직접 내린 호였다.
황제가 개인에게 호를 내린 것은 이례적이기에 그 기부 금액을 단편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이천억이라 합니다.”
백리황은 일어서 포권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상관의 예법이 끝나자 진무백이 이어서 예를 올렸다.
“진무백이라 합니다. 보국공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천억입니다.”
통성명이 있은 후 백리황은 두 사람을 거적데기 위로 안내했다.
금개의 집무실에는 가재도구 따윈 없었고 오직 바닥에 깔린 거적데기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보국공께서 전 재산을 나라에 환원하시고 안빈낙도의 삶을 사신다 하더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중원의 거상이었던 분께서 이리 소탈한 삶을 살고 계시다니요.”
왕욱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칭찬 세례를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적극적으로 협조 바란다는 정치적 표현이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물론 열다섯에 불과한 백리황이 그런 표현을 알 리 없었다.
처음 대하는 짧고 굵은 답변에 왕욱은 내심 당황했다.
‘닳을 대로 닳은 늙은 너구리라는 건가…….’
보통은 칭찬으로 화답하거나 논점을 흐리기 위해 다른 주제를 거론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러한 반응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말이다.
한데 이천억의 답변은 자신의 시도가 무색하게 만들었으니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진짜 고수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왕욱은 간 볼 생각을 접고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저희가 보국공을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해 여쭙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이라니요? 누굴 이르는 말입니까?”
“취불 무허대사라고 아시지요? 강호에서 보국공과 함께 천하사괴라 불린다 들었습니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 얘기는 왜 꺼내시는지요?”
“그가 최근 이곳에 들른 적이 있지요?”
왕욱의 물음에 백리황은 적사결이 해 준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저를 만나러 왔었지요. 한데 저와 한바탕 싸우고는 떠났습니다.”
“꽤 친분이 두텁다 들었는데 싸우셨단 말입니까?”
“친구 간에는 사소한 것 하나로도 다투고 그런 것이지요. 오랜만에 멱살잡이하고 크게 틀어졌으니 당분간 이곳에 오지 않을 겁니다. 한데 그 친구를 찾는 연유를 물어도 될는지요?”
“그분께서 저희가 찾는 범인에 대한 단서를 지니고 계시기에 만나 뵙고자 합니다. 혹시 어디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친구라…….”
백리황은 적사결의 지시대로 뜸을 들였다.
여자든 남자든 상대방을 달아오르게 만들어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며 조언 받은 것이었다.
“보국공께서 개방의 분타주시니 개방도들을 풀어 좀 알아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워낙 사안이 중요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기다렸던 부탁하는 어조다.
백리황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러고 보니 그 친구가 얼마 전 제자를 들였다며 함께 곤륜산맥으로 유람 갈 것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왕욱은 눈썹을 역팔자로 휘며 물었다.
“곤륜산맥이요? 거긴 청해성 아닙니까?”
청해성은 사천성과 신강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거의 새외나 마찬가지였다.
“예전부터 그 친구가 사라진 곤륜파의 유적을 찾고 싶다는 말을 했었지요. 제자에게도 그런 웅심을 심어 주기 위해 갈 거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하니 이곳을 떠나 곤륜산맥으로 향한 것이 분명할 겁니다.”
“한데 그 제자라는 자는 보셨습니까?”
“물론 소개를 해 주었으니 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생김새가 이러합니까?”
왕욱은 품에서 용모파기를 꺼냈다.
화공의 섬세한 붓선이 그려 넣은 얼굴은 십오 세 전후의 적사결이었다.
“맞습니다. 한데 아까 말씀하신 범인이 이 아이입니까?”
“아닙니다. 이 아이는 그 범인을 본 목격자이지요.”
백리황은 왕욱의 대답을 듣자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양쪽의 돌아가는 정황상 그 범인은 적사결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죄가 무엇인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데 무슨 죄를 지은 범인이기에 금의위 위사분들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것입니까?”
왕욱은 말해야 할지 숨겨야 할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역모죄입니다. 연루되면 구족이 멸할 대역죄이지요.”
왕욱이 눈을 번득였다.
그러니 당신은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
정보 집단인 개방이 무허를 도우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 있기 때문에 밝힌 것이었다.
“아…… 그렇군요. 꼭 대역죄인을 추포하길 바라겠습니다.”
백리황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미 적사결과는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저 호기심으로 알게 된 죄목이 워낙 대단했기에 약간 놀랐을 뿐이었다.
* * *
개방 낙양 분타를 나온 왕욱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진무백이 그 모습에 물었다.
“여쭐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왕욱은 진무백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속하의 판단으로는 그자가 수상합니다. 백호께서는 아니 그러십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처음엔 역시 상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인물인 듯했습니다. 한데 어수룩하게 저희를 청해성으로 유도하려는 것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후후. 다른 백호들이 진무백, 진무백 하더니 안법이 제법이구나. 네 말대로 나 역시 반신반의했다. 겉보기와 다르게 빈틈을 보이는 것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데 역모죄를 언급했을 때 담대한 그를 보고 알았지. 그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범죄자와 엮일 대로 엮인 사이란 것을 말이다.”
왕욱은 낙양 분타에서 시선을 거두어 진무백을 바라보았다.
진무백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한데 왜 그냥 나오셨습니까?”
“그는 보국공이다. 황제께 직접 호를 하사받았다는 것은 명예뿐만 아니라 증좌가 없다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니 우리는 그의 주변을 감시하며 놈을 추포해야 할 것이다.”
왕욱은 굳은 표정으로 말한 후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놈은 우리가 청해성으로 향한 줄 알겠지. 아마도 청해성 쪽으로 천리추종향을 묻힌 무언가를 뿌려놓은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심하게 되겠군요?”
“십중팔구. 우리는 천리추종향에 더해 그 사왕이라는 도를 찬 무인을 집중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진무백은 절도 있게 읍하며 안광을 날카롭게 빛냈다.
이번에야말로 공주의 볼기짝을 때린 그 대역죄인을 잡아들일 절호의 기회였다.
* * *
“백리 애송이, 시킨 일은 어떻게 됐느냐?”
적사결이 백리황에게 돌아와 물었다.
그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었기에 금의위 위사와의 대면상황을 물은 것이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한데 정말 적운님께서 대역죄를 저질렀습니까?”
백리황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대역죄를 저질렀으면 고작 위사 둘만 움직였을까? 금의위 전체가 움직여야 대역죄 아니겠느냐?”
적사결의 능글맞은 대답에 백리황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구 이런 새하얀 화선지 같은 놈. 말하는 족족 물들어 버리네. 어휴.’
안 봐도 훤했다.
금의위 위사들에게 속까지 다 내 보였을 것이었다.
백리황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뭐 천리추종향을 없앴으니 더 이상 따라올 순 없겠지. 기껏해야 백리 애송이 주변을 맴돌다 말 것이야.’
적사결은 그렇게 금의위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금의위보다 앞으로의 행보가 문제였다.
“백리 애송이.”
“네, 적운 님.”
“저번에 말한 단목세가와의 혼인이 언제인지 날은 나왔느냐?”
“그렇습니다. 얼마 전 개방에도 혼인첩이 왔었습니다.”
“언제지?”
“육 개월 후 본가에서 치른다 합니다.”
담담히 얘기하고 있으나 백리황의 얼굴에서 수심을 읽을 수 있었다.
“너…… 그저 정략 결혼이 아니구나. 단목가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냐?”
“……예? 저…… 저기 그것이…….”
“사내새끼면 확실히 대답하거라! 그런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보느냐!?”
적사결의 호통에 백리황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네! 단목 소저를 좋아합니다! 처음 본 그때부터 쭉 좋아했습니다!”
“그 아이는?”
“예?”
“앞으로 두 번 묻게 만들면 말로는 안 넘어갈 줄 알거라. 그 아이도 널 좋아하느냔 말이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백리황은 고개를 떨구었다.
“짝사랑이구나. 으휴. 하긴 네놈 하는 꼴을 보면 당연하겠지.”
“죄…… 죄송합니다.”
“본좌에게 뭐가 죄송해! 죄송할 건 네 자신에게 죄송해야지! 멍청한 대가리를 만나서 몸이 고생이구나, 쯧쯧!”
“…….”
백리황은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잘 들어라. 남자는 자고로 힘이다! 네놈이 진짜 강동제일신룡으로서 모두의 기대주로 성장한다면 그 아이가 너를 싫어하겠느냐?”
적사결은 천마신교가 추구하는 남성상을 말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분명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백리황에게 그것이 통했다.
“답은 하나다. 네놈이 강기성강의 경지에 오르고 당당하게 백리세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문의 혼약 때문이 아닌 정식으로 청혼을 하거라! 몸도 되찾고 그 아이도 되찾는 것이다!”
“적운 님 어찌하면 강해질 수 있습니까!?”
“본좌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겠지. 이대로면 네놈은 가문도 잃고 좋아하는 여자도 잃고 말 것이다.”
적사결의 말에 백리황의 두 눈에서는 전에 없던 전의가 불타고 있었다.
역시 저 나이대에 여자는 진리다.
적사결은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한데 너 본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 더냐?”
“삼…… 삼류입니다.”
적사결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아무리 십오 세라 하지만 삼류라니!
그러고도 명문 무가의 자제란 말인가.
그런 속내를 짐작했는지 백리황은 울상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해 열한 살이 되어서야 무공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엔 그런 놈들 많다. 그건 변명이 안 돼. 4년 동안 삼류라니…….”
보통의 경우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 기를 느끼고 축기에 들어가는 입문조차 오 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만큼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자 특별한 사람이라는 방증이었다.
하나 백리세가의 자제라면 세가의 고수들이 진기를 도인해 주면서 도움도 주었을 것이고 영약의 지원도 있었을 터.
명문의 후기지수라면 못해도 이류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그러고 보면 백리세가 놈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었지.’
적사결이 과거 직접 상대해 본 백리세가 무인들의 무공 자체는 비교적 약하다 할 수 있었다.
그때 적사결은 문득 신교 흑영단에서 분석한 정파 무공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천마신교에서는 정파 무공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기에 대표적인 정파 무공들의 특징을 알고 있었다.
강소 백리세가 가전 무공 분석 보고서.
구대문파 중 멸문한 청성파의 일맥이 흘러 들어간 무가로 추정.
비전절학인 천풍검법은 표횰하고 자유로운 검의를 바탕으로 변의 묘리를 특징으로 함.
초식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상승의 경지에 진입할수록 강해지나 반대급부로 초반 삼류의 경지를 벗어나기 어려움.
또한 방어가 약하며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식이라면 한 수 아래의 무위로도 우세를 점하기 쉬움.
적사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오의를 깨닫기 힘든 무공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성정이 맞지 않았다.
천풍검법이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면 백리황은 예의 바르고 융통성이 부족한 정반대의 성정이었다.
무공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다.
고수라면 모를까 입문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상승의 경지에 빠르게 오를 수 있었다.
‘흐음…… 단목세가를 택한 것은 그저 세를 넓히기 위함만이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