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21화>
정보원.
그들은 흔히 정보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암중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다.
은막에 가려져 있기에 세인들은 그들의 활약을 알지 못했고, 평생을 주목받지 못한 채 그림자로서 살아야 했다.
하나 집단의 수뇌부들은 그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정보를 다루는 그들이 배신한다면 멸문의 길을 걸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신분 내력이 확실해야 했고 충성심 역시 뛰어날 필요가 있었다.
“사월아, 정말 본 좌에게 이 신분을 쓰라는 말이냐?”
신분패에 새겨진 이름은 염장이었다. 그리고 보고서에 적힌 가족 사항 첫줄, 아비의 이름에는 염석진이란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염석진, 그는 정보원 출신으로 강호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배신자의 대명사였다.
과거 그자가 행한 밀정 행위로 해방문이라는 일문이 무너졌었으니 말이다.
즉, 염장은 반골(反骨)의 핏줄이라 할 수 있었다.
“교주님, 시궁창이기에 더 깨끗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흠…….”
생각해 보면 사월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염석진은 이후 살아남은 해방문의 일파에게 암살당했고, 그 식솔들은 평생을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했었으니 말이다.
아비의 잘못으로 불행히 살아온 자식.
아비가 배신자이기에, 자식은 오히려 누구보다 신의를 지킨다.
어찌 보면 더러워서 깨끗한 신분이었다.
“하나 너무…… 주목받지 않겠느냐.”
“지존께서는 과거 소교주의 위에 오를 때 외에는 경쟁을 해 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요즘은 튀어야 삽니다. 속하는 지존께서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합격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한 것입니다.”
“휴우…… 면접관 뇌리에 확실하게 박히긴 하겠구나…….”
적사결은 쓴웃음을 지으며 신분패를 품에 넣었다.
‘뭐, 상관없겠지. 나야 금개만 만나면 되니까. 그나저나 얘는 좀 과잉 충성이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쩝.’
주군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월은 관련 자료를 남긴 후 기주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적사결은 사월이 남긴 자료를 질린 듯 보며 고개를 저었다.
‘더럽게 많네…….’
적사결은 자료를 읽어 보지도 않고 침상에 누워 잠이나 잤다.
자신이 고작 거지를 뽑는 시험에 떨어질 일은 없었으니까.
* * *
개방 낙양 분타.
평소 거지들만 가득했던 그곳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물론 그들 대다수는 이번 공채의 지원자들이었다.
‘세상살이 팍팍한 모양이야. 거지가 되겠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니.’
입문하기 위해서는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하지만, 동전 한 닢 가지지 못한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금개의 직속 수하가 된다면 최소한 굶어죽을 염려는 없기에 모인 것이었다.
‘접수는 이쪽인가.’
접수대로 다가간 적사결은 사월이 준비해 준 지원서와 자기소개서, 그리고 인적 사항이 기재된 서류를 제출했다.
‘거참, 거지새끼 되기 무지하게 번거롭구먼.’
내야 할 서류도 많았지만 접수원의 설명에 따르면 서류 통과 후 면접을 보아야 하고 준비된 시험 과제를 통과해야 합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적사결은 사월이 제시했던 두 번째 방법을 택해 여기 모인 거지들을 다 쳐 죽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나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애쓴 사월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 * *
“아, 정말 뽑을 만한 놈이 없구먼.”
개방의 오결 제자이자 일심당의 당주 붕산개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신입이 다 그렇지, 뭐. 잘 좀 봐. 저 많은 사람 중에 쓸 만한 놈 없을까.”
붕산개와 함께 심사관인 신의당의 당주 진덕개가 말했다.
“많으면 뭐 하냐. 기본이 안 된 놈도 이렇게 많은데. 하! 이 새끼는 본 방을 개방이 아니라 게방이라 적었네. 개병신 새끼, 나가 뒤져라.”
붕산개는 탁자 밑에 놓인 불합격 상자에 지원자의 서류를 집어 던졌다.
“큭큭. 그건 양반이네. 이놈은 내용을 보니 하오문 지원 서류에 이름만 바꿔 냈다니까.”
“이런 호로 새끼, 본방을 뭐로 보고.”
“뭐로 보긴, 거지발싸개로 보는 거지.”
진덕개가 싸늘한 얼굴로 지원서를 구겨 불합격 상자에 집어 던졌다.
“토 나온다, 진짜. 일곱 명 뽑는 데 지원자가 만 명이라니. 흐아암.”
붕산개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쩍쩍 했다.
“분타주께서 직접 하명하신 공채다. 허투루 살펴선 안 되니 다들 좀 참아.”
세 명의 심사관 중 마지막 일 인, 의기당의 당주 삼살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삼살개 자네가 본 지원자들 중에 괜찮은 놈 없는가? 우리 쪽은 영 꽝인데.”
진덕개의 물음에 삼살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나도 마찬가지네. 대부분 인적 사항에서 걸리는 군.”
대부분 무림 문파와 연관이 없는 자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공 한 수 배우지 못한 자를 분타주의 지속수하로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자는 일인전승의 무공을 익히고 있되 강호 초출이어야 하고 정보원으로서 기본 소양을 가진 인물이었다.
다음 날.
밤을 새워 지원서를 읽은 세 심사관들은 일차적으로 골라 놓은 서류를 보며 논의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서류 통과자를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모두 인적 사항 깨끗하고 서류적으로 문제가 없는 자들일세. 각자 걸리는 자들이 있으면 더 추려 보게.”
삼살개의 말에 진덕개가 먼저 다섯 개의 지원서를 골라내었다.
“이놈들은 탈락.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완벽해. 분명 세작일 가능성이 높아.”
다섯 개의 지원서는 신입이 아닌 경력자의 지원서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붕산개가 열다섯 개의 지원서를 골랐다.
“이 새끼들도 탈락. 외모가 단정하지 못해.”
“푸하하하. 자네보다 잘생겨서 그런 거 아니고?”
“야, 뒤지고 싶냐?”
“킥킥.”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진덕개 역시 수긍했다.
붕산개가 고른 자들은 외모적으로 인상이 남는 특징이 있었다.
어떤 자는 입술이 두껍고, 또 어떤 자는 코에 점이 있었고, 또 다른 자는 눈매가 날카로웠다.
무난하고 평범한 인상은 일급 정보원의 기본 조건 중 하나였다.
자신들은 그저 그런 정보원을 뽑는 것이 아니기에 심사 기준이 높았다.
“삼살개 자네는 안 고르는가?”
“흐음…….”
잠시 고민하던 삼살개는 스무 개의 지원서를 빼 들었다.
“이들도 탈락시켜야겠군.”
“아니, 이들을 왜?”
붕산개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보기에 삼살개가 고른 자들은 만 명의 지원자들 중 가장 나은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자네가 이들이라면 오대세가의 정보원과 본 방의 정보원 중 어느 쪽이 되고 싶겠나?”
“……커험, 흠흠.”
붕산개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해 댔다.
저들이라면 차후 오대세가의 정보원이 되거나 이중 세작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중에라도 충성심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처음 진행하는 공채에 그런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다.
“면접도 보기 전에 다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혀를 차는 진덕개의 말에 삼살개가 쓰게 웃었다.
“믿을 만한 사람 뽑는 게 가장 힘들다지 않은가.”
“백의개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믿을 수 있는 인재가 나오는 거 아닌가. 나는 갑자기 공채를 뽑자는 분타주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백의개는 개방 입문 후 삼 년 동안 의결이라 부르는 매듭이 없는 거지를 이르는 말이었다.
삼 년은 신입 방도를 지켜보며 개방도로서 결격 사유가 없는지 검증하는 시기인 것이었다.
진덕개는 본래의 전통이 아닌 새로운 체계의 도입을 탐탁지 않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분타주이신 금개 어르신의 결정이네. 삼당의 당주인 우리가 힘이 되어 드려야지 않겠나. 너무 투덜대지 말게.”
삼살개의 말에 진덕개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럼 나머지 지원자들은 일 차 서류 전형 통과자로 처리하고 이 차 면접 준비를 하세.”
탁자 위에는 합격자의 십 배수, 일흔 개의 지원 서류가 놓여 있었다.
세 명의 심사관은 쉬지도 못하고 면접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 *
“아이고, 골이야. 뇌가 녹을 것 같아. 에휴.”
붕산개는 엎드린 채로 한숨을 푹 쉬어 댔다.
자원자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한 명씩 면접을 보다 보니 시간이 길어진 데다가, 지난밤을 새웠기에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조금만 힘내게. 이제 마지막이지 않은가.”
삼살개의 말대로 지금 그들은 한 명의 지원자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한데 이자를 꼭 봐야 하나. 나는 영 못마땅한데…….”
진덕개는 지원자의 서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붕산개는 진덕개의 말에 눈을 빛내며 서류를 살폈다.
“이야, 이놈 이거 물건이네. 한데 이런 놈이 어떻게 서류 통과했지? 피곤해서 놓쳤나?”
“탈락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저 가족 중 한 명이 걸릴 뿐이지, 뭐.”
진덕개는 가족 사항의 첫 줄, 부모의 이름을 기입하는 부분을 툭툭 쳤다.
“걸린다기보다는 다소 찜찜하다 해야겠지. 그 염석진의 아들이니까.”
삼살개는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하나 반골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떨어뜨리는 건 기준에 맞지 않네.”
대화가 길어지자 붕산개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알았으니 그만 들이자고. 어차피 마지막이니 후딱 보고 쉬고 싶군.”
* * *
적사결은 의자에 앉아 눈앞에 자리한 세 명의 심사관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차례까지 기다렸기에 살짝 짜증난 상태였는데 질문들이 은근슬쩍 긁어 대니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염장 지원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본 방에 지원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적사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대답했다.
“개방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강호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많은 사람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함으로써 제 인생의 보람을 찾고자 합니다.”
개성도 없고 특색도 없고 재미까지 없는 대답이다.
백이면 백, 지원자 대부분은 이딴 소리를 지껄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적사결은 그대로 대답했다.
앞서의 질문에서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했거나 실수가 있었다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독한 말을 해야겠지만 적사결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적월을 키운 경험상 자신은 합격이었다.
“헌신, 희생, 보람. 좋은 단어 선택이군요. 정보원은 말이나 글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염장 지원자는 서면과 대면 모두 흠잡을 데가 없군요.”
삼살개는 세필 붓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추가 채점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좋은 말들이지. 그대로만 행한다면. 한데 염장 지원자의 아버님께서는 왜 끝까지 희생하고 헌신하지 못했을까요?”
거슬리는 말을 꺼낸 이는 붕산개였다.
“염석진,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해방문을 위해 헌신했었지만 단 한 번의 사건을 계기로 변절했지요. 지원자가 말해 보세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요?”
“…….”
적사결은 긴장한 채 대답하지 못했다.
염석진이란 인물은 알지만 세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몰랐다.
사월이 남긴 보고서에는 분명 있겠지만 귀찮아서 읽어 보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이런,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네가 말하고 질문할 것만 하란 말이야.’
이런 때 섣불리 실수하면 거짓 신분이 들통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눈앞의 놈들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염장 지원자, 지원자의 입으로 말해 보세요. 그때 그 사건 말입니다.”
“…….”
몰라 새끼야, 모른다고.
“휴우.”
붕산개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다가왔다.
마치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들이라면 그 사건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말을 못 합니까?”
툭. 툭.
붕산개는 앉아 있는 적사결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바퀴 돌았다.
“희생? 헌신? 좋은 말로 포장한다 하여 세상이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은 아니지, 후후.”
턱.
등 뒤에서 적사결의 어깨를 짚은 붕산개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지원자의 아비가 매국노와 다를 게 뭐지? 이 자리에서 직접 그때의 일을 말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말해 보도록.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에서 탈락시킬 테니까.”
이제는 완연하게 말을 놓은 붕산개는 상체를 일으키며 이죽거렸다.
‘마지막 압박 면접만 잘 넘기면 합격이니 머리를 잘 굴려……!’
붕산개는 지루한 면접을 끝내고 싶어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때 붕산개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적사결이 튕기듯 일어났고 그의 뒤통수가 다가오자 눈앞이 번쩍했기 때문이었다.
뻐어억.
“크악!”
반사적으로 코를 만지는 붕산개의 눈앞에 이번에도 무언가가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휘돌며 날린 적사결의 뒤돌려 차기였다.
퍼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