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9화>
일수회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후.
적사결은 풍류객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데 대로를 걷던 그가 돌연 샛길로 빠지더니 한옆의 대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만 나오지 그래.”
적사결의 말이 끝나자 대나무 그늘 아래에서 흑의무복을 입은 인영이 솟아올랐다.
왼쪽 어깻죽지에 붉은 초승달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적월의 대원 중 한 명이 분명했다.
“네놈은 누구냐? 어찌 본교의 지존만이 아시는 표식을 사용한 것이지?”
“사월이로군. 네가 하남을 맡았었나 보구나.”
“……!”
복면을 하고 있음에도 상대는 자신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것도 정보원으로서의 이름인 사월을.
‘하오문? 개방? 화영문? 어디냐…… 설마 정말로 우리들의 보안을 뚫은 것이란 말이냐…….’
사월은 상대가 정보 단체라 짐작했으나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교에서도 자신들 적월의 존재를 아는 자는 지존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적월의 실력을 평가 절하하지 말거라. 천하에 너희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려면 하오문 정도가 통째로 달려들어야 가능하지 않겠느냐.”
적사결은 사월의 머릿속 생각을 아는 듯이 말했다.
사월은 낯선 외모지만 익숙한 눈빛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마치 자신들의 지존을 대하는 듯한 위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놈은 누구냐?”
“후후후, 일수회에서부터 쭉 지켜봤을 텐데 아직 모르겠느냐?”
“…….”
그 말대로 사월은 수하로부터 표식을 보고받은 후 적사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수회에서 음가경과 초수를 교환할 때 본 그것은 광혈수라공의 검초인 격혈경혼이었다.
비록 초식의 형뿐이었지만 말이다.
‘설마 지존의 숨겨진 제자? 아니야. 그런 자가 있었다면 지존께서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을 리 없다. 더구나 설사 제자라 하더라도 그분께서 적월의 존재를 밝혔을 리도 없어…… 그렇다면…….’
스으윽.
사월의 신형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적사결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아는데, 자신은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
정보를 다루는 자에게 그보다 수치스런 것은 없었다.
이런 경우 적월이 취할 행동은 무력으로서 밝혀내는 것이었다.
정보대라 하나 그들 역시 무를 숭상하는 천마신교의 일원이었으니 말이다.
피슛.
찰나에 느낀 감각에 몸을 비틀었으나 적사결의 목에 생채기가 났다.
음가경과의 대결에서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사월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산월단살. 많이 늘었구나.”
적사결은 방금 전의 초식명을 말하며 싱긋 웃었다.
피핏. 피피핏.
또다시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검격이 뻗어 나왔고 이번엔 사왕이 도집째 휘둘러졌다.
자칫 사왕의 예기에 사월이 다칠까 저어되었기 때문이었다.
터엉. 터터텅.
“흑야만월. 하단에 의식을 더 두도록.”
적사결은 지도대련을 하듯 사월의 공세를 막아 갔다.
비무 아닌 비무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삼십여 초의 일방적인 방어? 끝에 막바지에 이르렀다.
티잉.
사왕이 반 바퀴 휘돌며 사월의 단검을 허공에 날려 버린 것이었다.
적사결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단검을 한 손으로 받았다.
“합격이다.”
적사결이 미소와 함께 손에 든 단검을 건넸다. 사월은 부복한 채 그것을 받으며 외쳤다.
“신교출세, 만마앙복. 속하 사월. 지존을 뵙습니다.”
자신들에게 적월검법을 가르친 적사결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 이런 신위를 보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합격이라는 그 어투와 어조는 무공을 배울 때 수십 수백 번 들었던 말이었다.
그제야 사월은 적사결의 껍데기가 아닌 그 속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중원으로 내보낸 후 일월이 아닌 대원과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적사결은 오랜 해후와 함께 그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사월에게 털어놓았다.
황당무계하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건만 사월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할 말을 다한 적사결이 사월에게 물었다.
“혹여 본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하라.”
“지존께서 사슴을 말이라 하시면 속하는 그렇게 받아들일 뿐입니다. 어찌 의문을 품겠습니까.”
지록위마(指鹿爲馬).
최초의 통일 제국 진, 당시 황제 이상의 권세를 누린 환관 조고의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였다.
조고는 사슴을 명마라 부르며 황제 호해에게 진상했고, 황제는 사슴을 말이라 부르는 조고의 행태를 보고도 이를 바로잡지 못하였다 했다.
이는 대신들조차 조고의 눈치를 보며 이구동성으로 명마라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사월은 지록위마를 역설적이게도 충심의 표현으로 빗댄 것이었다.
“다만 지존께서 앞으로의 행보를 어찌하실 것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연락을 한 것이니 말이다.”
적사결은 자신의 추측과 천하사괴에 대해 말해 주었고 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대원들에게 알려 낙양의 그를 제외한 나머지 천하사괴의 소재를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도록. 그리고 일월에게 알려 본 단에 있는 무허 그놈의 동향을 알아오라 전하거라.”
“존명. 더 하명하실 것은 없으십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현재 본좌를 추적 중인 놈들이 있다. 땡중들은 일수회 건과 엮어서 발이 묶일 것이나 혹시 있을 변수를 네가 챙기도록 하거라. 그리고 금의위 놈들의 천리추종향을 지울 방법을 알아오거라. 성분이 무엇인지 도통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구나.”
“존명.”
적사결의 명을 받은 사월은 그 자리에서 허공에 녹아들었다.
“이제야 좀 한숨 돌리겠군.”
수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지금까지만 해도 자신 같은 지고한 위치의 존재가 파락호 따위와 드잡이질을 해야 했다.
오랜만에 느긋한 기분을 느끼는 적사결이었다.
* * *
“이놈!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종리세가 외당에 소속된 광검대의 대주 종리광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보며 일갈했다.
그는 일수회의 회주인 용식이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린 것입니다. 소림의 속가제자라는 그놈이 저희 일수회를 해체시키고 재물을 모두 압수해 갔습니다.”
“이 일대가 본가의 관할이 된지 십수 년이 지났다. 그동안 소림에서는 이러한 분쟁을 염려해 한 번도 근방에 얼씬거린 적이 없거늘 지금 그 말을 믿으란 것이냐!”
종리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종리세가에서 그간 일수회의 행태를 알고서도 놔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근방 전장을 통해 일수회의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모든 재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일수회를 일종의 비자금으로 여긴 것.
언제든지 압수할 수 있게 해놓고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저금통 같은 존재가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파락호 패거리임에도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모을 수 있었고 말이다.
“정말입니다. 제가 그놈이 싸움 도중에 흘린 신분패를 주웠습니다. 분명 신현문이라 새겨져 있었습니다.”
용식은 적사결이 시킨 대로 품에서 신분패를 꺼내 광검대 무인에게 건넸다.
그것을 전해 받은 종리광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놈의 말대로 분명한 신현문의 신분패였고 그곳은 소림의 속가 문파 중 하나였다.
‘본가를 견제하는 오대세가 때문에 이런 놈들을 키워 비자금을 만들어 놓았건만 엄한 놈이 알맹이만 쏙 빼먹어!’
음가경이라는 사파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놈은 세력 없이 떠돌아다니는 낭인이었기에 추적해 재물을 되찾고 사살하면 그만이니까.
한데 소림과는 머리 아프게 협이니 뭐니 입씨름을 해야 했다.
종리광이 생각을 하는 와중에 외곽 경계를 담당하던 수하가 장원으로 들어섰다.
“대주님.”
“무슨 일이냐.”
“마을 외곽에서 소림의 움직임이 파악되었습니다.”
“뭐라? 인원이 얼마나 되느냐?”
“나한전 소속 나한 한 명과 무승 삼십여 명입니다. 또한 소림 속가 문파의 제자들 역시 다수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새끼들이…….”
본가에 사전 협조 요청도 없이 관할지에 그만한 수의 인원이 대거 나타난 상황이었다.
더구나 놈들의 속가제자가 일수회를 일망타진하면서 말이다.
‘좆같은 협행이라니. 설마 구파일방의 망령들이 다시 움직이려는 건 아니겠지…….’
작금의 정파, 의천맹의 주축은 오대세가였고 과거 구파일방이었던 도가와 불가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해 있었다. 특히, 소림의 경우 천마신교의 발호가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더구나 최근 있었던 전쟁으로 공동파마저 몰락했으니 그간 전통의 강호라는 명성으로 먹고 살던 그들의 위기감은 더 심해졌을 터였다.
“종리양.”
“예, 대주님.”
“일조를 데리고 도망친 일수회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나머지는 본 대주와 함께 소림승들에게 갈 것이다.”
“회주인 저놈은 어찌할까요?”
“도망치다 사살된 것으로 처리해.”
종리광의 말에 용식은 사색이 되었다.
자신들이 비자금을 맡는 꼭두각시라는 것을 몰랐던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정파의 영역에서 경제사범은 죄를 엄중히 다뤄도 몇 달 뇌옥에서 살다 나오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왜 여기에 정착했는데!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구! 억!”
용식은 가슴에서 일어난 통증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꺼…… 꺽……. 이……. 개새…….”
푸슉.
가슴에 삐져나왔던 검이 빠져나가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용식은 싸늘히 식어가는 의식 속에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차라리 무조건 죽이는 마교나 들개들이 득실거리는 사파가 나았을 것을…… 더러운 정파 새끼들…….’
* * *
“대협! 이게 다 무엇입니까?”
아평이 눈이 휘둥그레진 얼굴로 적사결에게 물었다.
그의 앞에는 일수회와 작두파에서 모아온 금은보화와 전표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적사결은 한 푼도 손대지 않고 그것을 내어 놓은 것이었다.
“그간 파락호 놈들에게 피해 본 이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시오. 물론 은밀히 해야 할 것이오. 이유는 잘 알고 있을 거요.”
이렇게 막대한 돈이 눈에 띄게 풀리면 종리세가에서 곧바로 알아챌 것이고 출처가 어딘지 캐물을 것이 뻔했다.
그러면서 장물취득이니 어쩌니 갖은 명분을 들어 압수할 것임이 분명했고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씨라 불리는 노상인이 나서며 말했다.
“은인께서는 걱정 마십시오. 저희도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들 알아서 잘 처신할 것입니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짐작대로 공동운명체라면 이만 한 돈이라도 꼬리를 잡히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황노. 정말 이것을 저희가 가져도 되는 것입니까?”
“아평, 이 사람아. 이 많은 돈을 은인께서 내주시는 이유를 모르겠는가? 협의지도. 나도 소싯적에나 한두 번 보았던 협행을 은인께서는 하고 계신 것이네. 이런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이런 분이 나오시다니. 정말 우리 같은 것들에게는 홍복이 아닐 수 없군. 허허허.”
황노의 말을 듣던 아화는 활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아빠. 콩 한쪽도 나눠 먹는 거랬어요. 적운 아저씨 혼자 이거 다 먹으면 탈날 거예요. 그렇죠, 아저씨? 헤헤.”
아화의 말에 적사결은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하. 맞다. 분에 넘치는 큰돈은 화를 부르지. 체할 것 같으니 좀 나눠 먹자꾸나.”
정말 맹랑한 꼬마가 아닐 수 없었다.
“대협, 고맙습니다. 인근 상인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황노가 고개를 숙이자 주변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대협.”
“진정한 협객이십니다.”
짝짝짝짝. 짝짝짝.
십여 명의 상인들이 적사결을 둘러싸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본교에서도 늘상 하던 일인데…… 만일 마도인이라 밝힌다면 마귀니 뭐니 헛소리를 하겠지…… 껍데기가 바뀌었다고 협객이라…… 거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
적사결은 사람들의 환호에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