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15화>
슥슥.
동이 터오는 새벽부터 적사결은 객잔 한구석에 표식을 새겨 넣었다.
그가 새긴 표식은 자신의 직속 정보대인 적월에게 남기는 것이었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나 천마신교는 특히 교주의 권한이 강하기에 사조직이 강력했다.
적월은 적사결이 교주에 오른 후 심혈을 기울여 키운 수하들이었다.
‘역시 직속으로 정보대를 만들길 잘했어. 이럴 때 얼마나 유용해.’
신교의 정보대인 흑영단도 있었으나 정보의 경로는 다양할수록 좋다는 것이 적사결의 지론이었다.
적월과의 연락 수단은 오직 자신만이 알기에 쉽사리 정체를 밝히기 어려운 지금의 상황에서 신교 내부 정보를 얻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후딱 튀어 와라. 이것들아.’
그렇게 마지막 암어를 남긴 적사결은 객잔 내부로 들어갔다.
그때 아화의 아비인 아평도 준비를 위해 나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아아, 내일 있을 예약 준비를 하려면 바쁘잖소.”
“한데 정말 적운 님의 말대로 준비를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휴우…….”
아평은 적사결을 항해 한숨을 쉬었다.
적운은 본명을 쓸 수 없기에 적사결이 알려 준 가명이었다.
“걱정 마시오. 혹여 주인장에게 손실이 나면 내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보상해 드릴 테니. 어서 갑시다.”
적사결은 아평을 재촉하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팔백인 분의 요리 준비를 위해 휴업을 하고 재료를 사러 갈 작정이었다.
새벽장.
온갖 야채와 과일을 비롯해 생선과 육류 등 먹거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적사결은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아평의 뒤를 따랐다.
솜씨 좋은 숙수인 아평은 좋은 재료를 잘 골랐고, 지역 토박이라 그런지 새벽장의 상인들과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김씨, 오늘 물건 좋구려.”
“요즘 비가 솔찬히 내리는 것이 농사짓는 맛이 난다니께. 오늘은 뭐가 필요한가?”
김씨의 물음에 아평은 팔백인 분에 걸맞게 엄청난 양의 재료를 주문했다.
“아니, 이보게. 그 정도 양이면 우리 가게 물건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네. 무슨 일 있는가? 혹시…….”
김씨가 말끝을 흐리며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평은 씁쓸한 표정으로 어제 있었던 작두파의 일을 알려 주었다.
“아이고, 이 몹쓸 놈들. 잠잠하다 했더니 또 그 짓거리구먼. 한데 어쩌려고 그 준비를 하려 하는가? 차라리 위약금을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계약금이 스무 냥이라 위약금이 이백 냥이나 되네. 그 큰돈을 어찌 바로 구하겠는가…….”
“이…… 이백 냥이라니…… 듣는 내가 속이 터지는구먼. 어후.”
김씨는 가슴을 쾅쾅 치며 울분을 토했다.
이백 냥은 영세 상인들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객잔을 내놓든 저당을 잡혀 대출을 받든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릴 만큼 말이다.
“거참. 아직도 날 못 믿는 거요?”
적사결은 혀를 차며 아평의 등을 툭 쳤다.
객을 뭘 믿고 믿겠냐 싶지만 교주 시절 늘 신실한 믿음만을 대했던 적사결로서는 섭섭했다.
“주인장, 여기 대금은 내가 치를 테니 객주인이 주문한 재료는 풍류객잔으로 좀 갖다 주시오. 나머지는 배달비니 주인장이 알아서 하시고.”
적사결이 내민 전표를 받은 김씨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나 많이.”
“오전 내 부탁 좀 하겠소. 아참. 그리고 내일 오시에 인근 상인들과 주민들을 풍류객잔에 모이게 해 주시오.”
“저희들을 말입니까?”
“오면 알게 될 것이오. 내 섭섭지 않게 사례를 할 것이니 부탁 좀 하겠소.”
“아이고, 사례는 무슨. 이 돈이면 충분합니다요.”
김씨는 전표를 품에 넣으며 허리를 연신 숙여댔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아평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주인장은 먼저 돌아가 음식 준비를 하시오. 난 좀 들를 곳이 있으니 볼일이 끝나면 가겠소.”
“알겠습니다. 이따 뵙지요.”
아평이 자리를 뜨자 적사결은 무기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검을 지니지 못했기에 손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검을 보러 왔소.”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내는 검이 진열된 쪽으로 적사결을 안내했다.
송문고검을 비롯해 협봉검, 연검 등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것부터 군부에서 사용하는 장군검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작은 현의 무기상이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속이 꽉 찬 곳이었다.
“하하하. 놀라셨지요? 저희 가게를 오신 분들 대부분 그런 반응입니다.”
“솔직히 그렇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곳은 섬서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으니까요.”
주인장의 말대로였다.
진하현은 섬서와 하남의 경계에 있으며 조금만 북상해도 산서에 이르는 요지라 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지리적 이점이 있는 것이다.
“찾으시는 물건이 따로 있으십니까?”
“검이면 뭐든 상관없소. 단, 강도가 뛰어나야 하오. 이왕이면 현철로 만들어진 것이면 좋겠군.”
검은색 철이기에 현철로 불리는 그것은 희귀 금속인 운철을 제외한 가장 단단한 금속이었다.
“현철이 섞인 합금은 있으나 통짜는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현철도 워낙 값나가는 금속이니 말입니다.”
“흐음…….”
적사결이 강도를 따지는 것은 내공 때문이었다.
내공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니 상대의 검기나 강기를 막으려면 검의 강도가 뛰어나야 했다.
“현철검은 강도는 좋지만 중량이 너무 나가지 않겠습니까. 이놈은 백련정강을 통째로 사용했기에 강도도 뛰어나고 가볍기도 합니다. 어떠신지요?”
백련정강은 질이 좋은 철을 백 번 이상 정련한 강철이었다.
순도 높은 백련정강은 만년한철과 현철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적사결의 눈에 들리는 만무했다.
그는 천마신교의 지존이었으니 말이다.
‘적령만 한 검이 없구나.’
자신의 애검, 적령은 만년한철을 통짜로 제련한 귀염둥이였다.
만년한철은 현철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뛰어난 예기를 발하며 검기나 검강을 사용 시 내력 전달의 효율이 좋기에 최고의 보검 재료로 각광받는 철이었다.
희귀 금속인 데다 조직의 최고위층이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 이곳의 무기상에 만년한철로 만든 검은 없었다.
“검이 아니라 도는 어떻소?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있겠소?”
“아쉽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장의 대답에 입맛을 다시는 적사결은 문득 벽에 걸린 기형도에 시선이 갔다.
천마신교의 지존으로서 수많은 보검을 보아 왔기 때문일까.
도집에 갇혀 있어 날을 보이지 않지만 적사결의 안목을 피할 순 없었다.
“저놈 좀 볼 수 있겠소?”
“그것이…… 저것은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주인장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전시용인 듯 계산대 위의 벽에 걸린 그것은 한 눈에도 중원의 것과는 달라 보였다.
중원의 도는 중병으로 분류되기에 일단 도신이 두텁다.
한데 눈앞의 도는 조선의 환도나 왜국의 왜도와 같이 얇았다. 한데 그들의 것과는 또 달랐다.
적사결로서는 처음 보는 형태의 도였다.
“일단 보기나 합시다.”
적사결의 막무가내에 주인장은 도를 내려 건네주었다.
스릉.
“허어…….”
적사결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뱉었다.
회흑색 도신에 물결치는 무늬가 인상적인 만곡도.
특이한 것은 도첨에서부터 도신 삼분지 일의 길이까지 양날이란 점이었다.
중원의 도는 오직 한쪽에만 날만 내기에 더욱 독특해 보였다.
‘찌를 때 저항을 줄여 주는 기능을 하겠구나.’
적사결은 한 눈에 형태의 의미를 파악하고 감탄했다.
도법이라 하여 베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만곡도는 베기와 찌르기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고안 된 무기였다.
“이거 어디 거요? 중원의 것은 아닌 듯한데.”
“이형의 도라 관심을 가지는 분이 드문데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과거 서역에서 파사국이라 불린 곳의 무구입니다. 그곳 말로는 샴쉬르라 하지요.”
“사무시르? 무슨 발음이 그렇소?”
“파사국 말이니까요. 중원의 말로 해석하자면 사자의 꼬리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끝 부분이 환도나 왜도보다 더 극명하게 휘어 있었다.
사자의 꼬리라는 말이 어울리는 형태였다.
“이 도는 당대 저의 선조께서 파사국에 교역을 갔다 우연히 얻은 것입니다. 이 녀석에게 매료된 선조께서는 이후 무기상을 차리셨고 저의 대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쇄국 정책을 펴는 작금의 명과 달리 과거 당나라 시절에는 타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었다.
때문에 여러 나라의 문물이 유입되며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절이 또한 당나라였다.
‘당나라 때 무구라면 거의 천 년이 다 된 거라는 말인데…….’
적사결은 그 정도 세월을 견디고도 자신의 이목을 끈 파사국 도에 더욱 끌렸다.
“한데 이 물결무늬는 무엇이오? 장식용인가? 무척 독특하군.”
“조부께 듣기로 이 무늬를 가진 무구는 파사국에서도 많지 않다 들었습니다. 여러 대장간에 의뢰해 보았지만 흉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저도 잘 모릅니다.”
물결무늬의 효용을 모른들 어떤가. 이미 적사결은 이 도가 물건이라는 데 확신을 가진 상황이었다.
“주인장, 이거 나한테 팔지 않겠소? 내 값은 후하게 쳐드리리다.”
“안 됩니다. 이 도는 선조께서 남겨 주신 가보입니다.”
주인장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의 눈을 보던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금방 다녀오리다.”
적사결은 주인장의 대답도 듣지 않고 풍류객잔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뭘 주면 눈이 뒤집어지려나.’
봇짐을 뒤적이다 적당한 녀석을 집어 품에 넣은 후 다시 무기상을 향해 달렸다.
주인장은 다시 나타난 적사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보시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하더라도 어찌 가보를 팔겠소. 더구나 이 도는 거의 천 년가량 세월이 흘렀기에 실전에서 쓰지도 못할 것이오. 그냥 다른 걸 더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았으니 일단 이걸 먼저 보고 말하시오.”
적사결은 품에서 헝겊에 쌓인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주인장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그것을 펼쳤다.
한데 그 속을 확인한 주인장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헉! 이……. 이……. 이……. 이건!”
내쉰 숨을 들이마시지도 못한 채 주인장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성인 팔뚝만한 산삼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형태를 한 인형설삼!
“어흠. 천 년 묵은 놈이오. 그쪽도 상인이니 그 가치를 알 것이오.”
“후욱. 후욱. 후욱…….”
주인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일 이것을 이름 난 무림 문파에 가져간다면 어찌 될까?
평생 보기도 힘든 금은보화를 얻음은 물론이오 그들을 뒷배로 삼대, 아니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칼부림이 흔한 세상에서 일신의 안위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었다.
‘흐흐.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하나 그것이 천만금 아니 억만금이 된다면 흔들리지 않을 자 누가 있겠나.’
적사결은 흔들리는 주인장의 눈빛을 보며 쐐기를 박자 마음먹었다.
“주인장 이게 뭔지 알겠소?”
적사결이 내민 손바닥 위에는 갈색의 단환이 놓여 있었다.
청량한 냄새는 보기만 해도 가슴속이 시원해지는 신단이었다.
“이게…… 뭡니까?”
“소림이 만든 영약 중의 영약, 소환단이오. 산삼은 내다 파시고 소환단은 주인장이 드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구려. 모르긴 몰라도 세수 팔십에도 애 서너 명은 너끈히 가능할 게요.”
“허…… 저…… 정말입니까?”
“어허. 속고만 살았나. 여기 단환 위에 인장보이시오? 이것이 소림 약왕전 전주의 인증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오.”
적사결의 설명을 들은 주인장은 손안의 소환단을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렇지 않아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그였기에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파…… 팔겠습니다. 이 도는 오늘부터 대협의 것입니다.”
가보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을 후손이 더 귀하지 않겠는가.
“탁월한 선택이오. 하하하.”
도를 건네받은 적사결은 도신을 꺼내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주인장 이 가게에서 가장 단단한 도검을 하나 더 골라 주시겠소?”
적사결의 말에 주인장은 한편에 진열된 검을 가져왔다.
“현철이 섞인 검입니다. 이건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적사결은 검을 받아 든 후 두 개의 검과 도를 맞대었다. 그리고 힘껏 휘둘렀다.
쩌엉.
“헉.”
적사결과 주인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사국 도가 현철이 섞인 검을 두 동강을 내버린 것이었다.
주인장 역시 지금껏 가보인 파사국 도를 시험해 보지 않았기에 성능을 본 것은 처음인 상황이었다.
‘완전 초대박이다…… 이 정도 예기라면 만년한철로 만든 검 못지않아. 더구나 강도 역시 현철에 준할 정도야.’
이 하나 빠지지 않고 명검을 단칼에 베어 버린 것.
내공을 사용했을 시 어떤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서는 현철과 만년한철의 특징을 고루 갖췄다 볼 수 있었다.
적사결은 도신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네 이름은 오늘부터 사왕이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인지 이름 모를 무기상에서 적사결은 천고의 보물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