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이혼대법 2화>
* * *
‘이…… 이게 무슨…….’
구양패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 눈을 깜박거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 순간에도, 바닥에 널브러진 빈 술동이는 착실하게 늘어 갔다.
텅. 데구루루.
갓 비워진 동이가 굴러와 구양패의 발끝에 닿았다.
구양패는 고개를 들어 동이가 굴러 온 방향을 보았고 그곳에는 만취한 교주, 정확히는 적사결의 몸을 한 무허가 있었다.
“여어, 구양패. 와서 한 잔 하지그래? 끄억.”
무허는 능글맞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구양패를 반겼다.
교주만이 아니라 마교의 장로와는 대부분 손을 섞어 보았기에 그는 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교주님! 어찌, 한 번의 패배로 이런 모습을 보이십니까!”
‘잉?’
무허는 구양패의 걱정 어린 말과 수심이 깊은 얼굴에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대충 예상이 가는 다음 말이 구양패의 입에서 이어졌다.
“늘 그랬듯이 이겨 내실 수 있을 겁니다. 교주님은 누가 뭐라 하건 본교의 지존이십니다. 부디 평정을 잃지 마십시오.”
구양패는 뜨거운 눈으로 무허를 바라보았다.
‘흐흐. 그렇단 말이지.’
무허는 그런 구양패를 보며 속으로 씨익 웃었다.
“이보게.”
“말씀하십시오.”
“내 이리 술독에 빠진 것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네.”
“생각이라 하시면……?”
“소림, 아니 천하제일인이신 무허대사. 그분이 그렇게 고강한 무공과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이유가 왜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가?”
구양패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천하제일인? 대사? 그분? 게다가 고강한 무공? 훌륭한 인품?
교주의 입에서 무허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다니.
“바로 술이네! 승려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술을 통해 한없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 바로 틀에 박히지 않은 그분의 행동이 그 강함의 바탕이었다는 말이네.”
“자유로움…….”
구양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을 벗어나고 주어진 한계를 깨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말은 흔하디흔한 말이었다.
하나 그것이 교주 정도의 절대자에게서 나온다면 그 무게는 남달랐다.
“해서 빈…… 아니 본좌는 무허대사를 본받아 이 술이라는 놈부터 제대로 배우려는 것이네.”
무허는 무의식적으로 승려의 말투가 나오는 것을 삼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자신이 교주가 아니라는 것을 들킨다면 마구니가 가득한 이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말인데. 구양 장로.”
“네, 교주님.”
“술 좀 더 가져오게나. 이게 마지막 한 동이라네.”
“……하하.”
구양패는 바닥을 구르는 오십여 개의 빈 술동이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술을 배우는 행위란 말인가. 배우기 전에 술독에 빠져 죽을 정도의 양에 구양패는 기가 질렸다.
“구양 장로?”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구양패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주의 거처를 나섰다.
‘그래. 나 정도의 수준에 어찌 저분의 경지를 판단할 수 있겠나. 그리고 생각해 보면 다행이지 않은가. 교주님께서 좌절하지 않으시고 무허 땡중을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길을 걷고 계신다는 것이.’
구양패는 복도를 걸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 * *
“지금 뭐라 했는가?”
의천맹주 종리천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수하에게 물었다.
“무허대사께서 소림으로 돌아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직 완전히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말인가?”
“그분의 성정에 대해서는 맹주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본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더니 정말 휙 하니 가 버리셨습니다.”
“후…… 정말 못 말리겠구나.”
종리천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었다.
취불, 무허.
언제나 제멋대로였으며 정사를 불문하고 괴짜들로 불리는 천하사괴의 일 인이었다.
일신의 무위는 정도제일인이란 별호로 대변될 정도로 정파의 범주에서는 명실공히 최강.
특히나 마교를 상대함에 있어 항마승이라 불리는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쨌든 그분께서 마교주를 쓰러트리고 가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휴우…… 교주의 상태에 대해서는 들어온 첩보가 있는가?”
“삼 일 전 깨어나 지금까지 술독에 빠져 있다 합니다.”
“호오. 술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던 그가 술을?”
“아마도 무허대사님께 패배한 것이 이유이지 않겠습니까?”
“후후. 그 성질 더러운 교주도 첫 패배는 꽤 쓰린 모양이군.”
종리천은 의자에 깊이 몸을 묻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교 교주 적사결의 상태가 그렇다면 당분간은 안심해도 될 터였다.
“일단 현 전선을 유지하고 방어선을 형성하라 지시하게.”
“하면 맹주님, 더 나아가 감숙을 회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무허대사께서 빠졌으니 당연하지. 자칫 교주가 보이는 지금의 모습이 함정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공동파에서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반발하면 지들이 나서서 본산을 되찾으라 하게. 본 맹이 공동파의 뒤치다꺼리를 언제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종리천은 차가운 표정으로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무림은 약육강식.
힘을 잃은 공동파는 더 이상 발언에 무게가 없었다.
* * *
숭산, 소림사.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는 무의 본산이 소림이었다.
개파조사인 달마 이후 무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공의 원류로서 그 이름을 떨친 곳.
무허의 몸을 지닌 적사결은 운신이 가능해지자 곧장 소림으로 왔다.
‘몸을 되찾아야 한다.’
그 목적에 부합하는 단초를 찾기 위해. 그리고 그 단초와 가장 가까운 곳은 바로 장경각, 천하 무학의 보고이자 각계의 방대한 지식을 보관하는 서고였다.
그곳엔 무공뿐만 아니라 세외로 불리는 서장, 남만, 북적, 동이를 넘어 서역까지 이르는 다양한 서책이 있었고 그 속에서 적사결은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살다 살다 내 이곳을 이렇게 들어가게 될 줄이야…….”
적사결은 장경각의 편액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강호의 무인들에게 가 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그 첫 번째가 눈앞에 있는 장경각이었다.
외인에게는 금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특히 천마신교의 교주인 자신이 아무런 제지도 없이 들어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탈탈 털어먹어 주마.”
적사결이 각오를 다지며 걸음을 옮겼다.
장경각 내부로 들어서니 좌우로 방대한 책장이 늘어서 있고 몇몇 학승들이 서책을 옮기며 정리 중에 있었다.
“태사백님을 뵙습니다.”
자신을 발견한 학승들이 일제히 반장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적사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
학승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주춤거렸다. 다들 태사백이 그걸 왜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적사결은 태연히 다시 물었다.
“내 오랜만에 들른 것도 있고 근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 것이니 어서 말해 보거라.”
“저, 공선 사숙께서 장경각주로 계십니다. 한데 자륜사에 보내는 불경 건으로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출타? 얼마나 말이냐?”
“삼 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학승들 중 똘똘해 보이는 자가 대답하자 적사결은 그에게 되물었다.
“그렇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원상이라 합니다.”
“그래, 원상아. 네가 날 좀 도와주겠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하늘 같은 태사백의 부탁에 원상이 얼떨떨해하며 묻자 적사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칠십이 종 절예. 진열된 것들 외에 따로 보관 중인 필사본이 있겠지?”
“혹시 모를 파손에 대비해 별도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면 그것들을 좀 가져오너라.”
“그것이…… 태사백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비고의 열쇠는 방장 어른께서 보관 중이기에 누구도 출입이 불가합니다.”
적사결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랬었지. 하면 학승들을 시켜 칠십이 권 모두 틈틈이 필사해 놓거라. 내 얼마 전 깨달음을 얻어 본사의 무공을 하나하나 뜯어 볼 요량이니. 주석을 달고 개량을 하려면 필사본이 필요하구나.”
“……저…… 태사백님…….”
원상은 우물쭈물하며 깔끔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설마 필사도 허락 맡아야 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아시겠지만…… 칠십이 종 절예는 필사본을 만들더라도 장경각 밖으로 유출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혹시나 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원상의 말에 적사결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승 절학에 대한 보안을 생각하면 당연한 처사였기 때문이었다.
“내 비급의 유출을 금하는 것은 잘 알고 있느니라.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 준비만 해 놓거라.”
“……네, 태사백님.”
궁하면 통하는 법.
방법은 만들면 그만이었다.
적사결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다음 용건을 물었다.
“그리고 이곳 장경각 내부에 대해 설명 좀 해 보거라. 오랜만이라 그런지 많이도 바뀌었구나.”
적사결은 뒷짐을 진 채 끝없이 늘어선 책장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신데…….’
아까부터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말을 다시 삼킨 원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이곳 1층은 불경이 절반 이상입니다. 그리고…….”
원상은 앞장서며 장경각 서책들의 분류기준에 정성껏 설명해 주었다.
한 식경 동안 모든 책장과 장격각 내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원상을 보낸 후 적사결은 홀로 남아 서책을 훑어나갔다.
‘대략적인 파악은 되었으나 스스로 분류해 보는 것은 또 다르지.’
차르르르륵.
적사결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수십만 권이 넘는 모든 서책의 내용을 꼼꼼히 읽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모든 서책의 핵심을 구분해 머릿속에 분류하는 거다. 중요한 것만 파악해 필사를 시키고 나중에 빼돌리면 되는 거야.’
그 후, 3개월.
텁.
적사결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백이십삼만 오천사백칠십이 권 중 몸이 바뀌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서책은 없었다. 그나마 유사한 현상을 꼽는다면 달마와 관련된 일화…… 하나 이런 걸 믿어야 되는 건가?’
달마의 외모와 관련한 일화는 마치 시골 촌부의 옛날이야기 같았다.
수행 중 유체이탈을 한 달마가 잠깐 사이 본래 몸을 잃어버리고 행려병자의 몸에 들어가 지금의 추한 외모를 지니게 되었다는.
‘일단 달마와 관련된 서책 세수경과 역근경이 남았으니 그걸 보고 판단하자. 분명한 건 이건 우연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거야.’
처음엔 기적이라 생각했지만 장경각에서 지내며 차분히 지난 일을 되돌아본 적사결은 머릿속 한구석에 꺼림칙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절대 고수가 가지는 육감, 또는 본능 같은 것이었다.
‘한데 만일 무허가 달마처럼 육신을 바꾸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정말 놈이 흉수일까? 아무리 또라이지만 항마승이라고까지 불리는 놈이 마교의 주구라 불리는 본좌와 몸을 바꿔치기 해?’
적사결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니야. 무허, 그 노괴는 천하사괴의 일인이다. 그 네 명의 또라이들을 상식선에서 판단해선 안 돼.’
무슨 짓을 저질러도 천하사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하나같이 천하에서 제일가는 괴짜들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허를 제외한 천하사괴들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그들이 기행 중 무언가 말도 안 되는 것을 얻었을지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무허 혼자서 수작을 부린 것인지 네 명이서 작당을 한 것인지 모르지만 놈들을 의심하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이었다.
‘일단 천하사괴, 그 네 마리 개새끼들을 조져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