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89화>
189화. 사도련으로(3)
묵번이 재차 물었다.
“정말 련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행차하셨단 말이냐.”
“그것이…….”
척종선이 뜸을 들이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허! 빨리 말을 하지 못할까!”
“다름이 아니오라 련주님께서 열흘 뒤에 계획하신 연설 일정을 오늘로 앞당기셨습니다.”
“뭐라고? 아니 왜?”
“부총관님이 떠나신 후 련주님의 입지가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답답하신 나머지 일정을 앞당기신 겁니다.”
이때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설이라니요?”
그의 물음에 묵번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크흐음! 현재 사도련 내부에서 련주님을 몰아내려는 세력이 존재하네. 정적은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이번에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버렸지.”
“어쩌다가 그리됐다는 말입니까?”
“련주님은 사도련을 훌륭하게 이끄셨어. 많은 사람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지. 하지만 정사대전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어. 무림맹의 공격에 우리의 거점들이 여럿 무너졌거든. 겨우 몇 번의 승리를 거두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는 했지만, 여전히 매우 불리한 상황이야.”
“그런데 그것이 연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묵번이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공손무를 쳐다보았다.
“련주님은 무인인 동시에 정치인. 정치인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의실에 처박혀서 탁상공론을 하다가는 있던 지지자들도 사라지게 되지. 련주께서는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해 몸소 여기까지 행차하신 거야.”
“아아. 그렇군요.”
묵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지. 련주께서 연설을 하신다니 가 봐야겠어.”
“예, 그러시지요.”
객잔에서 빠져나온 공손무는 일행과 함께 련주의 연설 장소로 향했다.
사도련의 련주가 연설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공손무가 선두에 서서 인파를 뚫었고, 나머지 인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앞쪽으로 나오자 연단이 보였다.
묵번이 굳은 표정으로 연단을 바라보았다.
“부디 잘하셔야 할 텐데.”
잠시 후 뒤쪽에서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사도련의 련주?’
좌측에서는 한 중년 사내가 담담한 표정으로 연단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풍성한 회색빛 수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잔잔한 주름.
날카로운 눈매와 담담하게 다물어져 있는 도톰한 입술.
중년 사내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저 사람은 또 누구야? 련주의 부하인가?’
반대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미모.
관능미 넘치는 몸매를 가진 여인이 우아한 걸음으로 연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저분이 왜 여기에!”
무슨 일인지 묵번은 여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공손무가 물었다.
“누구이길래 그리 놀라시는 겁니까?”
“후우. 저 사람은 사도련의 대총관, 염수화라고 한다.”
“대총관이요?”
대총관이면 사도련의 이인자이자 부총관인 묵번의 직속 상관이었다.
“대총관과 련주님이 같은 연단에 오르다니. 척 대주!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도 처음 듣는 일입니다.”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이런 젠장! 필시 대총관의 계략이다. 련주의 연설을 방해하려는 수작이야!”
이때 연단에 오른 중년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반갑소이다! 나를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니 내 소개를 하겠소. 내 이름은 양휘소! 사도련의 련주요!”
“와아아! 련주님 만세!”
그의 말에 한쪽에서 군중들이 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보냈다.
잔잔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양휘소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나는 사도련의 치하 아래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나왔소! 그러니 부디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시오!”
내공이 담겼는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덕분인지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우리는 정사대전을 치르고 있소이다. 치열한 혈전 속에서 사도련은 여러분의 재산과 여러분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몸 바쳐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소.”
이때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의 재산? 너희 윗놈들의 재산이겠지! 이 비열한 위선자!”
한 사람이 그렇게 외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 우리의 식량과 돈을 가져가 놓고서는 어째 제대로 된 결과가 하나도 없는 거야! 그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고!”
“옳소! 이렇게 사도련이 약해지게 된 이유는 지도자의 잘못이 크오!”
양휘소가 답답하다는 듯 양손을 세차게 휘저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한때의 운명에 달린 것이므로 졌다고 낙담할 것도, 이겼다고 교만할 것도 없소이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재차 소리쳤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우리가 분열된다면 그거야말로 적들이 원하는 것. 일심동체로 지혜를 모아 적들을 상대한다면 분명 해법이 열릴 것이오.”
“말만 늘어놓지 말고 대안을 내놓아라!”
“이 위선자!”
양휘소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분노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다 싶었는지 옆쪽에서 묵묵히 있던 염수화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리는 련주를 지지했습니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도자이기에 그가 가는 길을 믿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간드러지면서도 깊은 호소력이 베여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려하던 참담한 상황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무림맹에게 거점을 잃고 있고 이제 본성이 있는 광동 지역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염수화가 손가락으로 양휘소를 가리켰다.
“저는 그동안 수없이 말했습니다.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필요하다면 우리가 먼저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하지만 련주는 어떻게 했습니까? 태평한 소리만 늘어놓으며 평화만 주장했습니다. 전쟁은 악이다. 무고한 백성들을 사지에 빠트릴 수는 없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가 진정으로 백성들을 사지에 빠트리고 있습니까?”
군중들이 그녀의 물음에 소리를 치며 답했다.
“련주! 련주가 우리를 위험에 빠트렸다!”
“우리의 재산과 자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염수화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련주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치밀하게 칼을 갈며 전쟁 준비를 하는 무림맹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허한 평화만 외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적들의 피로 증명해야 합니다!”
“옳소! 그 말이 옳소!”
“대총관 만세!”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는 대총관이다! 와아아!”
더는 들어 줄 수 없었는지 양휘소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여러분! 선동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떻게든 단합하여 이 전쟁을 끝내는 것입니다!”
“선동? 련주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군요. 전쟁을 끝내자면서 정작 무림맹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짓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양휘소가 안광을 번뜩이며 염수화를 노려보았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오!”
“여기에 있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저는 본련이 궁지에 몰렸을 때 계략을 사용하여 무림맹의 보급로를 끊었습니다. 하지만 련주는 무엇을 하였죠? 승기를 잡고 반격을 하기는커녕 평화협정을 시도하였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 저들이 회복할 시간만 벌어 주었지요. 기세를 회복한 적들은 전보다 더 거칠게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그건……!”
“명백한 실정입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상황이 련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묵번이 나섰다.
그가 연단 위로 올라가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자! 오늘 예정되어 있던 연설은 이걸로 끝이오! 모두 해산하기를 바라오! 다시 한번 말하겠소! 모두 해산하시오!”
잠시 후 군중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자 묵번이 몸을 돌렸다.
그의 바로 뒤쪽에는 염수화가 서 있었다.
“부총관.”
묵번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총관, 묵번. 대총관님을 뵙니다.”
그의 인사에도 염수화의 표정은 차가웠다.
“부총관,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련주님과 대총관인 내가 연설을 하고 있는데 도중에 맘대로 끝내 버렸지 않는가.”
“송구하오나 더는 볼 수가 없어서 그리한 것입니다.”
“흥! 나약한 련주의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나 보지?”
“크흐음…….”
“잘 생각하시게. 련주는 썩은 동아줄. 자네도 기회를 잡고 싶다면 새로운 동아줄을 잡아야 할 것이야. 계속 그 동아줄을 잡고 있다가는 같이 추락할 테니까.”
말을 끝낸 염수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그 자리를 떴다.
“크윽!”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묵번은 참혹한 현실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몸을 돌려 양휘소에게 다가갔다.
“콜록! 콜록!”
양휘소가 묵번을 발견하고는 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런, 자네 왔는가?”
“련주님을 뵙습니다.”
“후훗. 오자마자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군.”
묵번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련주님, 괜찮으십니까.”
양휘소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보다시피 별로 좋지 않아. 지지자들은 등을 돌리고 있고 대총관의 위세는 날로 커지고 있지. 너무나도 걱정돼. 중원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건 막아야 할 텐데.”
“련주님!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지요. 사상자가 늘어나더라도 무림맹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지지자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양휘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라는 건가? 자네는 진정 내가 그러기를 원하는 거야?”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저들이 원하는 것이야. 자네도 잘 알 텐데.”
“예, 잘 알지요. 흑사교의 노림수라는 걸 잘 알지요. 하지만 지금 련주님께서 사라지시면 흑사교에 맞설 자도 사라지는 겁니다. 길게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사교의 이야기가 나오자, 양휘소가 입을 꾹 다문 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가 묘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없긴 왜 없어. 나야 어차피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이런 때를 대비해 자네를 내 곁에 둔 것 아니겠나.”
“련주님!”
“후훗. 알겠네. 비관적인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그보다도…….”
양휘소의 시선이 공손무에게 향했다.
“처음 보는데, 자네의 손님인가?”
“아, 여기는 일전에 알려 드린 화산검마의 제자입니다.”
“뭐? 화산검마의 제자?”
화산검마의 제자란 말에 양휘소의 얼굴에 이채가 띠었다.
공손무는 그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인, 화산검마의 제자 공손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