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82화>
182화. 뱀들의 회합(1)
공손무가 의복과 가면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것들은 잘 쓰도록 하지.”
“조심해라. 회합 장소는 괴물들로 득실한 곳이니까.”
방을 나서려던 공손무가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흥. 걱정하지 마. 나 또한 그들 못지않은 괴물이야.”
대화를 끝낸 그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는 묵번의 모습이 보였다.
“부총관님.”
“아!”
공손무를 발견한 묵번이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대화는 잘 끝난 것이냐?”
“일단 여기를 어서 벗어나시지요.”
“벗어나다니?”
“자초지종은 여기서 나간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손무가 장원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자, 묵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장원 밖으로 나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한 묵번이 공손무에게 재차 물었다.
“이제는 말해 다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이리 서두르는 것이야?”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공손무가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천기자는 흑사교의 교도입니다.”
공손무의 말에 묵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누가 흑사교의 교도라고?”
“천기자가 흑사교의 교도라고 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현명함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모든 것이 흑사교가 뒤에서 꾸민 일이었어요.”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하다고? 정말 확실한 것이냐?”
“확실합니다. 본인을 심문해서 들은 것이니까요.”
“뭐? 심문?”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는지 묵번이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래서 그렇게 서두른 것이었구나. 천기자를 심문하다니. 어찌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 수 있어!”
“상대는 흑사교였습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두통이 밀려오는지 묵번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소리쳤다.
“그래도 심문이라니! 이제 내 입장은 뭐가 된다는 말이냐!”
“안심하십시오. 부총관님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겁니다.”
“어째서? 무얼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공손무가 천기자에게서 받은 의복과 가면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게 도대체 뭐길래?”
“천기자가 준 것입니다. 내일 밤 이곳 성도에서 흑사교의 비밀 회합이 열릴 거라는군요.”
“그게 정말이야?”
“예.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천기자는 저보고 그곳에 잠입해 흑사교의 교도들을 일망타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천기자는 흑사교를 배신할 겁니다. 자신의 진짜 정체를 세상에 알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흑사교가 있음을 천명할 것이라고 저와 약속했습니다.”
묵번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내일 약속 시각이 되면 놈들의 의복을 입고 회합에 침투해 흑사교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습니다.”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하는 묵번을 뒤로한 채 공손무는 천기자에게 받은 의복과 가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의복은 칠흑같이 짙은 검정이라는 것 빼고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반면에 가면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상단에는 아수라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세 개의 눈이 그려져 있었고, 이마 부분에는 두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거북함이 느껴지는 가면이었다.
‘이걸 쓴 채 내일 놈들의 비밀 회합에 잠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놈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야.’
가면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 * *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고 마침내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공손무는 검은 망토를 두른 채 객잔의 방에서 밤이 깊어져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익!
이윽고 경첩이 비명을 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묵번이 굳은 표정을 한 채 나타났다.
“시간이 다 되었다.”
잠시 묵묵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공손무가 이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가면을 집어 들었다.
“가시죠.”
말을 끝낸 그가 가면을 쓰고 망토에 달린 모자를 눌러썼다.
준비를 마친 공손무가 묵번과 함께 말을 타고 회합 장소로 출발하였다.
반 시진 후, 그들은 성도 외곽에 있는 한 버려진 사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놈들의 비밀 회합 장소인가?’
공손무가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희뿌연 안개가 잔뜩 끼어 있어 당장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공손무가 이내 고개를 돌려 묵번에게 말했다.
“부총관님은 이 근처에 숨어 계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알았다. 부디 조심하거라.”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갈길을 밟으며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짐짓 여유로운 걸음걸이었지만, 실제로는 촉각을 곤두세운 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부로 들어서자 반쯤 부서진 전각들과 그 잔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곳이구나. 골라도 어떻게 이런 곳을 골랐는지…….’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욱 음침하고 괴기스러운 기운이 풍겨 오자 공손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방이 뿌연 안개로 덮여 있는 게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쯤이면 되려나?’
잠시 후 법전으로 보이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 보이자 공손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엘파고. 나와라.”
[ 예. 공손무 님. 부르셨습니까? ]
“인큐리를 열어.”
[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
엘파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공손무의 눈앞에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에는 흑사교의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완전히 빈칸이었던 조직도에는 그동안 찾아낸 교도들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뱀의 이빨에는 쌍아의 모습과 특징이 적혀 있었고, 뱀의 비늘에는 곽영의 정보가, 그리고 뱀의 혓바닥에는 천기자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조직도를 바라보던 공손무가 눈빛을 반짝이며 생각했다.
‘오늘 드디어 이 조직도가 다 채워지는 건가?’
그의 반짝이는 시선이 조직도의 최상부로 향했다.
‘교주, 반드시 네놈을 잡고야 말겠다.’
마음을 다잡은 후 그가 엘파고에게 말을 걸었다.
“엘파고.”
[ 예. 공손무님. ]
“지금부터 우리는 교도들도 가득한 곳으로 가게 될 거야. 거기서 보고 듣게 되는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인큐리에 기록해야 해. 내 말 알아들었지?”
[ 예. 명령을 성실히 이행하겠습니다. ]
그런데 이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공손무가 재빨리 홀로그램 화면을 닫고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한 놈이 아니야. 사방에서 포위한 채 다가오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주변의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흑립을 쓰고 복면을 한 자들이 그림자 속에서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왔다.
그들 중 유일하게 검은 망토를 두른 자가 앞으로 나오더니 그대로 공손무에게 다가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암어.”
“어둠의 포용 속에 모두가 하나가 되리.”
암어를 들은 복면 사내가 그제야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손으로 전각의 입구를 가리켰다.
“잘 오셨습니다. 다른 형제분들은 모두 도착하셨으니 서둘러 안으로 입장하시지요.”
문지기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 공손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법전으로 들어갔다.
‘응?’
법당에 들어서자 무얼 보았는지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제단이었다.
제단 위에는 수 개의 촛불이 켜진 채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공손무의 시선을 끈 것은 제단이 아닌 제단 앞바닥에 뚫린 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구멍이었다.
‘저기가 승려들이 면벽 수련을 했다는 그 공동으로 이어지는 통로인가?’
그가 조심스럽게 구멍의 앞으로 걸어갔다.
구멍을 내려다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놈들의 고약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아래에 놈들이 모여 있는 게 분명해.’
공손무가 주먹을 움켜쥐며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횃불로 비추어진 통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마침내 지하 공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있다! 놈들이 보인다!’
자신과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이자 마음속에서 흥분감이 피어올랐다.
‘내 저것들을 당장!’
목표물을 본 그가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였다.
스으윽.
그런데 이때 달려가려는 그의 앞을 막는 이가 있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형제님?”
공손무와 똑같은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있었지만, 간드러진 목소리로 보아 여인인 듯했다.
“아아…….”
당황한 공손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여인이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우후훗. 밤은 길고 어둠은 깊답니다. 회합이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찬찬히 둘러보시면서 다른 형제자매 분들과 어울려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으음. 그래야겠군요. 제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그런 실수를 하지요. 찬란한 불꽃에 이끌린 불나방처럼 어둠의 경이로움에 홀려 무작정 뛰어들지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걸 기억하세요. 검은 뱀의 가르침 아래에 있는 한 우리는 어둠을 숭배하고 지배하지,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인의 의미심장한 말에 공손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후훗. 보아하니 처음 오신 것 같은데, 제 추측이 맞나요?”
부정해 봤자 의심만 살 것 것 같았기에 공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처음 참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는지 여인이 두 손을 맞잡으며 소리쳤다.
“그렇군요! 최근에 교주님의 은혜를 입으신 분이셨군요. 위대한 검은 뱀의 가르침 아래 들어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도 참석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가면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동 안쪽을 향해 손짓하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셔서 다른 형제자매 분들과 인사를 나눠 보시지요.”
“예. 그래야죠.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응? 그게 뭔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공손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교주님도 이 회합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우후훗. 위대한 검은 뱀을 만나 뵙고 싶은 형제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주님은 회합에 참석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보좌하는 최측근 몇 분도 참석하지 않지요.”
“아아. 그렇군요.”
교주가 없다는 말에 공손무는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그가 느끼는 실망감이 어떤 종류의 실망감인지도 모른 채 가면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쿡쿡! 너무 그렇게 실망하시지 마세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분을 영접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각자 맡은 바 일을 충실히 수행하자고요. 아셨죠?”
“물론이죠.”
“자, 그럼 어서 가 보세요.”
“예, 고맙습니다.”
저벅저벅.
공동 중앙으로 향하는 공손무의 걸음은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
‘교주와 최측근이 없다니. 김이 새는 걸?’
그는 흑사교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겠다는 각오로 오늘 이곳에 왔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교주와 최측근이 없다고 한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공손무는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지금부터 바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시작할지, 아니면 다른 교도들에게 접근해 교주에 대한 정보를 캐낼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