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8화 (178/200)

<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8화>

178화. 천기자(2)

말을 끝낸 묵번이 공손무를 지나쳤다.

“크윽!”

천기자를 만날 기회가 사라져 가는데도 공손무는 그를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타아악!

그런데 이때 무슨 일인지 계단을 내려가려던 묵번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하지만 말이야.”

묵번의 목소리에 공손무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널 천기자 앞에 데려갈 수 있다.”

“부탁이라면?”

묵번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답했다.

“흑사교에 대한 정보를 넘겨라. 그러면 천기자를 만나게 해 주겠다.”

묵번의 입에서 흑사교라는 말이 나오자 공손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지금 흑사교에 대한 정보를 넘기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넘겨야 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공손무는 이내 안 되겠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흑사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정보를 넘겨줄 수 없다면 그걸로 끝이다. 너에게 그런 것까지 말할 이유는 없다.”

묵번이 몸을 돌려 계단을 밟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끼이잉!

갑자기 짙은 살기가 몰려와 묵번의 오감을 자극했다.

‘이건?’

그의 눈동자에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수십 가닥의 거미줄이 보였다.

거미줄들은 정자의 입구를 완벽하게 막고 있었다.

‘화산검마의 매화혈사(梅花血絲)인가!’

거미줄의 정체를 알아챈 묵번이 부리부리한 안광을 번뜩이며 뒤로 돌아섰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답을 말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합니다.”

“뭐라!”

“처음부터 목적은 이거였군요. 화산검마님에게서 흑사교에 관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저를 여기에 부른 것이었습니다.”

공손무의 기세가 실로 날카로웠지만 묵번은 굴하지 않았다.

“흥! 가는 게 있으면 마땅히 오는 게 있어야겠지. 천살성을 데리고 다니는 나에게 흑사교에 대한 정보 정도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정도 배포도 없으면서 무슨 협상을 하겠다고!”

“흑사교는 중원의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조직. 그들을 알고 또 그들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그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뜻.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 인내심은 그리 길지 못하거든요.”

공손무는 묵번이 흑사교의 첩자인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어딜 감히!”

묵번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손무의 매화혈사가 훨씬 더 빨랐다.

‘매화혈사(梅花血絲) 죽음의 둥지’

끼리릭!

기이한 소리와 함께 허리로 향하던 묵번의 손길이 멈추어 섰다.

“이건?”

묵번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거미줄들이 보였다.

거미줄들은 바닥과 천장에 달라붙은 채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윽고 공손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디 한번 움직여 보시죠.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가는 온몸이 수십 조각으로 찢겨 죽을 겁니다.”

공손무를 노려보던 묵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날 죽이겠다고? 참으로 우습구나. 내 몸에 털끝 하나 건드는 순간 너는 사파의 공적이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서 매화혈사를 거두어라. 그럼 말해 주마. 내가 왜 흑사교에 대한 정보를 원했는지 말이다.”

“도망치려는 수작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설령 매화혈사를 없앤다고 해도 언제든지 다시 잡을 수 있으니까요.”

“알고 있다. 그러니 어서 이것을 풀어라.”

“흐음…….”

의심의 눈초리로 묵번을 노려보던 공손무는 이내 손가락을 튕겨 거미줄을 끊었다.

매화혈사가 사라지자 그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흑사교에 대한 정보가 왜 필요한 겁니까?”

“쯧쯧. 막무가내인 그 성격, 화산검마님을 똑 닮았군. 누가 그분의 제자 아니랄까 봐.”

“이상한 소리 말고 어서 제 질문에나 답해 주시지요.”

잠시 머뭇거리던 묵번이 이내 한숨을 쉬며 쓰고 있던 망토의 모자를 벗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내 정체를 밝히는 수밖에.”

모자를 벗자 달빛이 묵번의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의 외모는 전체적으로 날카로웠는데, 특히 눈이 뱀처럼 반짝였다.

회백색의 잘 다듬어진 수염을 가졌고, 콧잔등에는 일(一)자 모양의 기다란 흉터가 있었다.

공손무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묵번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군지 말해 주지. 내 이름은 묵번, 사도련의 부총관이다.”

사도련의 부총관이라는 말에 공손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사도련의 부총관?”

“그래. 그러니 나를 위협할 생각은 더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상대가 사도련의 부총관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공손무가 입을 꾹 다문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기세가 수그러들자 묵번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흑사교의 정보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지? 까짓것 말해 주마. 이유는 간단하다. 나 또한 너와 화산검마님처럼 흑사교를 쫓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고? 당연히 사도련을 지키기 위해서지. 놈들이 사도련에게 마수를 뻗기 전에 먼저 찾으려는 것이다.”

“흑사교가 사도련을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 녀석들은 중원 전체에 퍼져 있어. 사도련 또한 그들의 표적에서 예외는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한, 그놈들이 사도련을 집어삼킬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사도련을 지킬 테니까 말이야.”

“흐음…….”

묵번의 말에서 굳은 결의를 느낀 공손무는 일단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믿도록 하지요. 하지만…….”

“으음?”

“말씀해 주신 제안은 저 혼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화산검마님에게 전서구를 띄운 뒤 허락이 떨어진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그분의 답변이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겠다.”

그로부터 약 열흘이 지나고, 마침내 화산검마에게서 답변이 왔다.

연통을 받은 묵번이 다시 상천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공손무가 먼저 약속 장소에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분의 답변은 왔나?”

“그렇습니다.”

“뭐라고 하시나? 나에게 정보를 줄 수 있다고 하시는가?”

“예. 지금까지 수집해 온 정보를 전달해 줄 테니 저에게 협조해 달라고 하시는군요. 여기 그에 관한 내용이 적힌 서찰이고 그리고 이건 화산검마님의 인장이 찍힌 확약서입니다.”

서찰을 넘겨받은 묵번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크흐음…….”

침음을 흘리며 서찰의 내용을 찬찬히 읽던 그가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여 보였다.

“좋아. 이 정도의 확약서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럼?”

그가 고개를 들어 공손무를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훗. 천기자를 만나게 해 주겠다. 나를 따라오거라.”

“감사합니다.”

묵번이 말에 올라타 앞으로 달려 나가자 공손무 또한 재빨리 말에 올라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화려한 장원 앞이었다.

장원의 규모는 고관대작의 저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컸고, 주변을 지키고 있는 호위 무사도 많았다.

위압감이 넘치는 장원 앞에서 공손무는 자세가 굳고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멍한 시선으로 장원을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저기가 바로……?”

묵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기자가 있는 곳이다. 대단한 규모의 장원이지?”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장원이 아니라 작은 성처럼 보입니다만.”

“클클! 과연 그렇구나. 성안에 또 다른 작은 성이 있는 것이야. 이것만 봐도 천기자가 무림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 수 있겠지. 그러니 그의 앞에서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야.”

“천기자는 정확히 어떤 사람입니까?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이길래 이토록 막대한 재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겁니까?”

“흐음…….”

회백색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묵번이 이내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천기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사람이다.”

“고민을 상담한다고요?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일개 개인에게 고민을 상담한다는 말입니까?”

“단순히 돈과 권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지. 오직 하늘만 아는 한 해의 흉작 여부나 집안의 재산분배와 같은 예민한 문제 말이다.”

“그런 것을 천기자가 해결해 준다는 겁니까?”

“물론이다. 그의 답은 언뜻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우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지.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통찰력과 언변술에는 능통한 사람이야.”

묵번의 말에도 공손무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을 답해 주는 대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천기자의 말 한마디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의 말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지. 한마디로 정리하면 세력가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거나 누군가를 끌어내리기 위해 거금을 주고 천기자의 말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천기자가 도대체 무어길래?”

“천기자는 지금까지 무림의 굵직한 사건들을 예언하면서 명성을 쌓았지. 수많은 무림인이 그를 대현자라고 칭하며 숭배한다. 즉,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중원의 판도가 달라진단 말이다.”

“그럴 수가!”

묵번이 공손무에게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해라. 천기자는 겉보기에 점잖아 보이나 세간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라고도 불린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야. 따라서 그에게 천살성이라는 것을 절대 들키면 안 된다. 화산검마의 제자라면 혈인심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먼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가 눈치챌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걱정되었지만, 묵번은 흑사교에 대한 정보를 위해서 공손무를 천기자에게 데려다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천기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공손무를 놔둔 채 묵번이 먼저 장원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서 있던 문지기들은 묵번이 내민 신분패를 보자 고개를 숙이며 길을 텄다.

잠시 후 장원 안으로 사라졌었던 묵번이 입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손짓으로 공손무를 불렀다.

공손무가 다가가자 묵번이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희소식이다. 천기자가 너를 만나는 것을 승낙했다.”

그의 말을 들은 공손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공손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묵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보아하니 천기자는 네 말처럼 수년 전 화산파에서 일어난 변고에 관심이 있었다. 아마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물을 것이야. 적당히 대답해 주되 절대 네가 천살성이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너는 화산파에서 파문당한 일개 무사여야 해.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나를 따라와라.”

공손무가 묵번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정원이었다.

정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가자 크고 작은 전각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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