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5화 (175/200)

<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5화>

175화. 뱀의 비늘(1)

은신술을 사용한 공손무가 높은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주변의 환경에 완벽하게 녹아드는 은신술 덕분에 그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담을 넘어 향백관 안으로 들어온 공손무가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평화로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특히 약하지만 선명히 느껴지는 냄새.

“킁킁. 이거 피 냄새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반드시 놈을 찾아야 해. 일단 저쪽 건물부터 뒤져 봐야겠어.”

그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옅은 피 냄새가 풍겨 오는 건물로 향했다.

겉으로는 허름한 창고처럼 보였지만 무얼 보관하는지 다른 곳보다 지키고 있는 무사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대체 뭘 보관하고 있길래 감시가 이리 삼엄한 거지?’

안쪽을 살펴보기 위해 공손무는 구석에 있는 감시병들부터 처치하기로 했다.

‘죽음의 올가미.’

그가 매화혈사(梅花血絲)로 여러 개의 올가미를 만들어 경비병들에게 던졌다.

“커어억!”

올가미에 목이 걸린 무사들이 캑캑대더니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기절한 감시병들을 한쪽에 숨긴 뒤 그는 창고의 입구 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이 쓸모없는 것들이!”

창고의 입구에는 험악하게 생긴 한 거한이 손에 든 채찍으로 여인을 때리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으아아악!”

여인은 손과 발이 결박되어 있어 그대로 맞고만 있어야 했다.

“감히 도망을 치려고 해? 귀중한 상품이라고 봐줬더니 이게 어디서 자꾸 까불어!”

거한의 말에 엿듣고 있던 공손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상품? 지금 상품이라고 했나?’

사람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업종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노예매매다. 그 녀석, 겉으로는 예술품을 거래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노예를 거래하고 있었어. 그럼 설마 이 커다란 창고에 있는 게 전부 다 노예란 말인가?’

공손무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여인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향백관의 주인이 도망칠 우려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그놈을 잡은 뒤 반드시 풀어 주겠소.’

노예 창고를 뒤로한 채 공손무는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깔끔해 보이는 전각으로 이동했다.

‘다른 전각들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주인이 머물 만한 곳이야.’

올가미로 외벽을 지키고 있는 무사 두 명을 처치한 공손무는 나무로 만든 창살을 부수고서 창문을 통해 전각 안으로 침입했다.

전각 내부는 어둑했고, 사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공손무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인기척이 있다. 이 안쪽에 사람이 있어.’

기다란 복도를 지나자 커다란 격자무늬 문이 나타났다.

희미한 불꽃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안쪽에 누군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안쪽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서는 중년 사내가 촛불에 의지한 채 붓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찾았다!’

그는 다름 아닌 보광사에서 공손무에게 암살의뢰를 한 자였다.

목표물을 찾은 공손무가 창호지를 조금 더 크게 뚫어 지풍을 날렸다.

휘오오오!

그러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이 얕은 바람과 함께 꺼져 버렸고 방 안은 일순간 어둠으로 뒤덮였다.

동시에 붓을 놀리던 중년 사내의 손도 멈추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중년 사내가 이내 다시 촛불을 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탁자 밑에 놓아두었던 검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쯤 하고 앉으시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중년 사내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커졌다.

“아니 자네는……?”

중년 사내의 눈동자에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는 공손무의 모습이 비쳤다.

“도대체 언제, 아니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건가?”

“훗. 나를 여기로 초대한 건 너일 텐데?”

공손무가 팔짱을 풀고는 탁자 앞으로 오더니 중년 사내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섰다.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던 중 중년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대하긴 했었지. 하지만 거기엔 엄연히 조건이 붙어 있지 않았나. 무림맹 청룡대 대장 현천빙검(玄天氷劍)의 목을 가져오라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알아본 봐, 그는 여전히 무한에서 청룡대를 이끌고 있네. 내 말이 틀렸나?”

“그 말이 맞아. 나는 의뢰를 수행하지 못했지.”

“의뢰에 실패한 자는 말없이 사라지는 법. 그게 내가 알고 있는 그쪽 세계의 규율일 텐데. 그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를 온 건가?”

“평소 같았으면 그냥 사라졌겠지. 하지만 재미난 사실을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어.”

“재미난 사실?”

중년 사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공손무가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정체를 밝혀라. 단 하나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이리 막무가내라니. 자네가 아무리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답을 하지 못하겠나 보군. 좋아. 그럼 내가 대신 답해 주지. 네 이름은 곽영. 마흔일곱 살에 겉으로는 예술품을 거래하지만 실제로는 노예를 거래하는 노예상. 내 말이 틀렸나?”

공손무를 빤히 쳐다보던 중년 사내가 이내 히죽이며 말했다.

“히힛! 내 뒷조사를 했나 보군. 더 아는 거 있나?”

“알고 있지. 이 모든 것이 다 네가 계획한 판이라는 것을 말이야.”

“내가 모든 것을 계획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공손무가 안광을 번뜩이며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살막에 황금의수 의뢰를 넣은 사람, 그게 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뿐인가? 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친절하게도 황정을 만나게 해 주었지. 내 말이 틀렸나?”

곽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계속해 보시게.”

“너는 나를 만나기 위해 광소에게 잡힌 척을 했고 나에게 구해진 뒤 현천빙검(玄天氷劍) 공손경승을 암살하라고 했다. 황정에게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린 내가 그를 죽일 거로 생각한 거겠지.”

짝! 짝! 짝!

공손무의 이야기를 듣던 곽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으허헛!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참으로 수고했어.”

“네 녀석의 얄팍한 계책에 내가 당할 것 같으냐. 왜 이런 짓을 벌였지? 네 녀석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하지만 곽영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얄팍한 계책이라고 했나? 틀렸어. 이건 완벽한 계획이었네. 다만…… 내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가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이며 공손무를 노려보았다.

“네가 나약한 심성을 가진 놈이라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그것 때문에 내 완벽한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달라진 분위기와 말투에 공손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구나. 눈앞에 자신을 죽이려 한 자가 있는데 그걸 그냥 살려 둬? 핏줄 때문도 아닌 사사로운 정 때문에?”

놀라게도 곽영은 공손무와 공손경승 사이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

공손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구나.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내 정체는 이미 노예상이라고 네가 말하지 않았냐.”

공손무가 곽영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노예상 따위가 나와 공손경승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 리가 없다! 어서 말해! 넌 누구야!”

“히힛. 노예상 따위? 보아하니 아직 나에 대해 완전히 알아내지는 못한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일 년에 거래하는 노예의 숫자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수십? 수백? 아니야, 수천이다. 마음만 먹으면 노예들을 이용해 군대를 꾸릴 수도 있어.”

“네 녀석의 자기 자랑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네 녀석의 진짜 정체가 뭔지 물었다.”

곽영이 혓바닥을 할짝대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히힛!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지?”

그의 말에 공손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네 녀석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 그게 바로 정답이다.”

“흑사교!”

“맞아. 나는 흑사교의 교도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구나. 화산검마의 이름을 이은 천살성의 사내여.”

“나에게 공손경승을 죽이라고 한 이유가 뭐지? 네 상관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나?”

곽영이 답하지 않자 공손무가 검으로 그의 손등을 내리찍었다.

“크아악!”

“답하지 않으면 이다음은 네 목이 날아갈 것이다.”

“죽이고 싶으면 어서 죽여라. 이런 협박으로 내 입을 열 순 없으니.”

곽영이 강경하게 나오자 공손무가 혀를 차며 그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커어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곽영이 땅에 쓰러졌다.

공손무가 쓰러진 그를 커다란 자루에 담아 전각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위를 살핀 뒤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자루를 든 채 담을 넘었다.

가져온 말 뒤편에 자루를 싣고는 곧장 용종찬의 은신처로 향했다.

잠시 후 은신처에 도착한 공손무가 곽영이 든 자루를 든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공손무의 모습을 본 용종찬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왔느냐.”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용종찬의 시선이 커다란 자루로 향했다.

“그 녀석이냐?”

“예. 할아버지의 예상대로 이 녀석은 흑사교의 교도였습니다.”

“드디어 놈들이 우리의 미끼를 물었군. 녀석에게서 알아낸 정보는?”

“겁박해 보았지만, 자신이 흑사교 소속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 주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일단 기절시켜 데려왔습니다.”

“잘했다. 뒷일은 내게 맡겨라.”

“이 녀석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공손무의 물음에 용종찬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또 이런 분야에는 전문가 아니더냐. 마침 오늘 자백제와 고신 도구가 새로 들어왔다. 성능을 시험해 볼 겸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도중에 죽으면 안 되니까 살살해 주십시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나가보아라.”

공손무가 곽영을 땅바닥에 놔둔 채 동굴 밖으로 향했다.

동굴을 빠져나올 때쯤 안쪽에서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용종찬이 양손에 피를 묻힌 채 동굴 밖으로 나왔다.

“다 끝났습니까?”

“그래. 예상보다 훨씬 끈질긴 놈이었지만, 놈의 입을 여는 데 성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영악한 놈이야. 뱀처럼 교활한 머리와 혓바닥을 가졌어. 저런 놈과는 오래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좋다. 잘못하면 우리가 말려들어 갈 수도 있어.”

“서둘러야겠군요.”

“그래. 어서 들어와라.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놈이 입을 열지 알 수 없으니까.”

용종찬을 따라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 공손무는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곽영을 발견하였다.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손톱과 발톱은 모두 뽑힌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라.”

말을 걸었지만, 곽영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그사이를 못 참고 또 기절한 것인가.”

용종찬이 혀를 차더니, 물 한 바가지를 떠 그것을 곽영의 얼굴에다 끼얹었다.

“커어억!”

찬물 세례를 맞고서야 곽영이 숨을 헐떡대며 고개를 들었다.

“이놈들, 어서 날 그냥 죽여라.”

“아직은 안 돼. 알아내야 할 게 많거든. 자,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할 것이다. 성실하게 답하지 않는다면 또 고신을 가할 것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야.”

“킬킬킬. 그놈의 질문, 그래! 어디 마음껏 해 봐라!”

“가장 먼저 네놈의 정체를 말해라. 네 입으로 솔직히 말해!”

“크클. 내 이름은 곽영. 흑사교의 평교도이며 뱀의 비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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