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4화>
174화. 용서냐 복수냐(3)
“아직은 형님입니다. 그러니 싸울 수 없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럼 그냥 그 자리에서 무력하게 죽어라.”
공손경승이 검을 세우자, 갈등하던 공손무는 결국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크큭!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긴 것이냐?”
“후회하지 마십시오. 저는 19년 전의 그 나약했던 꼬마가 아닙니다.”
“그리 보이는구나. 하지만 나 또한 19년 전의 내가 아니다. 더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거야. 날 방해하는 놈은 그 누구라도 살아남지 못해.”
공손경승이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내공을 운용했다.
한 발짝씩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땅이 얼어붙었고 숨을 쉴 때마다 지독한 냉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치잇!”
공손무가 혀를 차며 뒤를 흘끔 바라보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넌 내 검으로 죽인다. 다른 놈들의 손은 빌리지 않아.”
“그 약속, 꼭 지키길 바랍니다.”
파아앗!
말을 끝낸 공손무가 곧바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고는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공손경승의 뒤에서 번쩍하고 나타났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쓸 수 있다는 이형환위(移形換位)였다.
‘끝이다.’
공손무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쩌어어엉!
‘아니?’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던 공손무의 검이 차가운 냉기를 품은 검에 막혀 버렸다.
‘이형환위를 간파했어?’
공손무의 검을 막아 낸 공손경승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형환위라. 어느 정도 실력은 갖췄다고 생각했지만, 이거 정말 의외군. 설마하니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을 줄이야.”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언제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겁니까?”
“적어도 너보다는 더 빨리 올랐겠지.”
공손경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공을 두 다리 쪽으로 내려보냈다.
‘빙선보(氷仙步).’
그러자 그의 신형이 수십 개의 잔상으로 쪼개지며 지면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그 모습이 꽁꽁 언 빙판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이건?”
처음 보는 보법에 잠시 주춤했지만 공손무는 어렵지 않게 실체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몸을 날려 검을 휘두르자 과연 그곳에 잔상이 아닌 진짜 공손경승이 있었다.
“어림없다!”
하지만 예상이라도 한 듯 공손경승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능숙하게 대항하였다.
‘빙검(氷劍) 백설기(白雪氣).’
날카로운 매화 꽃잎을 품은 자홍빛의 소용돌이와 차디찬 냉기를 머금은 하얀 소용돌이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강력한 충돌에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사방의 지형지물이 갈라지고 얼어붙었다.
“으음?”
허공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을 본 공손경승의 눈빛이 반짝였다.
“화산파의 검법? 네 녀석…… 어떻게 화산파의 검법을 알고 있는 거지?”
“지금 그런 걸 묻고 있을 상황이 아닐 텐데요.”
“말할 수 없나? 뭐, 생각해 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군.”
공손경승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내 부모와 내 인생을 도둑질한 놈이다. 그런 네놈이 화산파 검법 하나 훔치지 못하겠느냐?”
“그 입 닥치시오!”
분노에 찬 공손무가 한쪽 손바닥을 앞으로 세차게 뻗었다.
‘귀화살천장(鬼花殺天掌).’
이를 본 공손경승은 장력을 상쇄시키기 위해 자신 또한 손바닥을 뻗었다.
쩌어어억!
장력을 품은 손바닥끼리 충돌하자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으으!”
치열한 힘겨루기가 이어졌지만, 이내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놈이!”
밀리는 쪽은 다름 아닌 공손경승이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장력에 뒤쪽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막아 보려 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무리였다.
“크아악!”
압도적인 장력을 견디지 못한 공손경승이 비명을 지르며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사용한 호신강기 덕분에 내상은 면했지만, 빈틈이 노출되었다.
이 기회를 공손무가 놓칠 리가 없었다.
‘지금이다!’
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 공손경승을 향해 달려 나갔다.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공손경승은 포기하지 않았다.
“네놈 따위가 감히 청룡대의 대장인 나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빙검(氷劍) 빙천연검(氷天蓮劍).’
검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자 지독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지면이 빠르게 얼어붙더니 그 위에 연꽃 모양의 얼음덩어리들이 생겼다.
가시가 달린 얼음 연꽃들이 우후죽순처럼 피어나 공손무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예리한 칼날을 가진 검만큼 날카로운 얼음 연꽃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광풍홍련참(狂風紅聯斬).’
얼음 연꽃들을 향해 달려가던 공손무가 매화질풍검을 휘둘렀다.
매화질풍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자, 거센 돌풍이 휘몰아쳤다.
자홍빛의 날카로운 강기를 품은 회오리가 얼음 연꽃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콰지지직!
회오리와 충돌한 얼음 연꽃들이 굉음을 내며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강철보다도 단단한 얼음 연꽃들이 간단히 부서지자 공손경승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뿌연 냉기 속에서 공손무가 안광을 번뜩이며 나타났다.
“끝입니다, 형님.”
“닥쳐라! 너 따위에게 질 수 없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놈에게만큼은 질 수 없다고!”
공손경승이 다음 초식을 전개하려고 내공을 끌어 올렸지만, 공손무의 금나수가 더 빨랐다.
“네, 네놈이! 허업!”
공손무가 검을 빼앗긴 공손경승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형님이 졌습니다.”
“크클. 그래, 내가 졌구나. 뭐 하느냐? 어서 죽이지 않고?”
“그 입 다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두 살배기인 너를 낭떠러지에 던져 버렸다. 너의 원수지. 자! 어서 죽여라! 네 원수를 어서 죽이란 말이다!”
“입 다물라고 했잖아!”
분노에 사무친 고함과 함께 검이 세차게 휘둘러졌다.
죽음이 다가오자 공손경승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그가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아니?”
놀랍게도 공손무의 검은 공손경승의 목을 베는 대신 지면에 박혀 있었다.
지면에 박힌 검을 빤히 쳐다보던 공손경승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냐?”
“죽였습니다.”
“뭐라고?”
공손무가 검을 뽑으며 차갑게 덧붙였다.
“이제 당신은 내 형이 아닙니다. 청룡대의 대장인 현천빙검(玄天氷劍) 공손경승일 뿐입니다.”
그러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더는 내 길을 막지 마십시오.”
말을 끝낸 그가 반대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공손무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공손경승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 어머니를 찾아가라!”
공손무가 걸음을 멈추더니 뒤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내 어머니를 만나 보라고 했다. 그분에게서 네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다.”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됐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해.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하지만…….”
공손경승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천기자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천기자……?”
공손무가 그에 관해 물으려는 찰나 뒤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은 다름 아닌 청룡대의 대원들이었다.
그들이 병장기를 든 채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공손무 앞에 나타났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청룡대 무사들과는 달리 공손경승은 별일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무슨 일이냐?”
“싸우는 소리를 듣고서 달려왔습니다! 네 이놈! 감히 대장님을 해하려고 했겠다!”
공손무가 입을 열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자, 장양석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놈은 필시 사도련의 사주를 받고 온 암살자다! 저놈을 당장 잡아라!”
“존명!”
청룡대의 무사들이 검을 세운 채 공손무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모두 멈춰라!”
그런데 이때 뒤쪽에 있던 공손경승이 앞으로 나오며 무사들을 제지했다.
“대장님?”
“모두 뒤로 물러나라. 청룡대 대장의 명령이다.”
“하지만!”
“어허! 내 명령을 듣지 않을 셈이냐!”
공손경승의 일갈에 장양석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놈에게 길을 터 줘.”
“예, 알겠습니다.”
무사들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공손무는 양쪽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무사들을 통과했다.
그가 사라지자 장양석이 공손경승에게 달려와 말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찌 저놈을 그냥 살려 보내시는 겁니까? 대장님을 암살하려 한 놈입니다.”
“암살을 하려 한 게 아니다. 내가 놈을 죽이려고 한 것이야.”
“예? 어째서 그런…….”
말을 잇지 못하는 장양석을 뒤로한 채 공손경승은 한참 동안 공손무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였다.
* * *
한편 무림맹의 영채에서 빠져나온 공손무는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근처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호숫가로 걸어간 그는 엎드려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푸하아!”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조금 누그러졌다.
“후욱! 후욱!”
거친 호흡을 내쉬던 공손무는 호숫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치잇! 병신 머저리 같은 놈. 대체 뭘 기대한 건데?”
비록 자신을 버렸지만, 그는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에 들떠 있었다.
참으로 미웠지만, 가족이기에 용서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가족도 뭣도 아닌 분노 그 자체.
지금까지 이루어 왔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자 깊은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것은 출생의 비밀이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체 누구란 거야? 어디에 있는데? 왜 날 버린 거냐고!”
공손무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후우…….”
잠시 후 억지로 마음을 추스른 공손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이럴 시간 없어. 어서 내 친부모를 찾아야 해. 어떻게든 찾아서 물어볼 거야.”
굳게 마음을 먹은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구구-! 구구-!
그런데 그 순간 허공에서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무슨 일인지 공손무가 벌떡 일어나 팔을 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와 그의 팔에 착지했다.
“할아버지의 전서구?”
비둘기는 다름 아닌 용종찬이 보낸 전서구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신 건가?”
비둘기의 다리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떼어 낸 공손무가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가 비추어졌다.
“으음?”
그런데 무슨 내용인지 글씨를 읽어 가는 공손무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런 거였나?”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그가 삼매진화로 종이를 태웠다.
그러고는 품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 글을 적어 그것을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았다.
“자! 가거라!”
공손무가 팔을 휘젓자 전서구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전서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곧 그 더러운 목숨을 끊어 주마.”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공손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무한을 떠난 공손무는 닷새 후 의창에 도착하였다.
의창에 도착한 그는 용종찬을 만나는 대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기가 바로 향백관이구나.”
공손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향백관으로 일전에 보광사에서 만났던 중년 사내가 알려 준 곳이다.
보광사의 중년 사내는 공손무에게 현천빙검(玄天氷劍) 공손경승을 암살해 달라는 의뢰를 청했다.
원래라면 암살에 실패했으니 그를 만나러 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상황이 달라 보였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걸어가던 공손무가 건물 사이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가 어둠 속에 숨은 채 향백관 쪽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장정이 나무 상자에 뭔가를 분주하게 집어넣고 있었다.
‘도자기와 그림들인가. 예술품들을 상자에 담고 있군.’
눈알을 빠르게 굴리던 그는 비교적 경계가 느슨한 곳을 발견하였다.
‘입구 쪽과 비교하면 건물 외벽 쪽은 경비가 허술하군. 외벽을 넘어서 내부로 잠입해야겠어.’
생각을 끝낸 공손무가 향백관 안으로 잠입하기 위해 은신술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