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3화>
173화. 용서냐 복수냐(2)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공손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내 둘째 형, 공손경승이야!’
매끈하면서도 새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매와 오똑한 콧날.
굳게 닫힌 입과 입가에 난 일자 모양의 흉터.
세월의 흔적이 있었지만, 분명 공손무의 무의식 속에 등장했던 자였다.
공손경승 앞에 선 공손무는 문득 한 가지가 궁금했다.
‘형은 나를 알아볼까?’
아무리 핏줄이라고 한들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던 공손경승이 그를 단번에 알아볼지는 미지수였다.
심지어 공손경승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와중, 공손경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급단 습격 사건을 해결한 녀석이라고?”
온기라고는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실력 있게 생긴 얼굴은 아닌데, 제법이군.”
공손경승은 공손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듣자 하니 보상으로 나와의 독대를 요청했다는데?”
“예. 그렇습니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잠시 뜸을 들이던 공손무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슬픈 이야기?”
“예. 부디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풋! 웃긴 놈이군. 그래 어디 한번 해 봐라. 단, 내 눈에서 눈물을 뺄 만한 슬픈 이야기가 아니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9년 전에 저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공손경승은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공손무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19년 전 그날, 온 사방은 화염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린 나이인 저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었죠.”
“으음?”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일까?
무관심하던 공손경승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저를 품에 안은 채 가족들을 이끌고 도망쳤습니다만 결국 놈들의 화살을 맞고 땅에 쓰러지셨지요. 자신의 운명이 여기까지인 것을 안 아버지는 품에 품고 있던 저를 둘째 아들에게 맡깁니다.”
“뭐라고? 너 지금!”
공손경승이 말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공손무는 두 눈을 부릅뜨며 끝까지 이야기를 이었다.
“하지만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희생을 잊고 천륜을 저버리는 짓을 합니다. 저를…… 끝없는 어둠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네 이놈!”
참다못한 공손경승이 다가와 공손무의 멱살을 잡았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그런 공손경승을 빤히 쳐다보던 공손무가 이내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형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공손경승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백지장처럼 되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 녀석은 죽었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놈이라고!”
“예! 그렇지요! 형님이 낭떠러지로 밀어 버렸으니 존재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이렇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하여 지옥 끝에서 돌아왔단 말입니다!”
공손무와 공손경승이 서로를 노려보았고 강렬한 눈빛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크윽!”
이윽고 공손경승이 공손무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그래서, 나에게 복수라도 하기 위해 온 것이냐?”
“복수를 원했다면 귀찮게끔 이리 돌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곧바로 형님이 자는 군막을 덮쳤겠지요.”
“그럼 뭐 때문에 온 것이냐?”
지독할 만큼 차디찬 목소리에 공손무는 혀를 내둘렀다.
“참으로 모지십니다. 저는 그래도 핏줄을 찾았다는 생각에 내심 기뻐했습니다. 형님의 마음속에 가족이란 건 없는 겁니까?”
“가족?”
공손경승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쏘아붙였다.
“네놈이 내 가족에 대해서 뭘 알아? 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야!”
뜻밖의 말에 공손무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두 살이었던 네가 그때의 일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아니 애초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둬야 할 것이다. 그날의 지옥 같은 광경, 다 너 때문에 벌어진 거야. 아버지가 죽은 것!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 모두 너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저는 고작 두 살 된 어린아이였습니다! 제가 뭘 그리 잘못하여 가족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단 말입니까!”
“바로 그것! 네가 두 살 된 어린아이라는 점이 우리 가족을 모두 위험에 빠트렸다!”
“그 무슨?”
한숨을 내쉰 공손경승이 절벽 아래의 경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네가 천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무림의 오래된 전승에 따르면 천살성은 천하를 피로 물들일 운명을 타고난다. 실제로 무림 역사상 희대의 악인들은 모두 천살성을 품고 있었지. 가장 최근에 그러했던 인물이 화산검마였고 말이야.”
화산검마를 악인이라고 평가하는 걸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와의 관계를 드러낼 수 없었던 공손무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천살성은 중원에서 가장 배척받는 존재다. 세상에 들켜서는 안 되는 존재지.”
“그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도 아느냐? 흑사교가 너의 힘을 노렸던 것을?”
“예……?”
처음 듣는 소리에 공손무가 표정이 찌푸려졌다.
‘흑사교는 자신들의 정체를 파헤친 화산검마와 똑같은 천살성인 나를 두려워하여 죽이려는 것 아니었나?’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흑사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너만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나 또한 청룡대의 대장에 이르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니까.”
“조금 전에 흑사교가 저의 힘을 노린다고 하셨지요?”
“그래. 흑사교는 천살성의 힘을 원했지.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들은 천살성인 아버지와 너를 죽이려고 했어. 자기가 가지지 못할 바에는 그냥 부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지. 참으로 고약한 심보를 가진 놈들이야.”
“아버지 또한 천살성이었습니다. 그럼 형님은 아버지를 미워하셨습니까?”
공손무의 말에 공손경승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아니! 내가 어찌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겠나! 그분은 나를 사랑으로 키워 주신 분이야! 나의 유일한 희망이자 우상인 존재였지! 그런데 네가 그것을 부숴 버렸다!”
“제가 뭘 어떻게 부쉈다는 말입니까?”
“아버지는 천살성의 기운을 완전히 제어하실 줄 알았어. 그래서 흑사교로부터 자유로웠지. 하지만 너는! 두 살의 철부지인 너는 천살성의 기운을 제어하지 못했어. 여기저기 그 지독한 기운을 뿌리고 다녔지. 그래서 놈들에게 들킨 것이다. 평화로웠던 우리 가족의 삶이 너로 인해 파괴된 것이야!”
“그런…….”
자신이 가족을 위험에 빠트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공손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진 거라고?’
눈물이 차오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깊은 충격에 빠진 그는 무릎을 꿇고서 양손으로 지면을 짚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메마른 지면을 적셨다.
그런 그를 쏘아보던 공손경승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내가 볼 때 너는 아무것도 몰라. 지금의 너는 그 옛날 두 살배기 때와 달라진 게 없어.”
“그렇지 않아!”
“아니! 너는 그렇다! 만약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너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단어가 나올 리 없어!”
뜻밖의 말에 공손무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 입에서 형님이라는 단어가 나올 리가 없다니요?”
“역시나 모르는 모양이군. 네 출생의 비밀을.”
“출생의 비밀?”
“지금부터 잘 들어라. 너는 나와 친형제가 아니다.”
또다시 나온 충격적인 말에 공손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친형제가 아니라뇨?”
“말 그대로다. 우린 친형제가 아니야. 친형제처럼 한 집에서 살았을 뿐이지. 이 말은 즉, 네가 알고 있는 분들은 모두 네 친부모가 아니란 뜻이다.”
“거짓말! 내가 그런 거짓말에 속을 줄 알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공손무는 내면의 공간 속에서 추격대에게 쫓기는 남성과 여성을 보았다.
그들이 자신의 부모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럼, 전 누구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나도 모른다. 네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아는 건 아버지와 어머니뿐이었으니까.”
“아아!”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공손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어떻게 해서 그 집에 살게 된 겁니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묘령의 여인이 우리가 사는 집에 찾아왔다. 그녀는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인 듯했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여인은 아버지에게 갓난아기인 너를 맡아달라고 했어.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너를 받아들였지.”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공손경승이 차디찬 눈빛을 번뜩이며 손가락으로 공손무를 가리켰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말 알고 있지? 딱 그때의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야. 네가 온 다음부터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나와 큰형님에게서 멀어져 갔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는 너를 챙기기에만 바빴지.”
“그래서 나를 버렸다는 겁니까?”
“그건 참을 수 있었어. 언제든지 다시 뺏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지. 천살성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 너는 결국 우리 가족 모두를 위험에 빠트렸어. 너는 버림받은 주제에 남의 가정마저 파탄 낸 저주받은 존재야! 내가 그런 너를 그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야 했다고 생각하느냐?”
공손무는 그 물음에 차마 답을 할 수 없었다.
“너는 오히려 나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 나는 너라는 존재 때문에 부모와 형제를 잃었다. 사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공손경승이 안광을 번뜩이며 걸어오자 공손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도대체 여기에 왜 온 것이냐? 너는 그저 명이 다할 때까지 동굴 속에 처박혀 있어야 할 놈이야! 너는 가는 곳마다 죽음의 저주를 뿌리는 놈이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공손무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라. 누가 뭐라든 네놈은 천살성이고 동시에 죽음을 뿌리는 저주받은 존재다.”
“크윽!”
이빨을 갈던 공손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공손경승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가는 거지?”
“내 친부모를 찾을 겁니다.”
“그들을 만나서 뭘 하려고? 왜 나를 버렸느냐며 징징대기라도 할 거냐?”
공손경승의 말을 무시한 채 그가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거기 서라!”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뭔가 착각하나 본데…….”
스르릉!
검을 빼 드는 소리에 공손무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나는 너를 그냥 보내 준다고 한 적 없다.”
공손무가 고개를 돌리자 검을 뽑아 든 채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공손경승이 보였다.
“그럼 나를 어쩌겠다는 겁니까?”
“올 때는 맘대로 왔어도 나갈 때는 맘대로 나갈 수 없지. 생각해 보아라. 나는 무림맹의 최정예 부대인 청룡대의 대장이다. 그런 내가 중원을 피로 물들일 악을 그냥 보낼 수 있겠느냐?”
“나는 형님과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그 형님이라는 소리 집어치워! 진실을 듣고도 아직 형님 타령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