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71화>
171화. 폭풍전야의 땅으로(4)
“그렇다면?”
“용케도 살아남았구려.”
“동료들은 다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남았다고 조롱할 셈인가?”
“설마 그럴 리가. 나는 보급품 습격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오. 그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좀 도와주시겠소?”
“흐음…….”
무사가 침음을 한차례 내뱉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선택지가 없는 것 같군. 그래서 뭐가 궁금한 건가?”
“습격한 놈들의 인상착의가 궁금하오.”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별것 없어. 모자 달린 시꺼먼 피풍의를 입고 있었지.”
“얼굴은?”
“못 봤어. 가면을 쓰고 있었거든.”
“가면? 어떤 가면을 말이오?”
“원숭이의 얼굴을 본뜬 가면이었어. 그 사지에서 살아남은 뒤로 원숭이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지릴 지경이야.”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공손무가 다시 질문했다.
“그 외에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소?”
“검술이 정말 대단했지. 인간의 검술이 아니라 귀신의 검술 같았어.”
“어떤 종류의 검술이었소?”
“창졸간에 지나간 일이라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더니 백여 명이나 되는 정예 무사들이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어.”
듣던 중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공손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습격한 자들의 수가 몇이나 되오?”
잠시 머뭇거리던 무사가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한 명.”
“지금 뭐라고 하였소?”
“한 명이라고 말했네.”
“말도 안 돼. 보급대가 고작 한 명에게 박살이 났다는 거요?”
“그러니까 내가 귀신이라고 하지.”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 듯 공손무가 입맛을 다셨다.
“또 다른 건 없소? 다른 특이한 점 말이오.”
“으음.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말이야.”
“뭐든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 주시오.”
“냄새가 고약했어.”
“냄새라면 어떤 냄새를 말하는 것이요?”
“나는 평소에 술을 못해서 술 냄새에 민감한데. 그 원숭이 가면 사내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어. 그것도 일반적인 술 냄새가 아니라 아주 지독한 술 냄새가 났지.”
“술 냄새라…….”
더는 말할 게 없었는지 무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아는 건 다 말했어. 이제 하던 거 해도 되지?”
공손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사는 다시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공손무는 홀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원숭이 가면을 착용하고 귀신같은 검술을 쓰며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는 자라…… 대체 누굴까?’
현장에서 더는 얻을 정보가 없었던 공손무는 조사의 반경을 넓혀 근처 숲속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시진에 걸쳐 찾아다녀도 이렇다 할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후우. 잠시만 쉬었다 갈까.”
허탕을 친 그는 숨을 돌릴 겸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 답답함이 몰려왔다.
‘내 전임 조사관이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이유가 이거였어. 상대가 단 한 명이고 그마저도 워낙 신출귀몰하다고 하니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겠지.’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공손무가 아니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서 형을 만날 거야. 그리고 물어볼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잠시 후 마음을 다잡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진한 냄새가 몰려오며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강한 냄새에 공손무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저 방향인가?”
순간 머릿속으로 무사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도 일반적인 술 냄새가 아니라 아주 지독한 술 냄새가 났지.’
감을 잡았는지 달빛에 비치는 공손무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내야 해.”
한 줄기의 희망을 본 그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징검다리처럼 건너며 냄새를 따라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냄새가 점점 강해짐을 느꼈다.
‘냄새가 강해진다. 이 근처야. 이 근처에 보급단을 습격한 놈이 있다는 것인가?’
이윽고 그의 두 발이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지면으로 내려온 그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여긴데. 여기 어딘가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눈빛을 반짝이며 주변을 살피던 와중 마침내 뭔가가 포착되었다.
‘저건?’
나무 사이에서 아주 미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공손무 정도의 동체 시력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불빛이었다.
“흐음…….”
허리춤에 달린 검을 움켜쥔 채 그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귀신같은 검술을 쓰는 자다. 방심은 금물.’
나무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큼지막한 구멍이 보였다.
‘동굴?’
동굴 안쪽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오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다. 여기가 놈의 은신처야.’
공손무가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동굴 벽 곳곳에 횃불이 걸린 채 타오르고 있었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야. 어찌 된 거지? 놈은 혼자서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나?’
이윽고 동굴 끝에 이르자 큼지막한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은?’
동공 안에는 남루한 복장을 한 양민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공손무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시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무림맹에서 나온 사람이다. 무림맹의 보급품 행렬을 습격한 자가 있다고 하여 조사 중이지. 단서를 추적하다 보니 여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소! 그저 전쟁을 피해 숨은 사람들일 뿐이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휘리릭!
한차례 세찬 바람이 불더니 공손무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람들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허억!”
귀신같은 움직임에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 사이 공손무는 공동 한쪽에 쌓아 놓은 곡식 더미를 발견했다.
쌀자루에는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무림맹의 표식이 남아 있었다.
‘역시 이놈들이었군.’
결정적인 증거를 잡자 공손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가 안광을 번뜩이며 고개를 휙 돌리자 사람들이 흠칫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 관계도 없다며? 그런데 어찌 쌀자루에 무림맹의 표식이 찍혀 있지?”
“그건…….”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걸? 내가 지금 잠을 제대로 못 잔 상태라 신경이 좀 날카롭거든.”
살기등등한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던 중년 사내가 결국 엎드리며 소리쳤다.
“다 말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너희들이 무림맹의 식량 보급단을 습격한 놈들인가?”
“우리는 아니오.”
“너희가 아니라고?”
“그렇소. 그리고 그 전에 한 가지 말해둘 게 있소. 이 곡식들은 원래 우리의 것이오.”
뜻밖의 말에 공손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원래 너희 것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무림맹으로부터 식량을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자 청룡대는 주변의 농민들에게서 곡식을 빼앗았소. 우리가 피땀 흘려 농사지은 걸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빼앗겼다는 말이오!”
“그렇다고 무림맹의 보급단을 습격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야!”
“조금 전에 말했지 않소. 우리가 한 짓이 아니오.”
“그럼 도대체 누가 했다는 거지?”
“가면. 원숭이 가면을 쓴 자가 나타나 우리를 도와준다고 하였소. 그가 우리의 곡식을 되찾아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지는 꿈에도 몰랐소. 정말이오.”
공손무가 중년 사내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원숭이 가면을 쓴 사내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
“말을 하지 않을 건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죽일 것이오?”
“죽일지 말지는 만나 봐야 알겠지. 하지만 여기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반드시 죽는다. 어떡할 것이냐?”
“크읍!”
입술을 깨문 중년 사내가 이내 힘겹게 입을 뗐다.
“동굴 뒤쪽에 동호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소. 정상에 오르면 동호가 한눈에 보여 동호봉이라고 불리지. 그곳 정상에 그분의 은신처가 있을 것이오.”
“잠시 시간을 벌자는 수작이라면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오. 가 보면 알 것이오.”
중년 사내를 내려다보던 공손무가 이내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에 산 하나가 보였다.
‘저기가 동호봉인가? 놈이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올라야겠군.’
경공을 사용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호봉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긴가?’
그는 정상에 오르자마자 원숭이 사내의 행방을 찾았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뒤져도 나오는 게 없고 기감을 펼쳐도 느껴지는 기운이 없었다.
‘동굴에서 나던 것과 같은 술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뿐. 아무런 흔적도 없다.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속았단 생각에 공손무가 이빨을 깨물었다.
‘칫! 역시 거짓말을 한 건가? 내 이것들을 그냥!’
화가 난 그가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날 보러 와 놓고서는 어딜 가는 것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몸을 돌리자 지척의 거리에 정체불명의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공손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 내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이윽고 인영이 어둠 속에서 달빛 아래로 나오자 그 모습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빛의 피풍의.
잔뜩 성이 난 원숭이 얼굴을 본뜬 가면.
허공으로 전해지는 진한 술 냄새.
무림맹의 무사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인상착의였다.
“뭘 그리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건가? 날 보러 온 게 아닌가?”
점잖지만 위엄이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당신, 정체가 뭐요?”
“으허헛! 남의 집에 와 놓고서는 내 정체를 묻다니. 이것 참 오래 살고 볼일이구먼.”
“말씨름할 생각은 없소. 내가 묻는 것에 답하시오.”
“나 또한 너와 말씨름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공손무가 안광을 번뜩이며 칼자루를 잡았다.
그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가면인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도 싸우고 싶다면 내 상대해 주지. 하지만 그 전에…….”
가면인이 자리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저기 앉아서 술 한 잔 나누지.”
뜬금없는 말에 공손무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하였소?”
“맑은 빛의 달 아래에서 신선한 밤공기를 마시며 먹는 술은 참으로 일품이지. 칼춤을 출 땐 추더라도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으음…….”
“왜? 내가 술에다 독이라도 탔을까 봐?”
“나는 모르는 이와는 술을 나누지 않소.”
“술을 나누면서 알아 가면 되지. 보급단 습격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지 않은가?”
가면인을 노려보던 공손무가 마지못해 자리로 향했다.
자세한 내막이라는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으니 동호와 무한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한 풍경이었지만 공손무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이윽고 가면인이 술병과 술잔을 들고 나타났다.
“자, 한잔 받으시게나.”
공손무가 술병을 보며 물었다.
“무슨 술이요?”
“원공주(猿公酒)일세.”
“원공주? 이게 진짜 원공주란 말이오?”
원공주는 원숭이가 절벽의 틈 사이에 모아둔 과일들이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숙성된 술을 말한다.
“아, 그렇다니까?”
“이 지독한 냄새. 원공주의 냄새였구려.”
“지독하기는 개뿔, 향긋하기만 하구먼. 어서 잔 받지 않고 뭐 하나?”
머뭇거리던 공손무가 술잔을 내밀었다.
검붉은 액체가 술잔을 가득 채웠다.
코끝이 아려올 정도로 독한 냄새가 올라오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리 지독한 냄새라니…….”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 술이야. 산삼보다도 귀한 거라고.”
공손무가 눈을 질끈 감으며 술을 입에다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