ㅌ<검을 읽는 막내 공자 165화>
165화. 새로운 화산검마(2)
“오냐. 비록 잘못된 길을 들었으나 마지막 순간만큼은 정의롭게 가게 해 주마.”
“감사합니다.”
말을 끝낸 포염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으음?”
뒤쪽에 있던 무리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포염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은……?”
포염의 옆에 무릎꿇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매화검수들이었다.
“저희는 전대 장문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지만, 저항해야 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크나큰 후회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두 번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만큼은 장문인을 지키고 싶습니다. 장문인을 죽이실 거면 저희부터 죽이시지요!”
“하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로다! 너희 또한 따로 책임을 물을 것이니 어서 물러서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매화검수로서 장문인과 죽음을 함께하겠습니다!”
“물러서라고 하였다!”
이때 공손무가 용종찬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할아버지, 이들을 그만 용서해 주시죠.”
“그 무슨 소리냐? 포염이 한 짓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 같으니 그들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크흐음…….”
고민이 깊어지자 용종찬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윽고 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알겠다. 포염을 죽이는 건 그만두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놈의 직위는 거둘 것이다. 그리고 전대 장문인을 그 자리에 다시 앉힐 것이야. 포염! 이에 불만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어떠한 처분에도 순순히 따르겠습니다.”
용종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자, 공손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끝났군요. 화산파를 놈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냈어요.”
“하지만 방심은 하지 말아라. 이제 겨우 화산파 하나를 구한 것이니까. 자, 이제 우리의 할 일이 끝났으니 어서 여기를 떠나자.”
“예? 떠나요? 고장 계곡의 은신처로 가지 않고요?”
용종찬이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는 버릴 것이다. 중요한 문서만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태울 것이야.”
“이렇게 갑자기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많이 성장한 줄 알았는데, 아직 생각이 짧구나. 너와 나는 천살성이다. 화산파를 구했다고는 하나 세상의 눈은 우리를 곱게 보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흑사교가 알았으니 또 다른 교도를 보낼 수도 있어. 우리가 떠나야 화산파가 안전하게 재건될 수 있단 말이다.”
용종찬의 말에도 공손무는 당황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인사도 없이 이렇게 그냥 간다고요?”
“인사? 낯 뜨겁게 무슨 인사란 말이냐.”
“적어도 하나리 님하고는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데…….”
“그 아이와는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다. 지금 중요한 것은 너의 성장이다. 쌍아와의 일전으로 깨달았겠지. 너의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라오거라.”
“예, 알겠어요.”
일이 매듭지어지자 공손무는 용종찬과 함께 섬서 지역을 떠났다.
방랑하던 그들이 새로이 정착한 곳은 호북 지역이었다.
호북 지역에 은신처를 마련하자마자 혹독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용종찬과의 수련을 통해 공손무는 매화질풍검과 매화혈사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아찔한 수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그로부터 또 육 년이 지나고, 중원의 살수 업계에 한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뭘 말이야?”
“아, 화산검마가 돌아왔다는 소식 말이야.”
“화산검마? 그 전설적인 살수? 은퇴했던 그가 다시 현역으로 돌아온 거야?”
“그게 아니야. 그의 제자가 화산검마의 별호를 이어받은 거래.”
“화산검마의 제자라니.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군.”
“나 같으면 일부러라도 피하겠어. 살막의 살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특급 살수가 된 놈이야. 그런 녀석에게 잘못 찍히면 뼈도 못 추릴 거라고.”
“헉! 그게 정말인가? 이거 조심해야겠구먼.”
육 년의 세월이 걸린 훈련이 끝나자 공손무는 용종찬의 권유에 따라 살막에 몸을 맡겼다.
흑사교의 감시를 피하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했기에 음지에서 활동하는 살막은 그에게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 * *
새빨간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
“후우…….”
누군가가 숨을 고르며 이름 모를 객잔으로 들어섰다.
피풍의에 죽립을 깊게 눌러 쓴 그는 시끌벅적한 객잔 내부를 가로지르더니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위층에 도착하자마자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거한들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죽립 사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분패를 꺼내 보였다.
“어엇?”
상대의 신분이 밝혀지자 거한들이 깜짝 놀라며 재빨리 길을 비켰다.
“보, 본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거한들 사이를 지나가던 죽립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보름 전에 이곳에 새로이 배치되었습니다.”
“전임자는 어떻게 됐는지 아나?”
“그게…… 듣기로는 살막의 내부 정보를 빼돌리다 걸려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그 녀석하고 내기를 하나 했거든. 내가 이번 임무에서 살아 돌아오면 녀석이 한턱 크게 내겠다고 했지. 대신 죽으면 녀석이 내 모든 재산을 갖는 거야. 쯧! 이거 아무리 한턱내기 싫었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하면 쓰나?”
죽립 사내가 거한 중 한 명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그런 꼴 당하지 않게 조심해. 이 바닥이 더럽긴 해도 나름의 규율만 잘 지키면 오래 버틸 수 있으니까.”
“새겨듣겠습니다.”
말을 끝낸 그가 피풍의를 펄럭이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거한이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특급 살수인 화산검마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통로를 지나가던 죽립 사내가 이내 한 곳에서 멈추어 섰다.
다른 곳과는 달리 촛대가 몇 개 없어서 어둑어둑했다.
앞에는 촘촘한 쇠창살이 보였고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내가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더니 곧바로 죽립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새하얀 피부에 여우를 연상시키는 매력적인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살막의 특급 살수이자 새로운 화산검마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공손무였다.
육 년의 세월이 흘러 스물한 살이 된 그는 남아 있던 소년티를 벗어 버리고 완숙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쇠창살 너머의 어둠 속에서 인기척과 함께 정체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훗.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들었다. 불가능한 임무라고 생각했는데 잘 해냈구나. 참으로 수고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익숙한 듯 공손무가 손목을 여유롭게 돌리며 답했다.
“숫자만 많을 뿐이지 죄다 송사리들뿐이었어.”
“크큭! 너한테야 송사리들이겠지. 그나저나, 난 요즘 걱정이다.”
뜻밖의 말에 공손무의 눈가가 좁혀졌다.
“걱정이라니?”
“요즘 들어서 살막 안팎이 시끄러워졌잖아.”
“누가 살막을 노린대?”
“풋! 차라리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지.”
“그럼 도대체 뭐 때문에 걱정이라는 거야?”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내 어둠 속에서 형형한 안광이 번뜩였다.
“최연소, 최단기로 특급 살수가 된 사내. 그에 관한 얘기로 이 업계가 시끄러워졌단 말이지.”
“쩝.”
공손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어둠 속의 사내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건지…….”
“크큭! 이 바닥이 원래 그렇잖아. 너무 못하면 도태되고, 너무 잘하면 공공의 적이 되지. 널 껄끄럽게 생각하는 놈들이 많아졌다. 조심해라. 너 같은 인재를 잃는 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 죽을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뭐, 그렇다면 다행인데…….”
말끝을 흐리던 어둠 속의 사내가 쇠창살 너머로 서찰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뭐긴 뭐야. 의뢰지.”
“엥? 아니 조금 전까지 걱정해 줘 놓고서는 바로 의뢰서를 내미는 건가? 분위기로 봐서는 집에서 푹 쉬라고 할 줄 알았는데?”
“크크큭! 네가 걱정하지 말라니까 주는 것 아니냐. 게다가 이번 건은 지명 의뢰라고.”
공손무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지명 의뢰?”
“그래. 거물급 인사가 너를 꼭 집어서 의뢰하더군. 가격은 얼마나 돼도 상관없으니 네가 이 의뢰를 맡아 줬으면 좋겠다고 했어.”
“호오? 그래서 얼마를 제시했는데?”
“선금으로 금자 오십 냥을 냈다.”
놀라운 가격이었는지 공손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금자 오십 냥?”
“그래. 그리고 일이 제대로 끝나면 추가로 금자 오십 냥을 지급하기로 했지.”
“도대체 무슨 의뢰길래 그만한 돈을 내는 거야?”
“너도 잘 알잖아. 의뢰를 수락하기 전까지는 그 내용을 말할 수 없는 거.”
공손무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쪼잔하게끔. 이쯤 되면 그런 건 좀 어물쩍 넘어가 줄 수 없는 건가?”
“살막이 이제껏 유지되어 온 비결 중 하나는 규율을 준수했기 때문이지. 들어오기 전 문지기한테 이 바닥의 법을 강조해 놓고서는 이리 말해도 되는 거냐?”
“와아!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대?”
“크큭! 나는 천하에 귀를 두고 있다. 하물며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까?”
잠시 고민하던 공손무가 이내 서찰을 집어 들며 말했다.
“좋아. 대신, 이번 건이 끝나면 한동안 쉴 거니까 그렇게 아셔.”
“후훗. 잘 생각했다.”
계약서에 인장을 찍은 그가 어둠 속의 사내에게 물었다.
“자, 이제 의뢰 내용이 뭔지 가르쳐 줘.”
“의뢰 내용은 물건을 하나 회수하는 것이다.”
“무슨 물건?”
“의수다.”
의수는 불의의 사고나 전쟁으로 팔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나무로 만든 인공 팔을 뜻한다.
“겨우 의수 하나를 찾으려고 특급 살수를 고용한단 말이야?”
“나도 처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평범한 의수가 아니더구나.”
“평범하지 않다니? 대체 어떤 의수이길래?”
“크큭! 다른 것도 아닌 순수 황금으로 만든 의수다. 게다가 의수의 몸통에는 중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값비싼 보석들이 잔뜩 박혀 있지.”
공손무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호오. 황금 의수라니. 황금으로 만든 검이나 갑옷은 들어 봤어도 황금 의수는 처음 들어 보는데?”
“아마 실제로 사용하기보다는 장식용으로 만든 의수겠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호북성 형문산에 있는 보광사로 가라. 그곳에 황금 의수가 있다.”
사찰로 향하라는 말에 공손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광사?”
“그래. 조사를 해 보니 지금은 스님이 아니라 백골단이라는 도적놈들이 차지하고 있더구나. 백골단의 두목에게서 황금 의수를 빼앗아라. 그의 이름은 광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