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60화>
160화. 광기의 검객(1)
신충이 앞으로 나서자 뒤쪽에 있던 매화검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궁주님이 직접 나서셨어.”
“저 소년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건가?”
“조금 전 운필 사형이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거 너도 봤잖아!”
그들이 소란스럽게 굴자 포염이 안광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갈! 모두 조용하지 못할까!”
매화검수들이 입을 다물자 포염이 고개를 돌려 신충과 공손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신충,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거냐? 그토록?’
신충은 검을 빼 든 채 공손무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촌구석에 박혀 숨만 쉬고 살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을. 제 발로 여기까지 온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마.”
공손무가 손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거참 말 많군. 덤빌 거면 빨리 덤벼라.”
“이런 건방진!”
파아앗!
신충이 이빨을 깨물며 경공을 사용하였다.
‘신행백변(神行百變).’
표홀한 움직임으로 허공을 가르는 그것은 화산파 최상승의 신법 중 하나인 신행백변(神行百變)이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백 가지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만든다는 신행백변은 일대일 전투에서 거의 무적을 자랑하는 강력한 신법이었다.
곧 공손무의 주변으로 신충의 모습을 한 수십 개의 잔상이 흩뿌려졌다.
“와아! 궁주님의 신법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눈으로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뛰어난 자질을 가진 매화검수들도 신충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지 못했다.
오직 장문인, 포염만이 묵묵한 눈길로 신충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신행백변이라, 옛날 같았으면 저 아이를 상대로 신행백변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포염이 눈동자를 굴려 공손무를 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신충의 잔상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역시 무공을 얻었다고 해도 저것을 간파하는 것은 무리인가? 공손무. 네 기개는 가상했으나 그것도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네가 꺾기에는 이 난세가 너무도 두텁다.’
이때 공손무의 시선을 교란하던 신충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생각했다.
‘이런 놈에게 이 정도 신법을 쓴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모든 이가 보고 있는 만큼 확실히 찍어 눌러야겠지.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보여 줄 것이다. 우리 화산파가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내공이 충만해지자 그의 검에서 진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녀석, 검을 뽑고 있지도 않잖아?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군.’
눈앞에서 살벌한 검기가 아른거리는데도 공손무는 검도 뽑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훗! 내 신법에 완전히 농락당해 검을 뽑을 용기도 나지 않는 거겠지!’
신충은 공손무가 자신의 신법을 따라가지 못해 포기한 것으로 생각했다.
‘끝이다! 애송아!’
잔상을 일으키던 그가 검기를 두른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매영만천(梅影滿天).’
그러자 자홍빛의 검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뒤덮었다.
‘공손무, 너는 이제 끝이다.’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던 자홍빛의 검기들이 이내 매화꽃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내공으로 만들어진 매화꽃이 허공에 만개하고 꽃잎들이 흩날리는 것이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죽어라!”
신충의 일갈과 함께 만개한 매화꽃 모양의 검기들이 일제히 공손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 광경을 본 매화검수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화산파의 최고검법 중 하나다!”
“궁주님이 이 검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 봐!”
하지만 공손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에게 이런 것은 전혀 흥미롭지 못한 것 같았다.
“크윽! 끝까지 건방지게 구는구나!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라!”
자홍빛의 검기들이 공손무의 전신을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후우…….”
그가 숨을 고르며 한쪽 팔을 가볍게 휘저었다.
‘자하대나이(紫霞大邏移).’
그러자 휘저은 팔이 자주색으로 물들더니 쏘아져 오는 검기들의 방향을 틀었다.
“뭣?!”
수많은 검기가 공손무의 손짓 한 번에 방향을 틀자, 신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향을 튼 검기들은 공손무를 지나쳐 뒤쪽에 있는 나무와 바위에 연달아 충돌하였다.
콰아아앙!
검기들이 나무들을 조각내고 바위를 가루로 만들며 폭음을 일으켰다.
그 위력이 참으로 대단했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감탄하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지금 저 소년이 궁주님의 이십사수 매화검을 흘려버린 건가?”
“이게 무슨 일이래?”
간간이 들려오는 매화검수의 말들이 지금, 이 순간 신충에게는 비수처럼 여겨졌다.
‘이럴 리가 없어! 내 이십사수 매화검이 통하지를 않는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현실로 펼쳐지니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신충이 격앙된 어조로 소리치자 공손무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별것 없어. 그냥 내 기운으로 네가 날린 검기들을 흘려버린 것뿐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네까짓 것이 내 검기를 흘리냐는 말이다! 그건 적어도……!”
인정하기 싫다는 듯 신충이 이빨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크읏! 나보다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 아닌가!”
그의 반응을 본 공손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아직도 당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너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였다. 그런 네가 대 화산파 진무궁의 궁주인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야말로 비정상적인 것 아닌가?”
“진무궁 궁주라는 자리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산파를 다 팔아먹은 놈이 무슨 궁주라는 거냐.”
공손무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라. 네가 권력을 얻기 위해 했던 수많은 만행을 낱낱이 고하고 뼈를 깎는 마음으로 반성하란 말이다!”
“닥쳐! 닥치라고! 그 입 닥쳐!!”
신충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했다.
“궁주님…….”
귀신이라도 씐 듯한 광기에 매화검수들이 당황하며 술렁였다.
그들의 반응에도 신충은 질투심과 증오심에 휩싸인 채 공손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을 죽이겠다. 네놈의 어리석은 사부를 죽인 것처럼 이 손으로 네놈을 죽이겠어!”
그가 입술을 깨물며 허공으로 도약하더니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검의 끝이 상대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표홀하면서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찌르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공손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할 수 있어. 할아버지가 보여 준 것을 떠올리는 거야.’
무슨 생각인지 그가 맨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 사이 검의 끝이 공손무의 목 근처에 이르고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끼이이잉! 빠지직!
그런데 이때 놀랍게도 신충의 검이 공손무의 목에 닿기 일보 직전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이건 뭐지?”
신충은 검을 찔러 넣고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 팔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왜 내 팔이 움직이지 않는 거야?’
자신의 팔을 살펴보던 그는 반투명한 무언가가 팔을 휘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미줄?’
신충의 팔에는 다름 아닌 반투명한 거미줄들이 칭칭 감겨 있었다.
반대쪽에서 이를 본 공손무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어! 흉내 내는 정도지만 녀석의 움직임을 막는 데 성공했어!’
당황한 신충이 급히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거미줄의 강도가 엄청나 완력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용종찬이 봤다면 엉성한 실력이라며 고개를 내저었겠지만, 이 정도의 수준으로도 이미 신충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마지막 기회다.”
“허어업!”
공손무의 싸늘한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지자 신충의 어깨가 한차례 떨렸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라.”
“닥쳐! 네가 이긴 것 같냐? 천만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돼지치기 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신충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공손무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후우. 역시 안 되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놈만은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아.”
“크하하핫! 용서하지 않으면 네가 어쩔……!”
촤아아악!
이때 신충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 전체가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다.
“무슨 짓을?!”
그의 팔을 휘감고 있던 거미줄이 피부를 파고들자 팔 전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선혈이 땅을 적시자 공손무가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이전의 나는 팔다리가 고장 난 병신이었지. 어디 너도 그 고통을 한번 당해 봐라.”
그가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거미줄을 뒤쪽으로 세게 당겼다.
콰지지직!
“으아아악!”
그러자 신충의 피부를 파고들었던 거미줄들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그의 팔을 수십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끄아아악!”
얼마나 고통이 극심한지 비명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뒤쪽에 있던 장문인과 매화검수들은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끼이잉! 휘리릭!
“허업?”
비명을 지르던 신충은 이번에는 자신의 다리 한쪽이 움직이지 않은 것을 느꼈다.
“또 거미줄이?”
아니나 다를까 그의 다리 하나가 거미줄에 잔뜩 휘감겨 있었다.
이번에도 공손무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완벽하게 내 고통을 체험하려면 똑같은 조건이어야겠지? 안 그래?”
그가 매화혈사(滅劫血絲)를 당기자 신충의 다리가 수십 조각으로 찢어져 버렸다.
균형을 잃은 신충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엎어져 버렸다.
“아악!”
피범벅이 된 그가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서 첨벙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 모습을 보던 포염이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모두 뭣들 하느냐?! 궁주를 구해라!!”
장문인의 말에 매화검수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한 발짝도……!”
그런데 그 순간 중후한 공력이 담긴 음성이 매화검수들의 발을 묶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는 놈은 모두 그자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온몸을 짓누르는 기운과 뼈마디까지 서늘하게 하는 살기에 매화검수들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공손무가 포염을 보며 말했다.
“장문인. 궁주가 말을 할 상황이 아니니 장문인이 말을 해 줘야겠습니다. 천승진인과 당신들이 이 화산파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짓들 말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치닫게 되자 포염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 온 탑이 이리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장문인이 되었을 때만 해도 포염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기억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면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산파는 화산파의 것이 아니었다.
천승진인은 화산파의 꼭대기가 아니었으며, 그의 위에는 화산파를 한낱 장기판의 말쯤으로 생각하는 미지의 존재가 있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애초에 쌓아 올린 게 아무것도 없었을 수도 있어. 이 장문인이란 자리도 허울뿐이지 않나.’
장문인이었지만, 포염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천승진인과 정체 모를 붕대 사내에게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앞에 공손무가 나타났다.
애써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 버린 것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왔다.
“장문인 어서……!”
“알겠다. 알겠으니 그만 재촉하거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포염이 이내 고개를 들어 공손무를 보았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그게 뭡니까?”
“여기서 우리를 뛰어넘는다고 해도 저 안에는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가 버티고 있다. 넌, 그자를 이길 수 있느냐?”
이에 공손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반드시 이길 겁니다. 그리고 정의와 대의를 위해서라면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도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게 화산파의 정신 아닙니까?”
그의 대답에 느끼는 바가 있는지 포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