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56화>
156화. 흑사교(1)
‘어찌 저리 오만무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태사의에 드러눕듯 기대어 앉은 붕대 사내는 두 다리를 앞에 있는 탁자에 턱 하니 올리고 있었다.
유곤청이 방 안에 들어왔음에도 그는 여전히 팔베개를 한 채 자세를 고치려는 기색이 없었다.
‘이 나를 맞는 자리에서 어찌 저런 모습을 보여 준다는 말인가?’
장문인의 따뜻한 환대를 바랐던 유곤청은 예상과 다른 상황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그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이보시오! 내가 왔는데 그 무슨 해괴한 자태이오! 나는 그분의 대리인이라는 말이오!”
“으음……?”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붕대 사내의 두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아. 밖에서 뭘 그리 꾸물거리나 했더니 이제 들어온 것인가?”
붕대 사내의 목소리는 귓구멍을 푹푹 찌르는 가시처럼 느껴졌다.
‘뭐지?’
이윽고 그의 두 눈과 마주친 유곤청은 갑자기 목덜미가 뻐근해지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헉!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살기인가?’
단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유곤청은 속에서 시큼한 것이 올라올 정도로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붕대 사내가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런데 너,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지? 해괴하다느니 뭐 이런 말을 내뱉은 거 같은데. 맞느냐?”
압도적인 위압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유곤청은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말했다.
“크흠! 나는 그분을 대신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나를 욕보이는 것은 곧 그분을 욕……!”
쉬이익!
이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공성이 울려 퍼지더니 뭔가가 유곤청의 눈가를 빠르게 지나쳤다.
“커허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유곤청이 거친 숨을 들이켜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 어느 순간에?!”
그의 어깨에는 놀랍게도 짧은 비도(飛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유곤청이 피가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그는 놀랐지만, 그보다 분노가 더 컸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네놈이 감히!!”
스르릉!
흥분한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를 본 화산파의 도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저마다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다.
유일하게 붕대 사내만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오?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크읏!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다. 별 볼 일 없는 마적단의 두목 하나 죽였다고 내가 어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분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때 붕대 사내가 탁자에서 다리를 내리더니 유곤청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부터 계속 그분 거리기에 바쁘구나. 네놈이 그토록 물고 빠는 그분께서 오늘 네가 죽는다는 것은 알고 계실까?”
“뭐라고?”
방 안을 가득 채운 매서운 살기에 유곤청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칼자루를 잡은 두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런 유곤청의 모습을 본 붕대 사내가 실망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너에게서는 광기가 느껴지지 않아. 싸움의 미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런 네놈 따위가 감히 본교를 들먹이며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지금 무슨 말을?”
‘본교’라는 단어가 나오자 유곤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교라니,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정체가 뭐냐! 장문인이 아니었던 것인가!”
“키히히힛! 네놈의 눈구멍으로는 내가 도사로 보이느냐? 안목 또한 저질이었군. 너는 본교를 믿을 자격이 없다. 검은 뱀을 숭배할 최소한의 미학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어.”
그제야 유곤청은 붕대 사내가 화산파의 식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문인이 아니다? 그런데 왜 태사의에 앉아 있는 거지? 다른 도사들은 왜 저놈이 하는 짓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거야?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파아앗!
이때 유곤청의 앞에 서 있던 붕대 사내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라졌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중 뒤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크헉!”
붕대 사내는 소리 없이 유곤청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이런 건방진 누더기 자식이!”
유곤청이 입술을 깨물며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푸른 내기를 머금은 검이 호선을 그리며 붕대 사내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피이잉!
하지만 그의 검은 붕대 사내의 두 손가락에 의해 허공에서 가볍게 잡히고 말았다.
“참으로 가소롭구나. 이런 형편없는 실력을 믿고서 나에게 이빨을 보인 것인가.”
붕대 사내가 손가락에 힘을 살짝 주자 검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크윽! 무, 무슨 힘이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그가 유곤청의 검을 땅바닥에 떨어트린 다음 피가 흘러나오는 어깨 부분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끄아아악!”
피가 튀기고 뼈가 으스러지자 유곤청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비명에 붕대 사내의 입에 미소가 걸렸고, 두 눈동자 속에는 광기가 일렁거렸다.
“키히히힛! 좋아! 아주 좋은 표정이야! 조금 전의 그 개똥같은 표정보다 그런 표정을 하니까 보기 좋잖아. 안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크아악!”
“엇? 아직 그 개똥같은 표정이 다 사라지지 않았구나. 이렇게 하면 좀 더 좋아지려나?”
붕대 사내가 들고 있던 검을 그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아아악! 끄아아악!!”
극심한 고통에 유곤청은 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붕대 사내가 이내 무릎을 살짝 구부리더니 유곤청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는 귓가에다 귓속말을 속삭였다.
“허억!”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극심한 고통에 흐느끼던 유곤청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아…….”
이윽고 당황한 듯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귓속말을 끝낸 붕대 사내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때? 이 정도면 네가 말한 그 빌어먹을 그분하고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지?”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제야 자기 분수를 좀 깨달았나? 당장 여기를 떠나 네가 모시는 주인에게 전해라. 여기는 이제 쌍아(雙牙)의 것이 되었으니 더는 관여하지 말라고 말이야.”
유곤청이 고통도 잊은 채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이때 더는 못 보겠다는 듯 태사의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주위에 늘어선 도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뭣들 하는가! 저분을 화객전(花客殿)으로 모시고 가 치료토록 하라.”
“옛!”
중년 사내의 명령에 도사들이 유곤청을 끌고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흠!”
헛기침하는 중년 사내의 정체는 바로 과거 공손무의 목숨을 위협했던 참도진인(懺道眞人)이었다.
진무궁의 궁주였던 그는 세월이 지나 천승진인의 자리를 이어받아 대장로에 올라 있었다.
유곤청이 사라지자 붕대 사내가 입을 삐죽였다.
“에이, 너무 일찍 보내는군. 조금 더 갖고 놀 수 있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그분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하니 이제 고정하시지요.”
“쩝. 뭐, 참도진인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감사합니다. 그럼 소인은 공무로 인해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혹시 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옆에 있는…….”
참도진인이 말끝을 흐리며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장문인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알겠어. 그만 가 봐.”
“예,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더니 곧바로 뒤를 돌아 방을 나갔다.
방을 나오는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달라 보였다.
이빨을 꽉 깨물고 이마에 핏기를 세운 것이 언젠가는 저 오만방자함을 고쳐 주겠다는 듯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찰박 찰박.
잠시 후 붕대 사내, 쌍아가 세숫물을 받아오게 시키더니 거기에 두 손을 담갔다.
맑았던 물이 손에 있던 핏물과 뒤섞이며 다홍색으로 변해 갔다.
쌍아는 여전히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자하각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거기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남도 마을을 습격하려고 했던 유곤청이 저 꼴이 되어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라…… 그들을 공격한 놈들이 누군지 궁금해지는군. 아니 그러한가, 장문인?”
그의 옆에는 태사의는 아니지만 제법 멋스러운 의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장문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만?”
쌍아가 히죽이며 말하자 차를 마시던 사내의 손길이 멈추었다.
딸깍.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얼굴을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조금 보이긴 했지만, 그는 화산파의 일대 제자이며 매화검수였던 포염이었다.
포염은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었지만, 마땅히 자신이 앉아야 할 상석인 태사의에 앉지 못하는 신세였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사상, 이 자하각내에서 이렇게 피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크크큭! 그것 때문에 그리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포염은 신성한 자하각 내에서 청랑단의 두목 유곤청을 찌른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앞으로 자하각 내에서 피를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나? 바꿔서 생각해 봐. 장문인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쓴 거라고!”
“새로운 역사라니요?”
“이곳에서 피를 본 전례가 없다며? 장문인이 그 첫 번째 전례를 만든 거야.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라고! 내 말이 틀렸나?”
“그건 새로운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오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키힐힐힐!”
그 말에 쌍아가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포염의 곁으로 다가왔다.
툭! 툭! 툭!
그러고는 한 손으로 포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실에 같이 있던 도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쌍아는 연신 실실거렸다.
“장문인은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갑자기 포염을 끌어당기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방금 그 말…… 장문인이 아니었으면 목을 베었을 거야. 난 누가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을 제일 싫어하거든.”
진한 살기가 묻어나는 말에 포염은 눈을 내리깔았다.
“흥이 식었어. 그만 나가 봐.”
자하각의 주인인 장문인에게 나가라고 하자 다른 도사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포염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이 나가는데도 쌍아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만 대충 흔들었다.
터벅 터벅.
자하각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포염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달이 참 쓸데없이 밝구나.’
밖은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고, 하늘에는 노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장문인!”
이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충이 기다렸다는 듯 포염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신충이 왔는데도 포염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장문인! 뭐라 말씀 좀 해 보십시오!”
그가 닦달하자 포염이 마지못해 입을 뗐다.
“무슨 말을 하라는 말이냐?”
“유곤청이 피투성이가 되어 밖으로 실려 나왔습니다. 대체 자하각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자가 유곤청을 찔렀다.”
대답을 들은 신충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장문인이 있는 곳에서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소리를 낮추거라. 듣기라고 한다면…….”
“장문인께서는 분하지도 않습니까?”
신충의 외침에도 포염은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장문인!!”
하지만 이번에는 신충도 물러날 수 없는 듯했다.
신충이 씩씩거리며 포염의 뒤로 따라붙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진무궁으로 간다.”
“이것 보십시오! 이것부터가 틀렸습니다! 장문인이 자하각에서 쫓겨나 진무궁으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걸음을 재촉하던 포염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려 왔다.
“그럼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장문인?”
포염이 분노를 삼키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곤청이 남도 마을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누군가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남도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다. 그곳은 화산파와 오랫동안 교류하였고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이다. 같은 식구들이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곳을 한순간에 버렸다.”
“그건…….”
포염은 토해 내듯 말을 이어서 뱉어 냈다.
“천승진인이라는 동아줄을 잡으면 화산파의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더러운 짓거리를 도맡아서 한 거야. 너도 그렇지 않으냐?”
신충은 말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동아줄이 아니라 동아줄을 잡고 있던 천승진인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거였어.”
“장문인! 어찌 그런 말씀을!”
“나는 천승진인이 이 화산파의 꼭대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것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위에는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들에게 우리는 한낱 개미 새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