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55화>
155화. 뱀의 이빨(4)
‘오!! 왔구나!’
이때 미리 앞서 가 있던 척후조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흑립을 쓰고 청색의 복면을 한 청랑조 무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두목님. 이 앞쪽에 커다란 장원이 있습니다.”
“드디어 화산파에 다 왔단 말인가! 특별한 것은 없더냐?”
“입구에는 그곳을 지키는 화산파 측 무사들 몇 명만 있을 뿐. 다른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어서 가자!”
“예! 두목님!”
잠시 후 그들은 연화봉 정상 부근에 다다랐다.
정상에 이르자 높다란 벽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장원과 여기저기 굴곡진 언덕에 지어진 크고 작은 전각들이 보였다.
장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위에 걸린 현판에는 화산파(華山派)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저벅저벅.
“응? 뭐지?”
발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문지기 중 한 명이 물었다.
“누구시오?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소?”
이를 들은 유곤청이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내 이름은 유곤청! 청랑단의 두목이다! 나의 주공께서 내가 화산파에 올 것이라고 서신을 보냈을 것이다. 장문인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라.”
“유곤청?”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이내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밖으로 나오더니 동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끼이익! 덜커덩!
도복을 입은 화산파의 무사가 정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어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처지였기에 유곤청은 최대한 태연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바로 화산파인가…….”
화산파 내부로 들어간 유곤청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곳곳에 심어진 매화나무들이었다.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매화꽃들을 본 유곤청은 그 풍경에 잠시나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 사람은?’
그들 앞으로 백색의 득라의를 입은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옥빛의 피부를 자랑하는 사내의 등에는 두 개의 흑색 매화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유곤청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 화산파의 이대 제자 한소라고 합니다.”
소개를 들은 유곤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했더니 화산파의 이대 제자였구려.”
그의 어감에는 어딘가 실망한 기색이 엿보였다.
‘우리가 왔는데 장문인이 직접 나오지는 않더라도 매화검수나 일대 제자가 무리를 지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고얀 것들!’
화산파의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안내역을 맡은 것이 그대이오?”
“예.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장문인께서 찾으십니다. 자하각으로 드시지요.”
“자하각? 호오…….”
실망감으로 차올랐던 그의 목소리가 한순간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자하각은 장문인의 거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장문인이 선뜻 들어오라는 건 상대를 특별한 손님으로 취급한다는 뜻이었다.
‘역시 주공의 영향력 때문인가. 후훗!’
어두웠던 유곤청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럼 어서 안내하시오.”
“예. 저를 따라오시지요.”
유곤청과 청랑조 인원들은 한소를 따라 안쪽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크고 작은 전각들을 지나자 마침내 장문인의 거처인 자하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하각 근처에 이르자 유곤청은 공기가 좀 전보다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분위기가 장난 아니구나. 역시 화산파는 화산파인가?’
장문인의 거처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청랑단의 존재 때문에 그런 것인지 다수의 도사가 패검(佩劍)한 채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며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예리한 눈빛은 하나같이 외부에서 온 손님을 그다지 반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저벅저벅.
이때 늘어서 있던 도사 중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른쪽 눈가에 보이는 기다란 흉터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의 등장에 유곤청의 무리를 이끌고 오던 이대 제자 한소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대 제자 한소가 진무궁의 궁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뒤에 있는 자들이 청랑단의 사람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수고했다. 넌 옆으로 빠져 있거라.”
“예. 궁주님.”
한소가 옆으로 비켜서자 사내가 유곤청에게 다가왔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나는 화산파 진무궁의 궁주 신충이라고 하오.”
유곤청 앞에 선 것은 놀랍게도 육 년 전 공손무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신충이었다.
일대 제자이며 매화 검수였던 그는 육 년 후인 현재 진무궁의 궁주가 되어 있었다.
“으음…….”
그런데 무슨 일인지 유곤청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지금 나에게 반갑소라고 한 것인가?’
유곤청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위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화산파가 주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남도 마을을 선뜻 내준 천승진인(天昇眞人)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장문인도 아닌 주제에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른단 말인가? 진무궁의 궁주라 해 봤자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신충의 태도에 나아졌던 유곤청의 기분이 또다시 나빠졌다.
‘귀한 손님이 왔으면 먼저 묵을 곳부터 알아봐 주고 쉬게 한 다음에 일을 진행할 것이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보자고 한다니. 이놈들이 설마 남도 마을에서의 일을 알고서 나를 얕보는 것인가?’
버럭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급한 상황이기에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나도 반갑소. 신충 공.”
그의 대답을 들은 신충 또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소이다. 남도 마을에 거점을 짓고 며칠 뒤에나 올 거로 생각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다 마음먹은 대로 잘 풀릴 수가 있겠소. 약간의 문제가 생겨 화산파의 장문인과 의논하러 온 것이오.”
“아, 그렇소이까.”
꽈드득!
무슨 일인지 검을 잡은 신충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문인은 안에 계시오. 다만, 자하각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귀공 한 명뿐이니. 나머지 인원은 여기서 대기하셔야 하오.”
이건 유곤청도 예상한 바였다.
“알겠소이다.”
대답한 유곤청이 계단을 오르려 했다.
철커덕!
“응?”
하지만 신충이 팔을 들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아니, 이놈이?’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유곤청이 날 선 기세로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내 말 아직 안 끝났소이다. 자하각 안으로 들어가려면 무장 또한 해제해야 하오. 무장을 해제하고 우리에게 확인받은 다음 들어가시오.”
‘이것들이 감히 그분의 대리인과도 같은 나를 무장 해제시킨단 말인가?!’
그것만은 유곤청도 양보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는 없다니, 그 무슨 말이오?”
“나는 그분의 대리인 자격으로 온 사람이오. 내 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곧 그분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과 같은 것. 천승진인이 나를 이리 대하라 하였소이까!”
유곤청의 일갈에 신충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깊어졌고 그 너머에는 분노가 꿈틀거렸다.
‘나는 그분의 대리인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야!’
신충의 기세에 유곤청은 마른침을 삼켰지만, 감히 자신을 해할 수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후우…….”
이윽고 신충이 짧은 숨을 내쉬더니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그것이 바로 화산의 법도이오. 화산에 왔으면 화산의 법도를 따르시오. 내 두 번 말하지는 않겠소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유곤청이 신충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나를 이리 대한 것을 그분께서 아신다면 화산파가 온전할 수 있을 것 같소이까!”
“뭐라?”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신충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아, 아니!”
그러자 위협을 느낀 청랑조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고 이를 본 화산파의 도사들도 덩달아 검을 빼 들었다.
그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맴돌았다.
“지금 뭐라 지껄였느냐? 화산파가 어쩌고 어째?”
번쩍이는 칼날에 유곤청은 잠시 당황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대로 밀어붙였다.
“지금 나에게 칼을 들이댄 것이오? 이런 무례한! 이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죄? 하핫! 화산파의 법도를 어기려는 그대가 바로 죄인 아닌가! 누구에게 감히 죄를 운운하는 것인가!”
서로의 검이 언제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덜커덩!
갑자기 자하각의 문이 열리더니 일대 제자로 보이는 사내가 나왔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온 그가 신충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무장 해제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어서 손님을 안으로 모시라는 장문인의 명입니다.”
“뭐라고?”
“흥!”
신충과 유곤청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크윽!”
인정하지 못하겠는지 신충이 이빨을 깨물며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대체 화산파의 법도를 뭐로 생각하는 것이야! 어찌 이런 일이!”
그가 유곤청을 한차례 쏘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들어가시오!”
“어흠!”
신충이 길을 터주자 유곤청이 거드름을 피우며 계단을 밟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신충의 눈길이 불같이 매서웠다.
우여곡절 끝에 자하각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지만, 유곤청의 속내는 여전히 복잡했다.
‘흐음. 장문인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나? 그는 이미 우리의 상황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기보다는 적당히 주공의 위세를 빌려 시간을 끄는 수밖에. 지원 병력이 오면 그때 다시 우리의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거야.’
자하각 안으로 들어간 유곤청은 진한 나무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장문인이 거주하는 자하각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지진 않았지만, 제법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몇 개의 방들과 복도를 지나자 장문인이 있는 방이 보였다.
일대 제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문 너머로 말했다.
“손님들이 도착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있고 나서 문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드르륵!
고급스러운 격자무늬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방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화산파의 장문인이 있는 것인가.’
유곤청이 들어가는 곳은 자하각에 있는 장문인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 겸 공식적인 보고를 받는 곳이었기에 꽤 넓은 공간이었다.
‘응?’
그런데 이때 유곤청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방 안의 구조와 장식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저것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방 한가운데였다.
방의 중앙에는 화산파의 장문인을 위한 멋스러운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는 것만 하더라도 위엄이 돋보일 것 같았다.
문제는 태사의에 정체불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뿜어내는 존재감이 대단했다.
‘저 사람이 화산파의 장문인인가?’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내는 희한하게도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이고 손이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곳에는 모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유곤청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겉모습이 아닌 그의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