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53화>
153화. 뱀의 이빨(2)
따져 묻는 용종찬에게 여인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희의 사정을 좀 봐달라는 겁니다. 알다시피 저희는 살수 집단. 의뢰받은 내용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기 위해 많은 경비를 지출하여 여기까지 왔고요.”
“그럼 계속 수행해. 누가 말리더냐?”
“하지만 계약서상 우리의 손이 아닌 다른 변수로 인해 목표물이 죽게 되면 의뢰인에게서 계약금을 그만큼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이 바닥의 통속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어르신께서는 우리의 중요 목표물 중 절반 이상을 날려 버리셨고 그에 따라 저희의 손해가 막심하다는 겁니다.”
“흐음…….”
조곤조곤하면서도 귀에 박히는 듯한 목소리에 용종찬이 입맛을 다셨다.
‘어린 것이 맹랑하기 짝이 없구나. 자칫 잘못하다가는 말려들 수 있겠어.’
생각을 끝낸 그가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내 원래 목표는 청랑단이 아니다. 난 화산파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야.”
“화산파의 볼일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내가 너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느냐?”
“한평생 화산파에게 쫓기신 몸 아닙니까. 그런 분이 화산파로 간다고 하시니 이해가 좀 되질 않아서요.”
“그것 또한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잠시만 시간을 더 내주십시오. 이 상황을 의뢰인과 협의한 후에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왜……!”
상대방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섬화가 몸을 홱 돌리며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이에 용종찬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어이, 너!”
공기를 진동시키는 일갈에 섬화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무심하시더니, 이제는 저에게 관심이 생기신 겁니까?”
“소속을 밝히지 않을 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가 이내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떼었다.
“우리는 천비회(天秘會)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간직하고 또 밝히기를 원하지요.”
“천비회?”
“잘 기억해 두십시오. 혹시나 나중에라도 의뢰하고 싶으신 게 있으실지도 모르잖아요? 후훗.”
그녀가 묘한 미소를 남기고서 반대편 쪽으로 사라지자, 용종찬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지. 상대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먹잇감을 놓칠 수도 있으니 일단은 장단을 맞춰 줘야겠구나.’
이때 공손무의 전음이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이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저 녀석들은 어찌해서인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겠구나. 여기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움직여야겠다.’
‘예. 알겠어요.’
저벅 저벅
“응?”
이때 공손무는 반대편 쪽에서 누군가의 걸음 소리를 들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것은 한 쌍의 여인이었다.
왼쪽에는 섬화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흑립을 쓴 여인이 있었다.
오른쪽 여인을 바라보는 공손무의 눈빛이 한차례 빛났다.
‘저 여인인가? 그 의뢰인이라는 게?’
용종찬의 앞까지 다가온 섬화가 그에게 말했다.
“의뢰인이 직접 어르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자, 이분입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오른쪽에 있던 여인이 쓰고 있던 흑립을 조심스럽게 벗었다.
‘앗?’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공손무의 두 눈이 무슨 일인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청초한 미(美)가 감도는 이목구비였다.
이내 흑립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이는 삼십 대 초반에 완숙미가 넘치는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신은……?”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섬화가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나요?”
이에 여인이 공손무의 얼굴을 보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처음 보는 아이입니다.”
목소리를 듣고 나니 공손무는 더욱 확신했다.
‘하나리?’
공손무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화산파의 매화검수이자 위기의 순간에 그를 구해 준 하나리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공손무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하나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용종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호오. 살아 있었구나?”
하나리의 등장에 용종찬도 놀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육 년 전, 화산파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나리는 적들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고 생사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가 용종찬과 공손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연락이 끊겨 죽은 줄로만 알았다!”
“자세한 것은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듣자 하니 화산파에 일이 있으시다고요?”
“……그렇다.”
“외람되지만,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섬화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잠시 말없이 하나리를 바라보던 용종찬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화산파의 위협이 되는 누군가를 죽이러 여기까지 왔느니라.”
이에 예상했다는 듯 하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르신도 저와 비슷한 이유로 여기까지 오셨군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데 어찌 이런 아이를?”
“훗. 이 아이가 누군지 정녕 모르겠느냐?”
“예?”
용종찬이 네가 직접 설명하라는 듯 공손무를 향해 턱짓하였다.
이를 본 공손무가 하나리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를 알아?”
“육 년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사부를 잃고 화산파에서 비참하게 쫓겨났습니다.”
“그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하나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공손무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진정 기억 안 나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리 님.”
“엇?”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자 하나리는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공손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깐, 너 설마?”
그제야 뭔가 알아챈 것일까?
하나리의 눈에 이채가 띠기 시작했다.
“설마 네가 그……?”
“예.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공손무의 정체를 안 하나리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며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나리가 그를 꼭 껴안으며 소리쳤다.
“공손무! 정말 너로구나! 정말 공손무, 너야!”
“예. 저입니다.”
놀라워할 것은 알았지만, 갑자기 그녀가 안으면서 울음을 터뜨리자 공손무는 조금 당황했다.
“크흑!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널 그때 제대로 구했어야 하는 건데!”
공손무가 하나리를 살짝 떼어 놓더니 눈물을 쏟고 있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리 님이 그날 복면인들에게서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에 없었을 겁니다. 하나리 님은 절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후우…….”
하나리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그 조그만 꼬맹이가 이렇게까지 컸다니 믿을 수가 없어.”
“하핫. 저도 가끔은 이렇게까지 성장한 제가 믿기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리가 공손무의 팔을 매만졌다.
“어라? 팔은 괜찮은 거니? 다리도 이제 절지 않는 것 같고. 어떻게 된 거야?”
“다 할아버지 덕분이죠.”
“할아버지?”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섬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연이 깊은 사이인 것 같은, 자리라도 따로 마련할까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숲 안에 마련된 조그마한 막사에 용종찬과 공손무 그리고 하나리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들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공손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청부업자의 의뢰인이 하나리 님이라니요.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용종찬도 그것이 궁금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나리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게 되고 난 후 나는 투옥되었어. 죄목은 천살성인 너와 죄인인 주도진인의 도피를 도운 죄. 그 이후 몇 년 동안 가축처럼 갇혀 있다가 파문을 당했어. 매화검수를 처형시킬 수는 없다는 몇몇 장로들의 의견 때문에 죽음은 면한 거지. 그 이후로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며 숨어 살다가 최근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거야.”
“화산파 내부는 어떻게 됐나요?”
“그날 이후 장문인은 자리에서 쫓겨나셨고, 대장로 천승진인(天昇眞人)이 겸직으로 장문인까지 맡았다. 전대 장문인은 이후 병으로 돌아가셨지. 진짜 병으로 돌아가셨는지 독살을 당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천승진인!”
그 이름을 들은 공손무가 이빨을 씹으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럼 사부님은?”
그의 한마디에 찻잔을 만지던 하나리의 손길이 멈추었다.
“사부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하나리가 숨을 한차례 고르며 말을 이었다.
“네 사부, 주도진인께서는 그날 중상을 입으셨어.”
“그래서 어찌 되셨습니까?”
“나와 함께 투옥되었는데 그것이…….”
하나리가 뜸을 들이자 공손무는 답답했다.
“하나리 님!”
“흥분하지 마. 정확한 것은 나도 모르니까.”
“모른다니, 그 무슨?!”
“중간에 천승진인이 옥사로 한번 찾아오더니 주도진인을 꺼내 가더군. 그 이후로는 주도진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어.”
“사부님을 꺼내 갔다고요?”
“그래. 그 후로는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불명이야. 말 그대로 그냥 사라졌어.”
“사라지셨다라…….”
그녀의 말에 격앙됐던 공손무의 표정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군요. 사부님은 사라지셨군요.”
“무야, 괜한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아니요! 사부님이 그냥 사라지셨다면 얘기가 다르죠. 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하나리는 확고한 의지를 보인 그에게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공손무가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이번에는 용종찬이 그녀에게 물었다.
“도대체 청부업자들에게 무엇을 의뢰한 것이냐?”
이를 들은 하나리가 어딘가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화산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르신과 주도진인께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이제 화산파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과의 전쟁에 뛰어들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리의 말에 용종찬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흑사교…….’
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군지 찾은 거냐?”
하나리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한 실체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 어차피 이렇게 살 바에야 목숨을 걸고서라도 한번 부딪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천비회를 찾은 것이고요.”
“정확히 무슨 의뢰를 한 것이냐?”